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0]-5 해방의 세계사적 의의

제3부 나라세우기
[10]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10]-5 해방의 세계사적 의의


이후 대한민국이 되는 한반도의 남부가 미국 헤게모니하의 세계체제로 편입된 사건의 세계사적 의의에 대해 좀 더 부연하겠습니다. 흔히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라 하면 동서냉전과 자유무역의 두 가지를 그 기둥으로 꼽습니다. 우선 세계지도를 펴놓고 봅시다. 1980년대까지 거대한 유라시아대륙의 대부분이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제체제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대륙의 동쪽 끝에 하나의 점과 같은 한반도의 남부가 사회주의 국제체제의 바깥에 놓인 것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합니까. 그것은 차라리 기적과 같은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제15장에서 다루게 될 한국전쟁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전쟁은 소련의 스탈린이 한반도의 남쪽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에서 기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전쟁은 미국에 의해 방어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미국은 그들의 젊은이 3만여 명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그 전쟁에 개입했습니까. 한국을 특별히 사랑해서가 아니지요. 전 세계를 사회주의진영의 공세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동서냉전에서 질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0년간 한국인들이 누려온 신체의 자유, 기회의 평등, 대의민주주의 등의 기초적 가치는 세계사에서 그러한 정치 원리에 입각한 국가의 효시를 이루면서 그러한 원리로 세계를 통합고자 했던 미국체제를 배제하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현상입니다.

미국체제의 다른 한 기둥은 세계의 자유무역입니다. 이를 위해 1947년까지 IMF[국제통화기금]와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두 국제기구는 1950년대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의 모든 국가가 미국에 맞서 자유무역을 할 정도로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국가는 미국과의 무역에서 적자였고, 이에 미국은 비경제적인 논리로, 곧 원조의 형태로 달러를 국제사회에 살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냉전의 논리와 깊이 결부되어 있었지요. 그러다가 독일, 일본 등 서방 국가들이 미국과 자유무역을 할 만큼 경쟁력을 갖추게 되는 것은 대개 1958년부터입니다. 드디어 1961년부터 GATT 제6차 케네디라운드가 펼쳐지면서 세계 자유무역체제가 본격적인 기치를 올리지요. 다 잘 아시는 대로 대한민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이 개시되는 것도 바로 그 케네디라운드라는 운동장에서였습니다.

그러니까 1945년 8월의 해방이란 역사적 사건은 한국인들에게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 시장경제를 자신의 능력으로 추구해 볼 수 있는 국제적 조건으로서 이른바 미국체제가 한반도의 남쪽에 들어선 글로벌한 사건이었습니다.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짙은 안개 속의 새벽길처럼 불확실해보였습니다. 아니 불가능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의 업보랄까, 분단과 전쟁이라는 커다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건국사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11]-1 역사교과서의 난폭한 서술

[11] 분단의 원인과 책임  [11]-1 역사교과서의 난폭한 서술
전장에서 잠시 언급하였습니다만, 연합군에 의한 해방은 우리 민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는 역사교과서의 서술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 장을 시작하겠습니다. 문제의 금성사판 교과서를 좀 더 읽어 가면 같은 맥락의 다음과 같은 기술이 나옵니다. “일장기가 걸려 있던 그 자리에 펄럭이는 것은 이제 성조기였다. 광복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역사적 순간은 자주 독립을 위한 시련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에 걸린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대신 걸린 것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1945년 9월 9일의 일입니다. 그런데 교과서는 그것이 자주 독립을 위한 시련의 출발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합군에 의한 해방이 장애가 되었다는 앞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여기서 좀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미국 때문에 민족의 분단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그 말을 노골적으로 하기 어려우니까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고 있을 뿐입니다.

교과서를 쓴 사람들이나 교육부에서 검인정에 담당한 사람들이 해방전후사에 대해 어떠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이 대목에서 더 없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다름 아니라 제1장에서 정리한 《인식》의 역사관 그대로입니다. 한마디로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혁명 그것이지요. 해방 전후의 그 시대를 살면서 그 혁명을 위해 투쟁하신 분들을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소신대로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은 이미 지나간 역사입니다. 조용한 성찰의 대상일 뿐이지요. 문제는 살아 있는 사람들, 곧 교과서를 집필한 역사가들과 검인정에 종사한 대한민국의 책임이 있는 공직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묻습니다. 대한민국의 지난 60년의 역사가 그렇게도 허망한 것이어서 아직도 마오의 신민주주의혁명에 집착하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과서에 대한 저의 해석과 비판이 틀렸다든가, 아니면 지난 60년간의 역사가 너무나 허망하여 여전히 마오의 혁명이론이 유효하다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전후 세계를 이끌어 온 미국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실수했다고 솔직히 사과하든가, 어느 쪽이든 분명한 대답을 듣고 싶군요.

[11]-2 해방 공간의 사회 실태

[11] 분단의 원인과 책임  [11]-2 해방 공간의 사회 실태
이제 조금 감정을 가라앉히고 민족 분단의 원인을 차분히 따져 보도록 합시다. 역사관의 문제를 배제하고 논리적으로만 이야기하더라도 위 교과서의 서술에는 다음과 같은 허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해방 이전부터 우리 민족의 대다수가 합의한 ‘나라세우기’(state building)의 마스터플랜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전제가 설정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일 수가 없지요. 민족이란 것 자체가 설정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일 수가 없지요. 민족이란 것 자체가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받는 가운데 한반도의 주민집단이 서서히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저의 제2장에서의 주장을 생각하면 답이 간단하게 나옵니다.

해방 직후 그 생성 중인 민족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채만식의 《역로》라는 소설이 재미있을 것 같아 소개합니다. 해방 몇 달 뒤에 채만식은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사기 위해 세 시간이나 서 있었습니다. 창구 앞에서는 긴 행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암표 장사가 한창입니다. 기차표를 파는 역무원은 걸핏하면 거스름돈을 돌려주지 않습니다. 어느 중학생이 거스름돈을 떼이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사람들의 질이 전보담 되려 떨어졌어. 걱정야.”

혼잡한 열차 속에서 겨우 자리를 잡은 채만식의 주변에서 열띤 정치 토론의 장이 벌어집니다. ‘늙은 농민’은 이승만을, ‘잠바 청년’은 여운형을 지지합니다. 어느 ‘시골신사’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찬양합니다. 열띤 토론은 천안역에서 중단됩니다. 유리창을 깨고 쌀 보퉁이를 들이밀면서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기어오릅니다. 여기저기서 고함과 함께 싸움이 벌어집니다. 부산에서 천안까지 쌀을 구하러 온 어떤 사람은 영악한 농민들이 일본으로 쌀을 밀수출하고 있다고 성토합니다. 그렇게 채만식의 눈에 미친 세태는 어지럽고 어두웠습니다. “백성이 아직 어리구 철이 아니 나서 그런가”, 아니면 “나이가 너무 많아 늙어빠져서 노망 기운으루다 그러는 것인가.”

해방 당시의 사회 실태와 관련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전상인 교수의 논문, <해방공간의 사회사>가 유익합니다. 여기서는 민족이니 혁명이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이 관찰의 주요 대상입니다. 이름 없이 살다간 보통 사람들이라 해서 그들이 무기력하게 그 시대에 놓여졌다고 이야기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그 시대의 주체로서 그 시대를 치열하게 겪어내고 적극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차라리 그들은 《역로》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규탄하고 있듯이 더없이 영악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했던 것은 민족이니 계급이니 하는 거창한 정치 담론이 아니라 가족, 가문, 마을, 곧 그들의 전통적인 인간관계였습니다.

전상인의 논문에 의하면 해방 직후는 의외로 평온하였습니다. 북한 지역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만, 일본인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회는 조금씩 문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통에 억눌렸던 온갖 소비욕구가 분출하였습니다. 왕성한 쌀 소비가 대표적인 현상이지요. “쌀이 해방이야”, “쌀이 민족이야.” 그리고 애국가, 태극기, 3·1절 등과 같은 새로운 민족상징이 고안되고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지표들이었습니다. 전상인은 거론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미군의 위안부도 지표의 하나로 포함될 만하지요. 그런데 쌀이 일본으로 밀수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방의 상징인 쌀이 부족해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매점매석이 벌어졌습니다. 미군정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여 폐지했던 일제의 공출제도를 부활시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쌀을 강제수매 당하는 농민들이 불만입니다. 미군정이 일정보다 못하다는 무책임한 투정이 터져 나옵니다.

[11]-3 소용돌이의 중앙 정치

[11] 분단의 원인과 책임  [11]-3 소용돌이의 중앙 정치


신탁통치안을 찬성하는 좌파의 시위

신탁통치안을 찬성하는 좌파의 시위.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가문과 촌락과 같은 전통적 사회관계에 익숙해 있었을 뿐입니다. 회사, 조합, 교회, 우애단체 등, 시민사회의 성립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개인과 국가 간의 중간단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국가는 강대했으며, 개인은 허약하였습니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 구조에서 중앙정치는 아무런 여과 없이 개인을 대량으로 동원하였습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조차 걸핏하면 정치를 입에 담을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중앙정치의 과잉현상을 당시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으로 근무하던 그레고리 핸더슨(Gregory Henderson)이란 사람은 ‘소용돌이의 정치’(politics of vortex)라고 표현했습니다. 미국 남부의 평원을 가끔 엄습하여 집과 마을을 파괴하는 토네이도라는 거대한 회오리바람 있지 않습니까. 소용돌이란 그런 걸 말합니다. 핸더슨은 한국의 중앙정치가 발휘하는 거대한 흡인력을 그렇게 시니컬하게 비유하였지요.

중앙정치는 이념을 달리하는 정파 간의 치열한 난투극이었습니다. 중앙의 난투극은 ‘소용돌이의 정치’를 통해 전국적 범위로 확장되었습니다. 저 산골의 필부조차 정치적으로 동원되고 상호 분열하였습니다. 왼쪽으로 동원된 사람들은 계급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산다는 사회주의의 미망(迷妄)을 추구하였습니다. 농촌사회에서 차별을 받던 하민들이 주로 그 쪽 편에 섰습니다.

반면에 개인의 가치와 사유재산의 원리를 중시하는 상공업자, 신흥 테크노크라트, 농촌의 부민은 오른쪽에 가담하였습니다. 전통 유생들은 대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을 모시는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른쪽에 가담한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결속하는 명분은 민족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민족은 오늘날과 달리 우파 자유진영의 정치적 자산이었지요.

그렇지만 좌와 우의 구분이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인 계급이니 민족이니 하는 명분에 이끌려 영문도 잘 알지 못한 채 대립하고 분열하였습니다. 제가 방문한 적이 있는 충남 논산군 성동면의 어느 마을에서는 엉뚱하게 지주 가문이 좌익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지배를 받던 마을의 하민들이 우익에 가담하였습니다. 경북 예천군 보문면의 어느 마을에 가보니 거기서는 윤씨 친족집단과 정씨 친족집단이 대립하였는데, 윤씨가 왼쪽으로 가자 정씨는 무조건 오른쪽으로 갔습니다. 명실상부하게 ‘우리 민족’이라 할 만한 공동체의식과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단합이 성립해 있었더라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사회들’(societies)이 넉넉히 성립해 있었더라면 어찌 바깥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계급이니 민족이니 하는 수입 담론으로 인간들이 그렇게 대립하고 분열할 수 있었겠습니까.

서로 얼굴을 빤히 아는 농촌사회마저 그러하였기에 익명의 인간들이 대립한 중앙정치가 더욱 그러했음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이념의 정치가들이 허심탄회하게 약간씩 양보하면서 민족의 분단만큼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짐을 놓은 적은 없었습니다. 언젠가 저는 미군정의 지원하에 여운형과 김규식 선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좌우합작운동을 알고 싶어서 관련 연구서를 정독한 적이 있습니다만, 적잖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좌우합작운동이라고 하나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했던 것처럼 공개적인 협약과 실천으로서 합작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합작을 위한 명분과 설득이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설왕설래했을 뿐입니다. 그를 위해 서울의 이름 있는 정치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은 없었거니와 그 때문에 평양의 정치가들이 서울에 온 적은 소문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좌우합작운동’이란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좌우합작시도’ 정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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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