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51 이웃 나라들과의 국경 획정(劃定)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51 이웃 나라들과의 국경 획정(劃定)
[ 북방의 영토 획정 ]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고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을 지향한 일본은, 이웃 나라들과의 사이에 국경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국경을 획정(劃定)하지 않으면 주민의 생명이나 재산을 보장하거나 국민으로서의 평등한 권리를 주민에게 부여하는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북방의 가라후토(樺太, 사할린)에는 마미야 린조(蔵間宮林)의 탐험 이후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후 러시아인이 이주를 시작하여, 러시아는 가라후토가 일본인과 러시아인의 잡거(雜居)의 땅이라고 일본인에게 인정하게 하였다. 양자의 사이에서는 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영국은 일본이 만일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면, 가라후토는 물론이고 홋카이도까지 빼앗길 것이라고 메이지 정부에 경고해 왔다. 신정부는 러시아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1875(메이 지 8)년 러시아와 가라후토, 지시마교환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일본이 가라후토 전체를 러시아에 양도하고, 그 대신에 지시마열도(千島列島, 쿠릴제도)를 일본령으로 하는 것이었다.

태평양 방면에서는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를 일본령으로 하여 1876년에 각국의 승인을 얻었다. 이미 영국선이 이곳에도 영국기를 세우고 있었지만, 미국의 반대로 일본령이 되었다.

[ 대만 출병과 류큐(琉球) ]
일본은 청과의 국교 수립을 위해 1871(메이지 4)년 일청수호조규(日淸修好條規)를 맺었다. 이는 국제법의 원리에 근거해 양국의 대등한 관계를 정한 조약이었다.

같은 해, 류큐(역주: 지금의 오키나와)의 도민 66명이 대만에 표착하여 54명이 대만 주민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류큐는 일본과 청 양쪽에 종속되어 있었다. 일본은 류큐 도민의 살해 책임을 청나라에게 물었지만, 청은 대만 주민을 「화외민(化外民)」(*1)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대만 주민을 벌하는 것은 일본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1874년 대만에 병사를 보냈다(대만 출병). 이 충돌은 근대 국민 국가의 관념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청과 일본 간의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청과의 협의 결과,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청은 이로 인해 류큐 도민을 일본 국민으로 인정했다. 그래서 일본은 1879(메이지 12)년 류큐를 일본 영토로 삼고 오키나와현(沖繩縣)을 설치했다. (류큐 처분[琉球處分])

그리하여 일본은 이웃 여러 나라 사이의 국경을 거의 획정짓는 데 성공했다.

(*1) 「국가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자」라는 의미.

<일청수호조규(1871년)>
제1조 일청 양국은 우호를 돈독히 하고, 서로 영토를 존중한다.
제2조 만약 다른 나라로부터 부당한 간섭이 있으면 양국은 상호 원조한다. (일부 요약)

[ 조선과의 외교 ]
메이지 정부는 유신 직후인 1868년, 새로 조선과 국교를 맺기 위해 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이 준비한 국서(國書)에 부적절한 문자가 사용되었다(*2)는 이유로 외교 관계 맺기를 거부했다. 메이지 정부는 조선과의 외교에서는 처음부터 실패하게 되었다.

(*2) 일본 사절이 지참한 국서에 일본 천황을 일컫는 「황(皇)」이라는 글자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 이외에는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52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과 정한론(征韓論)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52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과 정한론(征韓論)
[ 이와쿠라사절단 ]
1871(메이지 4)년 폐번치현 후에 신정부(新政府)로서 정식으로 조약 체결국을 방문하고, 동시에 조약개정의 예비 교섭을 하기 위해 전권대사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대표로 하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의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으로 파견되었다(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

사절단은 유학생을 포함해서 전체 110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절단은 2년 가까이 구미 문명을 현장에서 습득한 결과, 구미와 일본의 문명의 진보 차이 를 약 40년으로 어림잡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대 산업의 확립(부국[富國])을 우선으로 해서 구미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쿠라사절단이 본 세계>
(구메 구니타케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에서 발췌 요약)
◆유럽에서 「의원을 선거로 뽑고 법률을 모두가 함께 의결하는 것은 공평한 것 같지만, 이견(異論)이 나와 다수결로 정하면 대부분 좋은 안은 통과되지 않는다」 「영국이 풍요로운 것은 민중이 열심히 일을 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약자의 살은 강자에게 먹히게 된다. 유럽인이 멀리까지 항해하게 되면서 열대(熱帶)의 약한 나라는 유럽인들이 다투어 먹는 바가 되었다.

[ 정한론 ]
그런데 국내에서는 1873(메이지 6)년 일본의 개국 권유를 거절해 온 조선의 태도를 무례하다고 하여, 사족(士族, 역주: 메이지유신 이후 옛 무사 계급에게 주어진 신분)들 사이에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개국을 강하게 요구하는 정한론이 일어났다. 폐번(廢藩, 역주: 번 제도의 폐지)으로 실업한 사족들은 징병령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무사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하여 불만이 높아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조선과의 싸움으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보여주려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기대를 건 것은 사절단의 부재 동안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였다. 사이고는 정부에서 근대 국가를 만드는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사족들의 정신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들의 사회적 역할과 명예를 지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이고는 자신이 사절단으로서 조선에 갈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 다른 참의(參議)도 이에 동의하여 정부의 결정을 얻어냈다. 사이고 자신은 전쟁을 각오한 교섭으로 조선에게 문호를 열게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정부의 분열과 세이난전쟁(西南戰爭) ]
그러나 구미 각국의 강대한 군사력을 목격하고 귀국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이와 쿠라 도모미(岩倉具視)등은, 국력의 충실을 먼저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출병은 구미의 간섭을 초래한다고 우려하였다. 이에 이들은 조정과 정부 부내(部內)에 공작하여, 각의에서 정식으로 결정된 사이고(西鄕)의 사절 파견을 연기하였다. 이에 화가 난 사이고와 에토 신 페이(江藤新平),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은 정부의 관직을 사임하였다. (*1)

1876(메이지 9)년 정부는 일시금 급부를 지불하여, 구번(舊藩)을 대신하여 정부가 사족에게 급부(給付)하고 있던 녹(祿, 역주: 급여)을 중단하였다. (질록처분[秩綠處分]) 이에 불만을 가진 각처의 사족이 정부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사이고는 가고시마 (鹿兒島)로 돌아가 사학교(私學校)를 열고 있었는데, 불만을 가진 전국의 사족은 사이고에게 기대를 하였다. 1877(메이지 10)년, 가고시마의 사족들은 사이고를 지도자로 해서 거병 하였지만 징병된 평민들로 이루어진 정부 군대에게 패하였다. (세이난[西南]전쟁) 이후 사족들의 무력에 의한 저항은 종언을 고했다.

(*1) 이 뒤에 일본은 1875년 조선의 강화도 앞바다에 군함을 파견하여 무단으로 주변의 연안을 측량하는 등의 압력을 가하였기 때문에, 군함이 포격을 당하여 교전하는 사건이 발 생하였다 (강화도사건). 이것을 이유로 일본은 다음해인 76년에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條規) 를 맺어 조선을 개국시켰다. 이것은 조선에게 있어서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53 식산흥업(殖産興業)과 문명 개화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53 식산흥업(殖産興業)과 문명 개화
[ 식산흥업(殖産興業) ]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구미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식민지화는 진행되었다. 정부는 일본을 구미 나라들에게 지배 받지 않는 강한 나라로 만들고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제창하며 국가 건설에 힘썼다.

1868(메이지 1)년 정부는 막부가 경영하고 있던 광산과 조선소를 관영(官營)으로 하였다. 교통과 통신의 분야에서는 1869(메이지 2)년에 전신제도, 1871년에 우편제도가 시행되고, 나아가 다음해인 1872년에는 신바시(新橋)-요코하마(橫濱) 간에 철도가 개통되었다.

사이고(西鄕) 등이 정부를 떠난 후, 그 중심이 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정부의 강력한 지도와 정부자금의 투입에 의해 근대산업을 육성하는 식산흥업 정책에 착수하였다. 외국의 기계를 구입하고 기술자를 초빙하여 제사, 방적 등의 관영공장(官營工場)을 만들고, 이후 민간에게 불하하여 경공업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미 보여지는 기술의 성숙을 토대로 서양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근대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정부는 1869년에 에조치(蝦夷地)를 홋카이도(北海道)로 개칭하고 사족이나 둔전병(屯 田兵)을 입식(入植)시켜 왔는데, 식산흥업이 정책으로 도입되자 그 일환으로서 홋카이도 개 척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식산흥업에 관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건백서(建白書)>(1874년)
무릇 나라의 강함과 약함은 인민의 빈부에 의한 것이고, 인민의 빈부는 물산(物産)의 많고 적음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물산의 많고 적음은 인민이 공업에 힘쓰는가 아닌가에 기인하자만, 그 근본은 어느 나라에 있어서나 정부의 지도 장려에 의하게 된다. (『오쿠보 도시미치 문서』에서 일부 요약)

[ 문명 개화 ]
메이지유신 직후에는 왕정복고가 선언되기도 한 점도 있어서 국학(國學)이나 신도(神道)의 사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일부에서 대단히 과격해지고, 각지에서 불교를 공격하여 사원이나 불상을 파괴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폐불훼석[廢佛毁釋])

그러나 서양문명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점차적으로 이해하게 되어, 문명개화 의 중요성이 제창되게 되었다. 1873년에는 태양력이 채용되어 1일이 24시간, 1주간이 7일간, 일요일은 휴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인정받게 되었다.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전후부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학문의 권장』 등의 계몽서 가 출판되어, 신분이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는 사회 속에서 독립자존 정신의 중요성이 해설 되어 널리 읽혀졌다. 신문이나 잡지도 많이 발간되어 구미 각국의 생활과 풍속, 사상 등을 소개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도쿄 등의 도시에서는 모자와 양복의 착용, 소고기의 식용, 램프의 사용이 확산되었다. 벽돌로 만든 서양풍 건축의 거리에 는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인력거와 마차가 달리는 문명개화의 광경이 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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