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동학농민봉기

동학군의 봉기를 ‘농민혁명’이나 ‘농민전쟁’이라 하여 국가체제의 급진적 변혁을 모색한 운동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 대신 ‘동학농민봉기’라는 호칭이 농민군의 정신적 배경, 사회적 계층, 저항의 양태를 나타내는 데 가장 적합하다
(p.44)

청일전쟁

청의 패배로 1895년 4월에 체결된 시모노세키(下關)강화조약은 한국이 '완전 무결한 독립자주국' 임을 확인하고, '독립자주'를 손상시키는 청에 대한 조공과 사대 관계를 폐지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로써 한국에 대한 청의 종주권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이 점에서 청일전쟁은 개항 이후에도 청이 유지하고자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인 조공체제를 최종적으로 해체하였다. 그렇지만, 한국의 '독립자주'는 청에 대해서만 의미를 가졌다. 청일전쟁 이후 한국은 청을 대신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p.47)

이토 히로부미

일본 메이지시대 정치가, 메이지유신 후 영어에 능하여 외교 업무에 종사하였다. 1870년 화폐제도, 은행제도를 조사하러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1881년에는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을 방문하였다. 1885년 초대 총리대신에 취임했으며, 일본 헌법의 제정을 주도하였다. 1906년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두자는 입장에 서서 양국의 병햡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1909년 통감 사임 후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저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p.66)

이토 히로부미

1907년 7월에 일어난 헤이그 밀사사건은 대한제국을 명목으로나마 유지해 두려는 이토 통감을 비롯한 온건파의 입장을 약화시켰다.
(p.76)

이후 통감을 사퇴한 이토는 1909년 10월 하얼빈(哈爾濱)에서 동양 평화의 대의를 저버린 죄를 묻는 안중근(安重根)에서 피살되었다. 이후 병합론은 더욱 강화되어 1910년 6월에 도쿄에서 일본 정부와 통감부의 인물로 병합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p.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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