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66 일미 관계와 워싱턴회의

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66 일미 관계와 워싱턴회의
[ 일미 관계의 추이 ]
일노전쟁 후, 일본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누구나 인정하는 대국이 되었다. 필리핀을 영유한 미국의 극동정책의 경쟁 상대는 일본이 되었다. 한편 일본과 미국 사이에는 일노전쟁 직후부터 인종차별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미국 서부의 주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근면 하고 우수한 일본인 이민자가 백인 노동자의 일을 뺏는다고 하여 일본인을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미국 정부의 지도자는 일본인 이민자의 처지에 이해를 보였지만, 서부 주들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국제연맹규약에 인종차별철폐를 담은 결의를 제안하였다. 그 목적은 이민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이 유색인종의 이민을 제한하고 있던 나라는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미국은 처음에는 일본에게 동정적이었지만 서부 주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반대에 가세하여 결의는 채택되지 않았다. (*1) 그러나 일본의 제안은 세계로부터 커다란 공감을 얻었다.

(*1) 일본의 제안은 세계의 유색인종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투표 결과, 11 대 5로 찬성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의장을 맡은 미국 대표 윌슨은 중요한 의제는 만장일치를 요한다 하여 부결을 선언하였다.

<미 함대의 일본 방문>
1908(메이지 41)년 3월, 16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대서양함대가 세계일주 도중에 일본을 향해 전진해 왔다. 당시 일본이 보유하는 전함은 7척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대함대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자신이 건설한 함대의 위세를 세계에 과시하고자 했다. 선단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에, 반세기 전의 흑선 내항과 대비해서 백선(白船)이라 불렸다.
일본정부는 거국적으로 함대를 환영하기로 하였다. 루즈벨트는 미국의 인상을 좋게하기 위해, 「품행방정한 수병 이외에는 배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요코하마에 입항하는 날 일본인 군중은 작은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연호하고, 미국 해군 장교들은 파티 공세를 만났다. 그들을 태운 열차가 역에 도착하자 천 명의 초등학생이 미국 국가「성조기(星條旗)」를 불렀다.

[ 워싱턴회의와 국제 협조 ]
1921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해군 군축과 중국 문제를 주요 의제로 하는 워싱턴 회의가 미국의 제창으로 열려 일본을 포함한 9개국이 모였다. 회의의 목적은 동아시아에 대한 각국의 이해를 조정하고, 이 지역에 안정된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미·영·일의 해군 주력함의 보유율은 5:5:3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중국의 영토 보전, 문호 개방이 9개국 조약으로 성문화되었다. 동시에 20년 동안 계속된 일영동맹이 미국의 강한 의향으로 해소되었다.
주력함의 상호 삭감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군축 흐름을 따르는 것으로, 본격적인 군비 확장 경쟁에서는 경제적으로 대적할 수 없는 일본으로서는 오히려 유리한 결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군 중에는 이에 불만을 갖는 의견도 생겨나게 되었다. 정당 정치가 정착되 면서 국제 협조에 노력하고 있던 일본은 조약 사항을 잘 지켰다. (*2)

(*2) 1922년 조약이 성립하자, 일본은 즉각 산둥 반도(山東半島)의 권익을 중국에게 반환하고 군사력보다 경제 활동으로 국력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노력했다.

[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
1923년 9월 1일, 관동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요코하마(橫濱) 등지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사망자·행방불명자가 10만을 넘었다. (관동대진재) 이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나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불온한 기도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주민들이 만든 자 경단(自警團) 등이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사회주의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관 동대진재의 결과, 일본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67 다이쇼(大正)의 문화

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67 다이쇼(大正)의 문화
[ 새로운 학문과 문학 ]
메이지시대 말에서 다이쇼시대에 걸쳐 일본이 구미와 대등한 나라가 된다고 하는 목표가 달성되자, 새로운 지식에 민감한 청년들의 관심은 국가보다 개인의 내면을 향하게 되었다. 그에 수반하여 개성의 존중이나 자기 실현이 주장되고, 서양의 문학∙예술∙철학 등에 접해 교양을 심화시키는 것이 중시되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롭고 지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선(禪) 체험 위에 서양의 철학을 받아 들여 니시다철학(西田哲學)이라 불리는 독특한 철학을 낳은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와 일본 서민의 생활풍속을 연구하는 민속학을 시작한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 등이 나와 학문에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문학에서는 인도주의를 내건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등의 백화파(白樺派) 작가들과 탐미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이지적인 작풍으로 알려지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이 등장해서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였다. 다이쇼기 후반부터는 마르크스주의의 견지에서 노동자의 생활이나 혁명운동을 그린 프롤레타리아문학도 출현하였다. 또한 신극(新劇)이라 불리는 서양의 무대를 모범으로 한 연극도 활발해졌다.

[ 문화의 대중화와 도시 생활의 형성 ]
다이쇼기 중반부터는 중학교, 고등여학교, 대학이 다수 개교하였다. 민중의 지식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신문 외에도 『중앙공론』과 『문예춘추』 등의 종합잡지가 읽혀지게 되고, 문학전집 등도 대량 출판되었다. 라디오방송도 개시되고 문화의 대중화가 진행되었다.

근대 산업의 발전에 동반된 도시 생활자의 증대에 따라, 도시의 중심과 교외를 연결하는 사철(私鐵)이 개통되었다. 또한 합승자동차(버스)의 노선 확대, 백화점 개점, 여성 복장의 양장화, 카레라이스, 크로켓, 돈까스와 같은 양식(洋食)의 보급 등 오늘날까지 이르는 도시 생활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버스걸(bus girl, 역주: 버스 여차장)이나 전화교환수 등 여성의 새로운 직장에의 진출도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의 문화가 유입되어 특히 미국 영화는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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