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3]-5 대전환

[3] 조선왕조는 왜 망하였나  [3]-5 대전환
20세기의 한국사는 전통 왕조와 문명에 대한 이러한 시각 조정이 전제될 때 비로소 그 역사적 의의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20세기의 한국사는 나라를 빼앗겼다가 독립운동으로 다시 나라를 되찾았던 역사만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문명사의 일대 전환이 있었던 겁니다. 중국문명권에서 이탈하여 서유럽문명권으로 편입된 역사가 20세기 한국의 역사입니다. 유교문명권에서 기독교문명권으로, 대륙농경문명에서 해양상업문명으로의 일대 전환이 있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역사학은 세계적 수준에서 보면 너무나도 자명한 이 같은 관점을 무슨 영문인지 우리의 근·현대사에 적용하는 데 그렇게도 망설여 왔습니다. 문명사의 대전환을 직접 강요한 세력이 원래 같은 문명권에 속했던 일본이어서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워서 그랬던가요. 아니면 섬나라 오랑캐라고 가볍게 여기던 일본에 당한 자존심의 상처가 너무 깊었던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선량한 주인론’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이런 식의 마음의 병을 어루만지는 자위행위에 불과합니다. 지금부터는 20세기의 한국사를 일본과의 관계로만 국한된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문명사의 대전환이라는 넓디넓은 시각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리 보입니다. 그렇게 과거를 훌훌 털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위한 기본 전제입니다.

[4]-1 역사란 무엇인가?

[4] 식민지 수탈론에 대하여  [4]-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입니까. 주제가 빗나가는 듯합니다만, 이 문제를 잠시 생각해 봅시다. 흔히들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아닙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 그것이 역사이지요. 기억되지 않은 과거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무이지요. 어려운 문제는 다음부터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객관적 기억은 가능한가. 저는 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언제 홍수가 발생했고 언제 일식이 일어났는지, 자연현상에 대한 객관적 기억은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요. 그렇지만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인간들이 서로 다툰 사회현상에 관한 기억은 이해관계가 다르면 다르게 기억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있어서 절대적인 객관은 없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학이란 학문이 과연 성립할까요. 무엇 때문에 역사가는 먼지 묻은 고문서를 뒤지면서 과거의 사실을 캐고 있나요. 저는 《재인식》에 실은 저의 논문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에서 ‘직업으로서의 역사학’이란 절을 두어 이 문제에 대한 저의 평소 고민을 펼쳐 보았습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역사가란 ‘역사와 투쟁하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역사가가 투쟁하는 역사란 대중의 과거사에 대한 집단기억을 말합니다. 대중의 집단기억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지만 특정 이해관계 집단이나 정치가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조작되어 대중에게 주입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최고수준의 집단기억이라 할 국가와 민족의 역사에서 후자의 경우를 자주 봅니다. 우리 한국인은 반만년 전부터 하나의 민족이라는, 오늘날 한국인이 공유하고 있는 민족의식이 그 좋은 예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 대해선 제2장에서 쓴 그대로입니다. 역사가는 이러한 대중의 집단기억에 매몰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역사가는 대중의 집단기억이 정치적으로 기획되거나 조작되었을 수 있음을 사료에 기초하여 대중에 알리는 전문 직업인이지요.

역사가의 비판을 통해 대중은 그들의 과거사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갖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모색할 지혜를 과거사의 성찰에서 찾는 것이지요. 그러한 성찰의 화두를 대중에 던지는 직업능력의 소지자가 역사가입니다. 역사가의 고발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역사가는 자기의 발언이 객관적이거나 법칙적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사료를 보니 이렇게 저렇게 통념과 다르더라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선진사회라면 대중은 그러한 역사가의 발언을 경청하지요. 대중이 역사가의 발언을 무시하면 그 사회는 후진사회입니다. 일단은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직접 먼지 묻은 고문서를 뒤지면서 얻은 지식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다른 역사가의 다른 의견과 견주면서 어느 의견이 옳은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저는 대중과 역사가 사이에 이러한 민주적인 분업관계가 성립해 있는 사회야말로 진짜 선진사회라고 생각합니다.

[4]-2 국사교과서의 수탈론

[4] 식민지 수탈론에 대하여  [4]-2 국사교과서의 수탈론
지금부터 저는 이 같은 역사가의 직업의식에서 1910~1945년 일제하의 식민지로 있었던 우리의 불행했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다 잘 아시는 대로 그 시대에 대해 보통의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기억은 한마디로 요약하여 ‘수탈’입니다. 일제의 조선 통치는 수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남의 재산을 빼앗는 행위가 수탈입니다. 일제는 무자비하게 우리 민족의 토지와 식량과 노동력을 수탈하였지요. 그래서 우리 민족은 초근목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거나 해외로 유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60년간 국사교과서가 그렇게 국민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게 믿고 있지요.

국사교과서를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2001년에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보면 “일제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억압, 수탈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컨대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전국 농지의 4할이나 되는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수탈하였으며, 이 토지를 일본에서 이주한 일본농민이나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과 같은 국책회사에 헐값으로 불하하였습니다. 또 총독부는 생산된 쌀의 절반을 빼앗아 일본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농사를 다 짓고 나면 경찰과 헌병이 총칼을 들이대고 절반을 빼앗아간 것처럼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문맥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또 일제는 노동력을 수탈하였습니다. 1940년대의 전시기에 약 650만 명의 조선인을 전선으로 공장으로 탄광으로 강제 연행하였으며, 임금을 주지 않고 노예와 같이 부려먹었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 조선의 처녀들이 있었습니다. 정신대(挺身隊)라는 명목으로 조선의 처녀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는데,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른다고 교과서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서 확인한 사실입니다만, 국사 교실에서 이 대목이 나오면 선생도 울먹이고 학생도 울었답니다. 그렇게 악독한 수탈을 당한 조상들이 너무 서럽고 분하여 울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감히 말하겠습니다. 이런 교과서의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예 사실이 아닌 것도 있고 비슷한 사실이 없지 않으나 과장되거나 잘못 해석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깜짝 놀랄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교과서를 쓴 역자학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제가 이전에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혹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대중의 집단기억으로서 역사가 정치화된 역사가에 의해 또는 역사화된 정치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역사의 본질을 국사교과서의 수탈설만큼 적나라하게 잘 보여 주는 다른 사례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생산된 쌀의 거의 절반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쌀이 건너간 경로는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수출이라는 시장경제의 경로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는 수출이 아니라 ‘이출’(移出)이라 했습니다. 수탈과 수출은 매우 다르지요. 수탈은 조선 측에 기근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지만, 수출은 수출한 농민과 지주에게 수출소득을 남깁니다. 쌀이 수출된 것은 총독부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쌀값이 30%정도 높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수출을 하면 농민과 지주는 더 많은 소득을 얻게 됩니다. 그 결과 조선의 총소득이 커지면서 전체 경제가 성장하게 되지요. 모자라는 식량은 만주에서 조나 콩과 같은 대용 식량을 사와서 충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추계에 의하면 인구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이 줄었다고도 반드시 이야기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또 수출소득으로 면제품과 같은 공산품을 일본에서 수입하거나 아예 기계나 원료를 수입하여 방직공장을 차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 김성수 선생의 경성방직(京城紡織)이 그렇게 해서 세워진 공장입니다. 요컨대 수출을 하면 수탈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체 경제가 성장하게 마련이지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한국의 교과서는 이 평범한 경제학의 상식을 거꾸로 쓰고 있을까요.

[4]-3 토지수탈설이 만들어진 과정

[4] 식민지 수탈론에 대하여  [4]-3 토지수탈설이 만들어진 과정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인천항에 야적되어 있는 쌀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인천항에 야적되어 있는 쌀

토지의 수탈설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농지의 4할이나 되는 대량의 토지가 수탈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로부터도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점을 저는 1923년에 쓰인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에서 확인합니다. 이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일제의 수탈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천택·철도·광산·어장 내지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기능을 칼로 베이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가옥세·인구세·가축세·백일세(百一稅)·지방세·주초세(酒草稅)·비료세·종자세·영업세·청결세·소득세…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가고(이하 생략)

신채호 선생이 ‘강도 일본’의 각종 수탈을 비난하는 어조는 신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그 수탈의 종목 가운데 쌀의 수탈은 물론, 토지의 수탈도 보이지 않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지요. 실제로 농지의 4할이나 수탈당했다면 신채호 선생이 그에 대해 침묵했을 리가 없지요. 선생이 열거하고 있는 수탈의 목록은 새로운 국가권력으로 들어온 일제가 공유 자원을 개발하거나 각종 세금을 부과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죄다 공권력에 의한 공적 통치행위의 영역입니다. 선생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는 별도의 논쟁거리입니다. 어쨌든 타인의 재산을 대가도 치르지 않고 빼앗는 그러한 수탈은 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제가 조선인의 토지를 대량 수탈했다는 신화가 최초로 학술 논문의 형태로 제시되는 것은 1955년 일본 도쿄[東京]대학에 유학 중이던 이재무에 의해서입니다. 이재무는 토지조사사업 당시 총독부가 농민들로 하여금 소유 농지를 신고하게 한 조사방식이 실은 수탈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소유권 관념이 희박하였고 신고라는 까다로운 행정절차에 익숙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이러한 농민들에게 기한부 신고를 강요하여 대량의 무신고지가 발생하도록 유도하였다. 연후에 그 토지를 국유지로 몰수하여 일본 이민과 동척 회사 등에 유리하게 불하하였다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면서 이재무가 무슨 실증적 근거를 내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다는 개인적인 신념에 근거한 일방적인 추론이었지요. 이재무의 개인적 신념은 오늘날의 연구 수준에서 보면 허허롭기 짝이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토지를 가리켜 ‘사람의 목숨줄’[人之命脈]이라 하였습니다. 소유권 관념이 희박했다니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또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500년간 3년에 한 번씩 국가에 호적을 신고해야 했습니다. 신고 절차에 익숙지 않았다니 그것도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토지수탈설이 교과서에 최초로 실리는 것은 1962년 역사교육연구회라는 단체가 만든 중등 국사교과서에서입니다. 이 교과서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수탈한 결과 인본인의 토지가 전국의 거의 절반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역시 무슨 근거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뒤이어 1967년 민영규가 쓴 교과서에 전국 국토의 40%가 수탈당했다는 기술이 나옵니다만, 그 역시 무슨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의 교과서는 검인정 제도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쓴 여러 교과서가 있었는데, 모든 교과서가 다 그렇게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부터 교과서가 국정 제도로 바뀝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 이상 민영규가 만들어 낸 40% 수탈설이 정설로 교과서에 실려 왔습니다. 앞서 말한 식량 수탈설도 마찬가지입니다. 1960년대까지의 교과서에는 그러한 기술이 없었습니다. 국정 교과서로 바뀐 뒤부터 일제가 식량의 절반을 실어 날랐다는 식의 난폭한 서술이 등장하지요.

국정으로 바뀐 교과서의 서술이 거칠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장에서 비판한 바입니다만,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민족의 이름으로 단행한 유신의 시대였습니다. 민족주의가 더 없이 강세를 떨치던 시기였지요. 역사가들은 이 같은 시대적 추세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역사가는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만들어 냄으로써 정치가와 대중의 민족주의적 욕망에 부응하였지요. 교과서의 서술이 난폭해진 것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였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경기도 고양군에서 대지를 측량하고 있는 모습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경기도 고양군에서
대지를 측량하고 있는 모습

교과서와 별도로 일제의 토지 수탈에 관한 학술 연구서가 나오는 것은 1982년의 일이었습니다. 이 해에 신용하 교수가 출간한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지식산업사, 1982)는 뒤늦게나마 일제의 토지 수탈을 입증한 연구라고 크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저도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뒤 제 나름대로 한국의 토지제도사를 연구하면서 저는 신 교수의 위 책이 진지한 실증의 산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배 교수에 대한 무례한 언사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대중의 역사인식에 대한 매우 공적인 문제라 어쩔 수 없군요. 이재무와 달리 신 교수는 일제의 국유지 수탈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일제가 민유지를 국유지로 수탈하고자 광분했던 모습을 신 교수는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들고”라고 매우 선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 증거로서 신 교수는 일제가 수탈했던 국유지의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두는 1918년에 출간된 토지조사사업의 보고서에 소개된 분쟁사건을 신 교수가 편리한 대로 각색한 것에 불과하지요. 예컨대 경남 김해의 어떤 땅을 두고 경남 도장관은 국유지임을, 민간인 누구는 민유임을 주장하는 분쟁에 대해 보고서는 각각의 주장은 이렇고 저렇다는 식으로 중립적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신 교수는 분쟁의 결과는 보나 마나 뻔한 것이라 하여 모조리 국유지로 판결이 난 것처럼 바꾸어 썼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제대로 된 실증이라고 할 수 없지요.

신용하 교수가 위 책을 출간한 그 해에 경남 김해 군청에서 토지조사사업 당시에 작성된 문서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자료를 이용한 논문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1985년부터입니다. 저도 그 과정에서 한 몫을 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총독부는 국유지를 둘러싼 분쟁의 심사에서 공정하였으며, 나아가 기존의 국유지라도 민유인 근거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민유지로 바꾸어 판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분쟁을 거쳐 남은 국유지는 전국의 총 484만 정보의 토지 가운데 12.7만 정보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마저 대부분 1924년까지 일본 이민이 아니라 조선인 연고 소작농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불하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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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