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5]-5 사유재산제도의 확립

[5] 식민지근대화론의 올바른 이해  [5]-5 사유재산제도의 확립


충남 일본 질소비료공장의 완성된 전경

충남 일본 질소비료공장의 완성된 전경

어떻게 하여 이 같은 경제성장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경제성장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만, 저는 식민지기와 같은 체제의 전환기에는 사유재산제도의 확립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유재산제도가 성립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저축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언제 누가 와서 강제로 빼앗아 갈지 모르니까요. EH 누구도 투자를 하려 하지 않지요. 투자의 과실이 자기 것이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실제 오늘날 아프리카나 남미의 여러 나라가 좀처럼 경제성장의 궤도에 올라서지 못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사유재산제도의 미비에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 비슷한 상황을 19세기의 조선왕조를 찾은 많은 외국인이 이야기했습니다. 예컨대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두루 여행한 저명한 지리학자 이자벨라 비숍(Isabrlla B. Bishop) 여사는 당시의 지배계급 양반을 가리켜 ‘면허받은 흡혈귀’라고 표현하였지요. 그만큼 일반 민중들은 양반관료의 자의적 수탈의 대상으로 무방비상태에 있었습니다.

한국사에서 유·무형 재산의 포괄적인 범위에 걸쳐 사유재산 제도가 성립하는 것은 1910년대 초의 일이었습니다. 전술한 대로 1912년에 일본의 민법이 이식되었습니다. 재산권에 관한 근대 민법의 기본 원리는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소유권 절대의 원칙’입니다. 소유권은 절대적이며, 국가도 이를 임의적으로 침해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계약자유의 원칙’입니다. 이는 재산권을 양도하거나 처분함에서 소유자의 자유의사에 기초한 계약만이 법적으로 유일하게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원리를 보장하기 위해 민법은 모든 재산권은 국가가 정한 법에 따라 등기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에 맞추어 1912년에 ‘조선부동산등기령’이 공포됩니다. 그보다 앞서 1910년에는 ‘특허법 등을 조선에 시행하는 건’이 공포되어 일본에서 시행 중인 특허법, 의장법(意匠法), 실용신안법(實用新案法), 상표법, 저작권법이 조선에도 시행되었습니다. 그렇게 무형의 지적재산에서도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하였습니다.

이렇게 재산제도를 정비한 다음 일제는 조선과 일본을 하나의 단일 시장으로 통합하였습니다. 1920년까지 사치품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관세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렇게 상품과 자본이 오가는 데 장애가 없어졌습니다. 요사이 말로 FTA[자유무역협정]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에 따라 두 지역 간의 수출입 무역이 크게 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자본이 일본에서 건너와 조선의 농토를 개간하고 수많은 공장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식민지의 경제성장을 이끈 요인은 일본의 시장과 투자였습니다.

[6]-2 중인 출신의 협력자들

[6] 협력자들  [6]-2 중인 출신의 협력자들
협력자들은 주로 전통 조선시대에 신분이 억눌린 계층에서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전장에서는 경상도 예천의 어느 마을에서 을사조약 이후 상민들의 신분이 해방되어간 예를 들었습니다만, 비슷한 이야기는《재인식》2권의 말미에 실린 편집자들의 대담 가운데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일제가 망하자 양반 마을에서는 환성이 울려 퍼졌지만 상민 마을에서는 조용했다는 겁니다. 서북인들, 곧 평안도 출신의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가 망하자 평안도 사람들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는 평안도 사람들을 차별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과거시험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집단적으로 차별받은 주민이라면 왕조의 멸망을 기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협력자를 대표한 세력은 주로 아전(衙前)이라는 구래의 중인 신분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대를 이어 군현의 행정 실무를 담당한 계층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셈을 할 줄 아는 전문적인 지식인이었지만 그들의 사회적 진출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반관료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1876년 개항 이후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자 그들은 다른 어느 계층보다 재빨리 그에 적응합니다. 원래 실무와 정보에 밝았던 그들이었지요. 그들은 상인으로 또 지주로 변신하여 경제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 이후 식민지기의 농촌사회는 이들 중인출신의 신흥지주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반면에 구래의 양반신분으로서 시대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사람은 적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민족이 지배하는 식민지기는 하늘의 도가 무너진 난세와 같았습니다. 이에 정통 양반신분의 사람들은 대개 은둔의 생활 자세를 보이거나 소극적으로 시세에 적응할 뿐이었습니다.

신흥지주들은 대체로 그들의 사회적 성공을 가져다 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총독부의 관료로 진출하거나 각급 협의회의 위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예컨대 1925년 전국에 군수를 지낸 250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중인 출신이었습니다. 신흥지주들은 대체로 그들의 자식을 일본으로 유학시켰습니다. 일본으로 간 그들의 자식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심인 일본의 신문명에 압도되면서 일제의 협력자로 키워집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역사의 진행은 언제나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지요. 유학생들이 배우게 되는 새로운 문명의 기초 가치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정신이지요. 그것은 곧 부당한 차별에 대한 저항이지요. 유학생들은 그렇게 민족의식을 자각하면서 민족의 장래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민족적인 지식인으로 바뀝니다. 그들의 정신세계에서 협력과 저항의 경계는 분명치 않았습니다. 한국의 근대 문화와 학문은 대부분 이 같은 정신세계의 일본 유학생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역사학의 최남선, 문학의 이광수, 한글학의 최현배, 경제학의 백남운 등, 예를 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지경입니다.

[6]-3 협력과 저항의 역설

[6] 협력자들  [6]-3 협력과 저항의 역설
우리의《재인식》에는 이 같은 협력의 실태와 정신세계에 관한 좋은 논문들이 몇 편 실려 있습니다. 우선 이혜령 교수의 <한글운동과 근대미디어>라는 논문을 소개하겠습니다. 한글운동이라 하면 사람들은 식민지기의 대표적인 민족운동의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문을 읽으면 반드시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 없는 복잡한 식민지기의 현실을 접하게 됩니다. 한글학자들이 한글의 맞춤법을 통일하고 그것을 보급하는 데는 총독부와의 협력이 절실하였습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한글학자들이 서로 다른 방식의 맞춤법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최현배와 같이 한글파에 속한 학자들은 ‘ㅆ’이나 ‘ㄶ’과 같은 쌍받침이나 겹받침의 사용을 주장한 반면, 정음파의 학자들은 그러한 복잡한 받침의 사용에 반대하면서 소리 나는 대로 적을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양파의 팽팽한 대립은 1930년 2월에 한글파의 주장대로 한글 맞춤법이 통일됨으로써 끝이 납니다. 총독부가 한글파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지요. 정음파의 저항은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성경이 원래 정음파의 맞춤법으로 쓰였으니까요. 그렇지만, 통일 맞춤법의 보급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소는 학교였습니다. 그 학교가 총독부의 통제 하에 있고 총독부가 한글파의 손을 들어 준 이상 한글파의 승리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습니다. 결국, 기독교계도 1937년이면 한글파의 맞춤법 통일안을 수용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맞춤법의 통일과 한글의 보급이라는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지배정책과 긴밀한 협력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저항과 협력의 경계는 불분명하였고 구체적 현실에서 양자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저항이 협력이기도 하고 협력이 저항이 되기도 하는 역설적인 관계는 조선처럼 제국주의의 완전 식민지였던 곳에서는 거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 식민지에서 제국주의의 지배는 정신과 물질에 걸쳐 또는 시간과 공간에 걸쳐 포괄적이며 총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이성시 교수의 <조선왕조의 상징공간과 박물관>(《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휴머니스트, 2004)이라는 논문을 읽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왕조의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세 왕궁을 박물관, 미술관, 동·식물원으로 민간에 개방합니다. 그 박물관에 진열된 역사적 유물의 상당 부분은 일본의 일류 고고학자들이 직접 발굴한 것입니다. 아니면 넘어지거나 반쯤 묻혀 있거나 깨진 것들을 모아서 정리하고 보존한 것들이지요. 그 유물을 통해 일제는 너희 조선도 우리 일본처럼 얼마나 훌륭한 문화였던가 하고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것을 보는 조선인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깨어지고 흩어진 자신의 역사를 정리해 준 일에 감사하면서도 다른 한편 일본이 자신의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음을 보고 부끄러워했지요. 실제로 최남선 선생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일제의 고적조사사업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일본인의 손을 통해 처음으로 조선인 생명의 흔적이 천명된 것은 얼마나 큰 민족적 수치인지”라고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경주의 석굴암이 일본인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고 그때 일본인들이 석굴암이야말로 동양예술의 진수라고 흥분해 마지않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오히려 부끄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6]-4 친일 내셔널리스트

[6] 협력자들  [6]-4 친일 내셔널리스트
다시《재인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조관자 교수의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는 친일파의 대표 주자로 알려진 이광수의 정신세계를 분석한 것입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의 이광수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 문학을 개척한 선구자이자 당대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협력자로 돌아선 것은 적어도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흔히들 친일파라 하면 그렇게 알고 있지만, 조관자의 논문은 그러한 통설적 이해를 정중히 거부합니다. 오히려 이광수는 진지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름 아니라 일본을 조선이 본받아야 할 선진 문명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선의 불결, 무질서, 비겁, 무기력 등에 절망합니다. 그러한 야만의 조선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일본인처럼 깨끗하고 질서 있고 용감하며 협동하는 문명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야말로 조선 민족이 재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는 정직하였습니다. 조관자 교수는 그러한 정신세계의 이광수를 ‘친일 내셔널리스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친일을 하는 민족주의자! 이 얼마나 모순된 표현입니까. 그러나 저는 그러한 모순된 표현에서 이광수만이 아니라 식민지기를 살았던 대다수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서 협력과 저항은 신구 두 문명이 격렬히 충돌하는 고통이었으며, 그 속에서 문명인으로 소생하기 위한 실존적 선택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식민지기의 그러한 정신세계는 최경희 교수의 논문 <친일문학의 또 다른 층위ㅡ젠더와《야국초》>에서 더없이 섬뜩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저는 경제사 전공자로서 문학사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습니다만, 이 논문을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최정희라는 여류 작가의 《야국초》라는 소설은 1942년 어느 조선인 어머니가 열 살 날 아들을 데리고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를 방문하여 아들에게 훈련소를 견학시키면서 아들이 나이가 차면 일본군으로 보낼 것을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최경희 교수는 종전까지 소홀하였던 여성의 시각에서 소설을 다시 읽자고 제안합니다. 그 어머니는 간호부라는 직업을 가진 신여성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어느 조선인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만, 아기를 임신하자 남자는 배신하고 맙니다. 어머니는 낙태의 유혹을 이기고 아들을 사생아로 낳지요. 어머니가 그 아들을 일본군에 보내려고 하는 것은 그 아들을 비열하고 무책임한 조선의 사생아가 아니라 정직하고 책임 있는 제국의 아들로 바치고자 하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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