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4-5] 일본 정신과 야스쿠니 신사 p425

일본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부럽게 여겨지는 것이 일본의 종교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강한 민족 정체성이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미개한 사회일수록 종교가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는데, 인류가 점차 미망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서유럽과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는 교회라는 것이 결혼식과 장례식 때에만 찾는 장소가 되어 평상시에는 술집이나 여관으로 영업하면서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이나 동유럽 등지에서는 아직 종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한 편인데 이는 이 지역 주민들이 백인 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미개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도와 이슬람 세계처럼 아직도 고대 종교가 현실세계에서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사회들은 종교로 인해 사회가 발전되지 않고 그 결과로 대중들이 종교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사실을 보면 대체로 종교라는 것은 사회발전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하는 듯하며 종교의 영향력이 강할수록 미개한 사회로 남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명제에서 예외적인 민족으로 생각되는 것이 유태인과 일본인데 이들 민족에게 있어서 종교는 구성원 집단에게 일체감을 주고 공동체의식을 유지해주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유태인들의 경우 종교는 자체로 민족의 역사이며 그들이 유일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인해 나라를 잃고 오랜 세월 방랑하는 동안에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스스로 생존, 발전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일본의 주된 종교는 신토인데, 이것은 우리나라로 치면 성황당과 사당에 절이 합쳐진 듯한 것으로 조상숭배와 애니미즘, 샤머니즘, 불교 등이 혼합되어 일본 고유의 종교로 정착하였다. 신토의 뿌리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이다. 그래서 신사에 따라서는 어떤 신물을 가미(神)로 모시는 곳도 있지만, 대체로 훌륭한 일을 한 조상, 즉 뛰어난 무사나 학자, 장인의 혼령을 가미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국가주의가 득세하면서 모든 신사를 국가가 주관하기 시작하였고 천황을 모든 가미의 정점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즉 이 시대 이후 일본인들은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기 시작했으나, 패전 이후 히로히토 천황의 인간선언(1946년 1월)과 평화헌법의 제정으로 인해 국가신토는 힘을 잃고 다시 원래의 신토로 복귀하였다. 신토에서 섬기는 가미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유일신이 아니고, 고대 그리이스에서 숭배했던 인간을 닮은 신도 아니다. 인간에 깃들어 있다가 육체를 떠난 혼령, 또는 애초에 영혼을 갖지 않은 존재에 내재해 있는 정령 같은 것이 가미의 개념이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일본의 신토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종교라고 생각된다. 신토에는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오면서 다양한 외래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고 뒤섞이면서도 지금까지 그 뿌리를 지키고 있는 신비함이 있다. 신토에도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이 있고 사람들은 그 신이 있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와서 경건한 마음으로 경배함으로써 다시 혼탁한 사회에 나가 생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게 된다.

그러나 신토에서 경배하는 신은 다른 미개 종교와 달리 자연물이나 유일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조상, 그것도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는 훌륭한 조상인 것이다. 이것이 신토의 가장 큰 장점이다. 누군가 유교와 불교, 범신론, 샤머니즘 등에서 좋은 점만을 골라 이상적인 종교를 만든 것도 아닌데 신토에는 이 같은 장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를 한국의 유교와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제사는 죽은 모든 조상을 대상으로 한다. 살아있을 때 제아무리 못된 사람이었더라도 상관없이 죽기만 하면 누구나 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이 같은 유교의 제사는 낭비를 조장하고 쓸데없이 후손들을 번거롭게 만드는 미개한 관습이다. 자기의 직계 조상이라는 이유만으로 경배하기보다는 사회에 위대한 공헌을 한 인물만을 대상으로 사당 같은 것을 만들어 공경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신토는 이 같은 점에서 독보적이다.

대체로 인류가 만들어낸 종교라는 것은 도그마, 이데올로기, 아집과 편견, 터부 같은 부정적인 관념의 집합체로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극단적인 이기심의 발로이다. 따라서 사람이 교육을 받아 자연을 이해하고 이성이 냉철해질수록 종교는 설 땅을 잃게 되는 법인데, 일본의 신토는 그와 같은 종교의 일반적인 특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대의를 위해 소아를 희생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한 위인들을 신으로 섬긴다는 것, 이것은 이상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회나 이 같은 시스템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국가가 국립묘지를 만들고 국가유공자 제도를 만들어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희생한 사람의 후손을 보살피는 등 정치적인 대안을 마련해놓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미국처럼 국가주의와 프라이드가 강한 나라에서는 국립묘지 자체가 하나의 신성한 종교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국립묘지와 교회가 하나로 통합된다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일본의 신토는 국립묘지와 교회가 하나로 통합된 듯한 이상적인 종교인 동시에 사회 보상시스템인 것이다.

굳이 종교에 등급을 부여해보자면, 하급 종교에는 해나 달 혹은 힘센 동물들을 섬기는 원시 종교, 즉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을 포함시킬 수 있겠다. 그 뒤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고 자연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물 대신 인간과 비슷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신을 만들어내게 되었는데 이것을 중급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바다의 신, 태양의 신 따위가 등장하는 고대 그리이스의 종교나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과 기독교, 사람 모양을 한 수천 개의 신이 있는 힌두교, 우리나라의 유교 같은 종교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만물에 신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는 범신론과 인간이 해탈하면 신이 된다는 불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조선의 동학(천도교) 등은 보다 발달된 상급 종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상급 종교들의 장점만을 모아 성립된 것이 일본의 신토인 것이다.

한국 사회는 하급에서 중급, 상급 종교들이 모두다 영향력을 지니고 존재하는 특이한 사회다. 한국인들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치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가 하면 부적도 붙이고, 아직도 시골에는 성황당이 있는 곳도 많다. 풍수지리와 사주팔자도 믿는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와 천주교, 유교 등의 위세도 대단하며 천도교나 불교 같은 상급 종교들도 번창하는 곳이 한국 사회다. 반면 신토는 상급 종교들의 정수만을 모아 탄생한 것이기에 일본 사회에는 이 같은 중하급 종교들이 전혀 침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전역에 퍼져 있는 8만개의 신사 가운데 현대 일본 정신의 정수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이다. 여기에는 일본 현대사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존왕혁명파,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에서 희생당한 전사자, 그리고 대동아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 등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조상 246만 명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다른 나라로 치면 국립묘지인데 이상하게도 패전 후 일본에서는 수상이나 정부각료가 이곳을 참배하는 것이 금기로 되어 있다. 참배할 때마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시비를 걸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 수상이 공식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나카소네 수상이 유일무이한 사례였으며, 2001년 8월에 고이즈미 수상이 두 번째로 공식 참배를 했다.

수상이 국립묘지를 참배하겠다는데 시비를 거는 주변국들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이는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될 수 있는 일이다. 전범들의 위패가 합사되어 있어서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인데, 그게 다른 나라가 보기에 전범이지 일본 입장에서는 모두 애국자들이니 도대체 말이 안 되는 논리인 것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대통령이 국립묘지 참배하는 행위를 놓고 베트남 정부에서 항의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월남전에 참전해서 자기나라 국민을 학살한 전범들이 국립묘지에 묻혀있으므로 이해할만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래도 국가의 명령을 받고 타국 땅에 가서 희생한 군인들이고 월남전으로 인해 경제발전에 많은 도움을 받았으므로 이들을 애국자로 대우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하고 전쟁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우리는 당시 일본이었고 조선인들도 누구나 일본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굳이 따져 말하면 전범국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막상 일본과 전쟁을 한 당사자인 미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관련도 없는 한국과 중국 등이 시비를 거는 것은 명분도 없을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조선출신 일본군 2만 명과 중국 및 대만출신 일본군 2만 명의 위패가 있다고 한다. 일본과 조선의 인구비가 5대3인데 전사자의 숫자는 1%에도 못 미치는 것을 보면 당시 일본이 얼마나 양심적으로 전쟁을 치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2만 명의 조선출신 일본군 전사자들에 대해서 한국 정부는 위패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 또한 잘못된 일이다. 전사시점에서 일본인이었고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이므로 그 영혼을 기리는 것은 당연히 일본의 권리다. 일본 정부는 신토의 교의상 일단 가미(신)가 되면 인간이 넣고 뺄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국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고 있는데, 참으로 애틋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만약에 일본이 이들 조선출신 전사자의 위패를 한국으로 보내준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인가?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일본을 위해 싸운 전쟁 범죄자라고 욕하며 부관참시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위패를 돌려달라는 유족들은 자기 조상이 일본에서 신으로 경배 받고 있는 것이 뭐 그리 불쾌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4-6] 가미카제의 후예들 p432

가미카제만큼 일본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용어도 드물 것이다. 가미카제는 神風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으로, 신의 바람이라는 뜻이다. 과거 13세기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 두 차례나 연합함대를 구성, 상륙을 시도했지만 태풍으로 인해 일본 땅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그것이 일본을 지켜준 바람이었다고 신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려몽 연합함대를 괴롭힌 것은 지금의 태풍인데, 고려도경이라는 책에 기록된 함대의 출발 장소가 지금의 홍콩 근처인 것으로 보아 당시 일본은 필리핀 북부나 대만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가미카제를 일본은 태평양전쟁 말기 공군 자살특공대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름이 갖고 있는 신비함 때문인지 수많은 일본 청년들이 이 특공대에 자원, 미국의 군함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당시 사망한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1030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조선인은 11명이었다고 한다. 비록 1%에 불과했지만 이는 태평양전쟁이 일본만의 전쟁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이 함께 싸운 전쟁이었음을 상기시켜준다.

4시경 나는 만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산 위에 있었다. 거대한 함대가 저무는 해를 배경으로 섬뜩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돌연 짙은 검은 구름이 선단을 덮기 시작했고, 멀리서 울리는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구름은 대공포화 연기였다. 곧이어 반점 같은 것 몇 개가 하늘의 이 구석 저 구석으로부터 연기구름 속으로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우리의 자폭기들이었다.

"가미카제 공격이다." 난 지나가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병사들이 달려왔다. 까만 반점이 연기 속에서 날아들었고, 뒤이어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공격은 10분간 계속되었다. 차츰 연기는 걷혔고, 나는 멀리 몇 척의 선박이 불길에 휩싸인 것을 어슴프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공격이 꼭 필요한 것일까? 나는 자문하였다. 저 큰 함대 속에서 배 몇 척을 격침시키는 것이 젊은이들의 목숨을 희생시킬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일까? 자원을 했건 안 했건, 그들과 그들의 부모는 다 같이 이 무모한 전쟁의 희생자인 것이다.

"저것이야말로 고급장성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저주스럽고, 가장 치졸한 짓이야!" 한 병사가 분개해서 말했다. (일본군 하사관 오가와 데쓰로. 필리핀 루손섬에서)

가미카제 특공대는 위의 병사가 있었던 필리핀 방어전에서 처음 선을 보인 뒤, 1945년 초 오키나와 방어전에서 대부분의 특공대가 투입되었다. 당시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은 호주군과 함께 과달카날 상륙작전을 거쳐 뉴기니를 탈환하고 필리핀, 대만, 오키나와 등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오키나와가 점령되면 여기에서 출격한 미국의 폭격기들은 곧바로 일본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들어오기 때문에 일본은 오키나와 방어에 총력전을 전개했다.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잔혹했던 전투로 기록된 오키나와 점령전은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중순까지 약 3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 해병 2만 명이 전사했고 오키나와 섬의 건물 90%가 파괴되었으며 오키나와 주민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으니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은 전투였다.

당초 가미카제 특공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미국의 항공모함을 잡는 것이었다. 비록 항모를 격침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는 30척 이상의 미국 전함을 침몰시키고 300척이 넘는 전함을 파괴하는 엄청나나 성과를 거뒀다. 인류의 전쟁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자살공격은 당시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던 서양인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로 인해 가미카제는 영어에서 무모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칭하는 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예를 들어 '아유 워너 비 어 가미카제?'라고 하면 무모한 일을 하다 죽고 싶냐는 뜻의 문장이 되는 것이다. 돈키호테와 비슷하지만, 약간 더 강한 의미를 지닌 용어라고 하겠다.

루손 섬에 있던 위의 일본 병사가 말한 것처럼, 100% 죽음이 확실한 자살공격으로 조종사들을 몰아넣는 것은, 전쟁의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젊은이들의 생명을 수단으로 삼는 치졸한 짓이다. 하지만 전쟁 자체가 어차피 생명을 단순한 숫자로 계산할 수밖에 없는 비인간적인 행동이며, 적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다면 부하들을 서슴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결단력이 전쟁지휘관의 미덕인 것이니 가마카제에 대해 휴머니즘의 잣대를 갖다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비록 서양인들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였겠지만 이 가미카제의 정신은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일본 특유의 미덕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2001년 5월 일본에서는 이 가미카제 특공대의 이야기를 담은 '호타루'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많은 관객을 끌기도 했다. 이 영화는 당시 일본공군의 소위로서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전사한 조선인 김선재와 살아남은 특공대의 삶을 묘사한 것이다.

이 영화에는 김선재가 출격 전날 식당에서 고향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고 이를 듣고 있던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최근 한국에서도 개봉되었으나 한국 사회의 우경화 분위기 탓에 많은 관객을 모으지는 못했다.

스스로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산화한 김선재 소위처럼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 가운데에는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하면서 자발적으로 일본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비록 다른 나라로 갈라졌지만 이 같은 사실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친선을 위해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들을 비난하며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일본 수상으로서 일본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이즈미는 스스로 가미카제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의 고향은 일본의 최남단 가고시마인데, 이곳은 과거 가미카제 특공대의 비행장이 있던 곳이다. 그는 자주 이곳에 들러 특공대원들의 글을 읽고 그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고이즈미는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을 생각하며 힘을 얻는다고 했다.

이처럼 가미카제의 후예인 고이즈미가 일본을 이끌어 가는 수상이 된 후 그들이 안치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웃으로서, 과거 대동아 전쟁에 참여해 함께 싸웠던 우리가 이 같은 일본의 행사에 박수를 쳐 줄 수도 있는 것이니 오늘날 이를 항의하고 비난한다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다.

고이즈미는 과거 무능했던 일본 총리들과는 달리 가미카제의 후예답게 용기 있고 과단성 있는 정치인으로서, 일본 유권자들에게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 열린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고이즈미가 이끄는 자민당에 절대다수 의석을 몰아줌으로써 고이즈미 개혁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키고 있는 토니 블레어, 미국의 10년 호황을 이끈 빌 클린턴에 이어 일본도 드디어 제대로 된 지도자를 찾은 것일까. 아직도 늙은이들의 손에 휘둘리며 구태의연한 낡은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를 볼 때 일본의 이 같은 변화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7] 바보들의 행진 p437

한국, 중국, 대만 학자들에게는 일본의 교과서를 검증할 만한 힘이 없다. 이들의 역사에 대한 학력은 매우 낮다 (대만출신 평론가 고분유)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니시오 회장)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 대해 불만을 얘기해도 전혀 이익이 안 된다. 두 나라에는 민주주의와 언론자유가 없고 감정만이 있기 때문에 논의가 안 된다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

이번에 우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것은 큰 돌파구를 연 것이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데 있어서 국민운동이 승리한 것이다 (다쿠베 다다오. 이사)

이는 2001년 봄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나온 말들이다. 이를 두고 한국의 언론에서는 "일본 우익들의 자축파티에서 한국과 중국을 비하하는 망언들이 쏟아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발언에는 생각해볼만한 점이 많고,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이번 교과서 파동의 본질을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의 언론은 조국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일본인들에게 극우파니 보수 우익이니 하는 용어를 갖다 붙이면서 마치 이들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거나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나 되는 것처럼 매도하곤 하는데, 이것이 과연 공정한 자세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위의 발언을 한 사람들은 모두 일본에서 매우 존경받는 수준 높은 지식인들이다.

실제로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스스로 국제수준에 걸맞는 사고의 능력이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의 근대 역사에 관한한 이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며 혹 진실을 인식하고 있는 경우에도 민족주의 세력의 폭력에 희생당할까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언론들은 일본에서 자기네 입맛에 맞지 않는 발언이 나오면 항상 망언이라고 매도하는 버릇이 있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시도하지도 않고 쉽게 망언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쨌건 한국이 한참 후진국인 중국과 같은 수준에서 비난을 받고 또 그러한 비난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은 학문과 교육 언론 등이 오랜 역사를 거쳐 제자리를 잡고 균형을 갖춘 선진국이다. 이 같은 사회에서는 수준 높은 국민들이 누구나 양심에 따라 신중히 판단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기 때문에, 이미 한국이나 중국에서 비판할 수 있는 정도의 심각한 역사의 왜곡이나 오류가 존재하기 힘들다. 그 결과 역사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서 일본인들은 준비가 잘 되어 있는 반면 한국인들은 사사건건 이기적으로 트집을 잡는다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논쟁에서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언론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일어난 2001년 8월13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문제에 관해서도 한국과 중국의 항의에 관해서만 보도할 뿐, 미국이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일본 측 입장에 공감하는 국제 사회의 지지 분위기는 보도하지 않고 있다. 일본인들의 의견에 대해서도 한국인의 입맛에 부합되는 사람들의 말만 되풀이되어 방송될 뿐 일본 주류의 움직임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당연히 한국인들은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으며 우리는 제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한중일 3국 사이에는 1982년에도 지금과 비슷한 교과서 파동이 있었다. 그때에는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펴낸 <신편일본사>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한국과 중국 정부가 시정을 요구하자 1982년 7월 23일 마쓰노 국토청장관, 7월 24일 오가와 문부상 등 일본 정부의 각료들이 나서 "교과서 검정은 내정문제이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의 시정요구는 내정간섭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가당치 않다" 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이후 교과서 파동은 장기화되어 1986년에는 문부상 후지오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놈(야쓰)들인 한국과 중공은 세계사 속에서 그 같은 일을 한번도 안 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이라고 직언을 했다. 후지오는 이어 그 해 9월 6일 <문예춘추>지와의 인터뷰에서 "한일합병은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양국의 합의 위에 성립됐다. 한국 측에도 얼마간의 책임은 있다" 고 발언했다.

지금 보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 발언에 대해 한국 정부에서 발끈하여 규탄운동이 일어났고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다. 일본에서 이 같은 직언을 비판하는 까닭은, 패전국 일본에 만연하고 있는 자학사관 때문이다. 일본은 패전국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미국의 식민지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역사를 비하하는 데에만 능통할 뿐 아직 스스로의 역사를 제대로 보고 자부심을 갖는 단계에는 도달해 있지 못하다. 결국 야당은 후지오의 사임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대해 후지오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파면을 자청, 9월 8일 나카소네 수상은 후지오를 파면시켰던 것이다.

이 문제는 이후 후지오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민당의 젊은 의원들에 의해 <국가기본문제 동지회>가 결성되고, 그 대표인 가메이 의원 등이 1986년 10월 23일 주일한국대사관을 방문, 이규호 대사에게 "현재처럼 중공과 한국이 교과서문제,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 등에 간섭하면 스트레스가 쌓여 10년, 20년 후 한일 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후지오까지는 이해한다 해도 마지막인 가메이의 전쟁협박성 발언은 다소 지나쳤던 것 같다. 이 발언은 나중에 가메이가 그런 말을 한적 없다고 부인함으로써 유야무야 되었지만 이 사건은 일본의 뜻있는 인사들이 주변국의 내정간섭에 대해서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은 말 그대로 떠오르는 태양의 제국으로서, 머지않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되던 잘 나가는 나라였으며, 한국과 중국은 아직 답답한 군사독재를 벗어나지 못한 사회였다.

그 뒤 15년이 흘러 이제 일본은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한 장기불황에 시름하고 있고 중국은 서서히 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하면서 장래 미국과의 패권 다툼을 준비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국도 어두운 군사독재의 시대를 벗어나 어느 정도 개명된 민주사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다. 이처럼 시대상황이 달라졌는데도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한중일의 다툼은 20년 전과 비교해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이 똑같은 순서를 되풀이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언제까지 일본에 대해 트집잡기를 계속할 것인가. 최소한 한국만이라도 어서 빨리 이 바보들의 행진에서 발을 뺄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4-8] 일본인의 속마음 p441

[ 1. 1963년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인 시이나 발언 ]
숙부인 고토 신페이(대만 경영 초기 총독부의 민정장관으로 발전전략을 수립한 경제 이론가)에 대해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파이오니어라는 평가도 있다. 세계의 조류가 그러했고, 서구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 아시아-아프리카를 통틀어 서구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일본 이외에는 없었다. 청일전쟁은 결코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며, 러일전쟁은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통쾌한 반격이었다. 일개 역사학도로서,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러일전쟁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역시 일본의 지향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과의 운명공동체이며, 그 해방, 독립, 그리고 공존공영이라는 것이어야만 한다. 일본이 메이지 이래 이처럼 강대한 서구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고 만주에 5족 공화의 꿈을 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이며 고토 신페이는 아시아 해방의 파이어니어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동화와 정치", 동양정치경제연구소, 1963, 58~59쪽)

그로부터 2년 뒤에 일본국 외무장관이 된 시이나는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을 위해 서울을 방문하고, 도착성명에서 "양국간의 오랜 역사에서 불행한 기간이 있었음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 깊이 반성한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에서 '반성'이란 표현이 있는데, 일본어의 뉘앙스에서 보면 반성은 한국어의 그것과는 달리 일종의 '다시 깊이 생각해 본다'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후회한다는 뉘앙스도 약간 섞여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사죄한다거나 일본이 잘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외무장관으로서 역사적인 국교정상화를 앞두고 연일 반대 시위와 폭동으로 들끓고 있는 한국의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생각된다.

시이나가 말한 것처럼, 19세기말 서구 제국주의가 서로 경쟁하듯 세계 각지를 침략해 주민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해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던 시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통틀어 일본만이 신속하게 산업혁명을 일으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한 유일한 나라였다. 따라서 일본의 전쟁은 크게 보아 일종의 정당방위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특히 청일전쟁을 통해 노쇠한 청나라를 제압하여 조선과 대만을 독립시키고 러일전쟁을 통하여 또다시 조선과 만주를 독립시킨 것은 충분히 자랑할 만한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일본인들도 그 같은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당시 일본이 어느 정도 서구에 대항하여 아시아민중을 해방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 2. 1965년 다카쓰기 발언]
일본의 조선통치 36년 간은 착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의로 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일본은 조선에 대해 36년 간의 통치에 대해 사과하라’는 말도 있지만, 사과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교섭은 쌍방의 존엄을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감정으로서도 사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마 20년쯤 더 일본과 붙어 있었다면 그렇게는 안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패전으로 좌절되었지만, 20년쯤 더 조선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대만의 경우는 성공한 예에 속한다. 일본은 조선에 공장이나 가옥, 산림 등을 다 두고 왔다.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사람을 동화해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지, 착취나 압박 같은 것은 아니다. 과거를 말하면 상대편도 할 말은 있겠지만, 우리 쪽에는 할 말이 더 많다. 그러므로 과거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일본은 친척이 된 기분으로 말을 끝맺는 것이 좋다. (아카하타, 1965년 1월 21일자)

이 발언 역시 한일 국교정상화를 앞두고 있던 민감한 시점에 터져 나와 많은 화제를 낳았다. 당시 남한에서는 일본을 원수로 여기면서 절대로 다시 국교를 맺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여론을 이끌고 있었으며,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일본에게 엄청난 식민통치 배상금을 요구하는 무리한 숫자가 튀어나오고 있던 시기였다. 사실, 일본이 무리한 전쟁으로 미국에 점령당하는 사태가 없었다면 한반도와 대만은 아직도 일본과 같은 국가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다면 일본, 한국, 대만 모두를 위해서 굉장히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폭격으로 일본 열도가 잿더미로 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구 2억의 일본제국은 날로 부강해져 미국에 맞먹는 국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만주국까지 합친다면 인구 3억에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말 그대로 대동아연방체로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 3. 1986년 일본국 문부상 후지오 마사유키 발언]
가령 침략이 있었다고 해도 침략을 받은 측에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일청 전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조선반도는 도대체 어떠한 정세에 있었는가. 다름 아닌 청국의 속령입니다. 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이라는 것은 웬일인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국이 일본에 패해, 그 대신 일본이 진출하려고 했는데 삼국간섭이 있었지요. 일본은 굴복을 강요당했고, 그 뒤에 어슬렁어슬렁 나온 것이 러시아입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었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미운 놈의) 배때기가 나타난 것이니까, 어떻게 하든 이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그 뿌리를 자르려고 했기에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지금 한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한창 거론되고 있는 한일의 합방에서도, 적어도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겁니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간의 담판과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양국의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종이 진정한 대표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고, 합의를 인정토록 하기 위한 일본측의 압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토 히로부미의 교섭 상대가 조선의 대표자 고종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므로 한국 측에도 얼마간 책임이나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만일 합방이 없었더라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혹은 나중의 소비에트가 조선반도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보증이 있는지 어떤지. 그러한 것까지 모두 생각한 다음에 일본이 조선반도로 나갔던 것은 침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이 나쁘다는 식의 논의라면 그런 대로 짐작은 갑니다만... ('방언대신 크게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0월호)

1986년 9월 6일자 일본의 각 언론은 후지오 문부장관이 4일 후 발매가 시작되는 <문예춘추> 10월호의 기사를 인용해 그의 발언을 일제히 보도했다. 이 발언에 대해서는 일본의 각 신문에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이 많이 실려 토론에 올려졌다. 같은 날인 9월 6일 재일 한국공사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라면서 사실상 항의 의사를 표명하고, 8일에는 한국 외무장관이 "매우 유감"이라고 정식으로 항의했다.

한편 일본의 각 신문도 7일자 사설에서, '후지오 발언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다'(아사히신문), '각료로서의 자질이 문제시되는 후지오 발언'(요미우리신문), '외교센스가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친다.'(니혼게이자이신문) 라고 비판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후지오의 자진 사퇴를 기대하는 눈치가 많았지만, 후지오는 사퇴를 거부하다가 8일 나카소네 수상에 의해 파면되었다. 각료의 파면은 33년만에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0월 3일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의 가와마다 의원은 "조약법에 관한 빈 조약에는 협박이나 강제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고 되어 있는데, 한일병합조약은 본래부터 무효였던 것이 아닌가. 수상은 그 점을 인식해서 후지오씨를 파면했는가?" 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나카소네 수상은 "국교회복 당시, 한국과 일본이 협의하여 병합조약은 이미 무효라는 사실이 양쪽이 확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본은 당시 상당히 위압적인 배경을 가지고 체결했다고 해석하고 있고, 후지오 발언은 온당함을 상실하여 그러한 조치를 취했다."라고 답변하였다 .(아사히신문 10월 4일자)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별달리 문제시될 것도 없는 상식선의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현직각료를, 그것도 언론에 보도된 다음날 즉각 파면 조치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조치에 대해서는 당시 자민당의 소장그룹인 국가기본문제동지회 (좌장 가메이 의원)가 한국의 내정간섭에 굴복했다면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등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다시 철회되지 않았다. 후지오 발언 가운데 합병에 한국 측의 책임이 있다는 부분은 옳은 지적이며, 그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합병은 일진회 등 한국측 혁명세력에 의해 스스로 강력히 추진되었지만 일본측에서는 거부하던 중, 조선인 테러리스트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후지오는 나카소네에 의해 파면당한 직후에도 거듭 같은 내용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문예춘추 다음 호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물론 당시 일본정부가 취한 행동이 세계열강과 마찬가지로 공리적인 것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만이 비난당하는 것은, 이 또한 공정을 결한 것이 아닐까.

거듭 말하면, 19세기의 조선 대한제국에는 독립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어, 외교적인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대한제국 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현명한 한국인들도 가슴깊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를 갖고 있었을 리도 없는 것 아닙니까.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세계 식민지 가운데 식자율이 가장 높다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를 들면 관동대지진 때 여러 가지 소문을 흘려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 (중략) 그런데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죄를 전부 메이지의 선각자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만든 메이지의 대훈들이 한 일이 모두 피로 얼룩진 침략이자 악역무도한 제국주의였다고 하면서, 나카소네를 비롯하여 쇼와의 정치가들이 입을 닦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용서될까 하는 것입니다. (‘방언대신 다시 외친다’ <문예춘추> 1986년 11월호)

10월호에 실린 글로 인해 다음날 바로 문부장관 직에서 파면 당한 후지오 마사유키는 물러서지 않고 이처럼 자신의 신념을 다시 <문예춘추>를 통해 계속 털어놓았다. 또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통해 한일합병에는 한국 측에도 책임이 있다, 나쁜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일본은 한국에 산업을 일으키는 등 선의로 통치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그런데, 후지오의 발언 가운데 일제가 한국을 선의로 통치했다는 것은 사실과 부합되는 내용이었지만, 왜 그가 한일합병이 ‘나쁜 일’ 이었다는 전제로 양비론을 전개했는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선 사람들 대부분에게 합병과 총독부 통치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며 대체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비록 간헐적으로 국내에서 저항운동이 발생하기도 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이들이 조선 사회의 주류라고 볼 수는 없으며, 대체로 당시 조선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규정하고 만족스런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합병이 일본의 입장에서 그리 큰 손해를 입는 일이 아니었다면, 한일합병은 양국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요즘 표현을 빌자면 윈윈 합병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주장이 일본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공격일변도였기 때문에 일본측에서 다소 과감하게 발언하는 인사들조차 차마 입에 담지 못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 4. 1995년 일본국 전 외무장관 와타나베 발언 ]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이 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의 공문서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한일병합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중략)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 같은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전후처리를 전부 다시 한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거기까지는 각오가 없는데 다시 꺼내면 곤란하다. (마이니치신문 1995년 6월 4일자) 한일합방조약을 서로 인정했기 때문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는 대신, 부흥을 위해 협력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합방은 국제적으로도 합법적이라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식민지배'라고 하지만, 법률적으로 일본 국회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1995년 6월6일자)

이것은 와타나베 미치오 전 외무장관이 6월 3일에 열린 자민당 토치기현 연합회의 대회인사와 그 후의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이다. 이후 언제나처럼 한국 측에서는 항의를 했고 와타나베는 일부 표현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0월 5일에 열린 참의원 본회의에서 공산당의 요시오카 의원은 총리에게 "일본정부는 1965년의 한일조약 문제를 다룬 국회이래, 조선병합조약을 한일이 자유의사,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라는 입장과 인식을 거듭 표명해 왔습니다. 무라야마 수상이 식민지 지배의 반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민당 정부 하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어 온 이 입장과 인식을 단호히 전환해, 조선병합은 조선인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식민지 지배 하에 둔 것을 인정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했으며 이에 대해 무라야마 수상은 "한국병합조약은 당시 국제관계 등의 역사적 사정 속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고 실시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라고 답변함으로써 와타나베의 발언이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 5. 1995년 일본국 총무청장관 에토 다카미 발언 ]
다만 한일병합이라는 것은 만일 제일로 책임을 묻는다면, 그 당시에 도장을 찍은 대한제국의 수상 이완용에게 있다고 하겠습니다. 싫으면 거절했으면 그만입니다. 일본도 강제로 도장을 찍도록 한 것은 나빴습니다. 또한 군대를 전국에 배치해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한 뒤 1주일 후에 조약의 비준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을 통치하면서 일본은 좋은 일도 많이 했습니다. 먼저 고등농림학교를 세웠습니다. 서울에는 제국대학도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육수준을 높인 것입니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로, 철도, 항만을 정비했고, 산에 나무도 심었습니다. 하지만 긍지 높은 민족에 대한 배려를 극히 결한 것도 사실이며 그것이 지금 꼬리를 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가 창씨개명입니다. 나는 그 당시 조선인 이름을 가진 동급생이 몇 명과 같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인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시켰다고는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 이름으로 육군중장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입장에서 보면 조선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라는 의식은 결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내지, 외지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을 내지(일본)의 수준으로 높이려 한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이씨 왕조의 금은보화를 일본으로 갖고 가서 장식할 생각 같은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루브르 미술관이나 대영박물관은 세계 곳곳에서 날치기한 보물들로 채워져 있지만, 일본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 경제계나 예능계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크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장훈이라는 유명한 야구선수도 있고 롯데그룹의 사장도 조선인입니다. 아카사카, 록본기에 가보면 모두 한국사람들 뿐입니다. 또한 빠찡코점의 7할은 조선반도 출신이 경영하고 있는데, 일본인은 그런 일은 안하고 있습니다. 어쨌건 이처럼 일본의 모든 계층에서 조선인이 활약할 수 있게 된 것은 한일병합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한일병합이 강제적이었다는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은 틀린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주간 문춘 1995년 11월 23일호)

이것은 10월 11일 에토 다카미 총무청장관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원래 오프 더 레코드로 발언한 것인데, 잡지 <선택>과 한국의 <동아일보> 에 보도되어 구설수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에토 장관은 한국으로부터 사임요구를 받았지만, 무라야마 수상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후 야당으로부터 사임결의안이 제출되자, 국회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자민당 영수의 권고로 에토는 10월 13일에 사임했다. 이후 에토는 1996년 1월 4일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앞서의 발언에 대해 "왜 반성해야만 하는가. 일본은 그렇게 창피한 나라는 아니다." 라는 등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사실 에토 발언에서 언급된 일본의 조선통치의 성과들은 그 성격과 본질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당시 조선은 일반적인 식민지라고 할 수는 없었으며, 만약 그런 것이 식민통치라면 전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은 앞을 다투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겠다고 나설 것이다. 1980년대 이래 동아시아의 대만과 한국 등이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일본의 식민지통치가 이들 지역에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밝히는 저작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당시 일진회를 비롯한 조선의 혁명세력들에게 강력한 합병의 요구를 받았지만, 이토 통감은 줄기차게 이를 거절해왔는데 1909년 이토가 암살됨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 한국 병합론이 우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병합 이후에도 일본은 대체로 뒤떨어진 조선반도를 내지인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투자를 했으며 그 결과 일제통치 기간동안 조선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고도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유례없는 '식민통치'를 극찬하는 저작들이 서양의 학자들에 의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볼 때 에토 발언 등으로 상징되는 일본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입장은 한국정부의 입장보다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 6. 1995년 오자와 발언]
비슷한 시기인 1995년 12월에 오자와 신진당 간사장은 "나는 한국에 대해 '철저한 반일교육을 시켜놓고 무슨 장래 우호냐. 끝까지 증오를 잊지 못하게 하면, 남는 것은 미움뿐이다.'라고 항시 말하고 있다. 그러한 것을 제대로 서로 마주보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아사히신문 12월 9일자)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외무부는 "한국 교육이 정치적 의도에 따른 반일교육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라고 언급했다.

이 문제는 역사상 최초로 일본측에서 한일관계의 본질을 지적한 것으로서 일본 정부가 왜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는지 매우 의문이 가는 일이라고 하겠다. 한국의 반일 교육은 과거 반공교육에 버금갈 정도로 철저히 이루어져 한국의 학교 현장이나 또한 일반 사회에서도 한일합병의 정당성이나 일본통치의 성과들을 언급하는 일은 거의 금기가 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는 설령 한국 정부의 반일 교육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인데, 대부분 허무맹랑하고 왜곡된 자료와 사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이다.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대해 한국정부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재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이라면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그보다 훨씬 더 왜곡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자기중심적이고 솔직한 스타일이지만 일본인은 대체로 남의 기분을 먼저 배려하며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것 같으면 자기 입장이 옳다 하더라도 접어두고 사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스타일이 양국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일관계의 모습이다. 그 결과 훨씬 더 잘못한 쪽에서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는 이상한 한일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