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8] 죄라면 그저 졌다는 것 하나뿐 p113

한국인들은 말한다. 왜 독일은 철저히 과거를 청산하고 사죄하는데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 독일에서는 아직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웃나라들에게 총리가 머리 숙여 사죄를 하고 교과서에서도 나치의 죄악상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있는데 왜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 왜 일본은 독일을 본받지 않고 아직도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답답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답답한 쪽은 오히려 일본일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 당시 몇 년 동안 동맹관계에 있었고 패전국이라는 점 이외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데 일본이 독일과 똑같은 행동을 취해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일본으로서는 그리 뚜렷하게 잘못한 일이 없기 때문에 별로 사과할 이유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대도시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신형 대량살상무기인 원자폭탄의 성능 시험장으로 사용해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미국이 사죄해야 마땅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은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개발한 원자폭탄을 일본인들을 상대로 테스트하면서, 예컨대 200킬로톤 우라튬 폭탄으로 몇 명을 죽일 수 있는가, 피해 반경은 어느 정도인가를 면밀히 지켜보았다. 며칠 뒤 나가사키에는 신형 플로토늄 폭탄을 투하해 똑같은 실험을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해 변명하기를, 원자폭탄을 도시에 투하하지 않았다면 미군과 일본군 수백만 명이 죽었을 것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뭐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이다. 당시는 유럽전선에서 이미 독일이 패망해 히틀러도 자살했고 한창 전범재판소가 만들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명 징검다리 작전을 통해 미드웨이 과달카날 이오지마 필리핀 싸이판 오키나와 등을 차례로 점령한 뒤 일본 본토를 B29로 신나게 폭격하고 있던 중이었다. 유럽전선의 전쟁을 마무리한 소련도 주력군을 극동으로 돌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누가 보나 이미 끝난 전쟁이었고 일본의 항복은 시간문제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일본 군부에서도 체면상 최후까지 항전하라고 독려는 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항복의 조건과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당시 무리하게 일본 본토에 대한 점령전을 시도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본토 상륙전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사상자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즉, 수백만을 살리기 위해 수십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미국의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없는 얘기이고, 사실은 북에서 밀고 내려오는 소련보다 먼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점령하기 위해 서둘러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미국은 빨리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지 않으면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일본의 절반 정도를 소련에 내줄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순전히 땅따먹기를 위해 일본인 50만 명을 학살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리고 항복을 받아낼 심산이었다면 일본군에게 통보한 뒤 무인도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시범을 보인 뒤, 항복하지 않으면 다음엔 동경이다 이런 식으로 나왔더라도 효과는 똑같았을 것인데 하필 대도시에 투하한 것도 문제이다. 말 그대로 분풀이나 신무기 테스트를 위해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결론 이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행위이다. 당시 일본의 대도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정부에게 핵무기 개발을 앞장서 건의했던 아인슈타인은 일본의 유가와 히데키 박사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고 한다. 유가와 박사는 일본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서, 아인슈타인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아인슈타인의 행동은 미국 정부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상식선에서 보여준 것이며 그는 이 같은 행동을 통해 미국의 반 인류 범죄행위를 시인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미국에 공식 항의하고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죄를 받아내야 하건만, 아직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승전국이고 일본이 패전국이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당시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지역이어서 당시 조선인들의 인명 피해만도 5만 명이 넘었다. 이 피해배상을 미국에 가서 받아야지 왜 일본을 붙잡고 배상하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정부도 미국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미국 법원이나 국제 재판소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이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데, 한일관계가 악화되어 있는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일본과 독일의 입장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전쟁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명분도 빈약했고 아리안족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종 우월 사상을 바탕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에 대한 잔인한 인종말살극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폭넓게 인정되고 있기 때문에 독일이 잘못했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나치 독일은 순전히 인종청소를 위해 전쟁 중 유태인 600만 명과 러시아의 슬라브인 2000만 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대동아 전쟁이라는 것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50년 간 이어지고 있었던 전쟁의 연장선일 뿐, 어떤 계기로 전쟁을 '시작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측면이 있다. 1941년 유럽전선에서 독일이 승승장구하자 독일과 동맹을 맺은 것이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던 석유와 고철 수입이 중단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결국 독일과 동맹을 맺은 것과 미국을 공격한 것은 일본의 판단 착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죄행위라고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1941년 당시 일본은 원유의 수입량의 90%, 고철 수입량의 6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협조 없이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당시 유럽의 전쟁에 대해서 영국이 곧 히틀러에게 함락될 것이라는 판단아래 2년 동안이나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자 일본에 대해 원유와 고철 등 전략물자의 수출을 금지해버렸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 중국 본토의 모든 지역에서 병력을 철수해 만주까지 후퇴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 그리고 일본 등 3개 세력이 땅따먹기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미국은 장개석의 국민당을 후원하고 있었다.

즉 일본은 1941년 당시 미국 및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 길을 포기하고 만주와 중국 북부 지역 정도를 점령하는 선에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을 바라지 않고 있던 미국 측에서도 이 같은 사태를 기대하고 있었고 일-미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군국주의 일본은 무모한 확전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자멸의 길로 들어섰던 것인데, 이 역시 안타까운 판단착오였을 뿐 심각한 범죄행위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1941년 12월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하와이와 필리핀, 인도차이나를 동시에 공격하면서 이 전쟁에 동아시아 신질서 구축이라는 명분을 붙였다. 신질서란 서양 침략자들에 의해 생겨난 낡은 질서를 해체하고 일본의 군사력으로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뜻이다.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의 황인종끼리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어 행복하게 살자는 구호를 선전했는데, 이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올바르고 당당한 대의명분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비유럽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시민혁명에 성공해 제국주의 열강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일본이 진출할 수 있는 동아시아 지역은 이미 서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해방하는 일은 당시 일본 제국에게 상당히 중요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군사적인 면에서 볼 때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한 이유는 석유를 비롯한 이 지역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확보하려는 것, 그리고 인도와 버어마 루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장개석 군대에 대한 군수물자 보급을 차단하려는 것 등 두 가지였다. 그러나 동아시아를 백인들의 압제에서 해방하겠다는 의도 또한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 황인종의 입장에서 보면 유색인종을 거의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백인들의 착취를 받는 것보다는 같은 황인종 국가인 일본과 손을 잡는 것이 더 나은 일이었다고 하겠다. 적어도 백인들의 식민지에서 유색인종들이 겪어야 했던 핍박과 수모를 기억한다면 말이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해방군으로서 진출했으며, 오늘날 비록 논란이 있다고는 하나 동남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당시 일본의 노력이 상당부분 평가받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일찍이 대만과 조선을 통치하면서 보여준 것처럼 식민지를 단순히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투자와 개발, 교육을 병행하면서 말 그대로 공존공영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대동아 전쟁을 시작한 이후 일본은 해방된 식민지에 자치 정부를 구성한 뒤 여러 차례 일본에서 대동아공영권 지도자 회의를 개최하는 등 실제로 그 이념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의도대로 동아시아 지역에 공영권이 실현되었다면 아시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일본의 대동아 전쟁은 당시 국제 정세에서 충분히 명분이 있는, 나름대로 정의로운 전쟁이었으며 이는 미국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인디언과 스페인, 영국, 프랑스, 멕시코, 캐나다 등과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북미대륙을 정복, 연방제의 공영권을 이룬 것과 다름없는 행위라 하겠다. 쉽게 말해 일본이 의도했던 것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연방과 같은 대동아시아 연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동아시아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상이다.

일본-조선 관계와 영국-인도의 관계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아시아를 침략한 유럽인들은 식민지의 자생적인 산업발전을 저지하고 있던 산업조차 발전하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폈지만, 일본은 대만과 조선에서 미개한 사회구조를 해체하고 신속하게 산업혁명의 기초를 닦아 압축성장을 시도하는 정책을 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침략한 유럽인들은 이 지역에서 자원을 수탈해가고 공산품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식민지 주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임금이 오르고 그 결과 자원채취 비용이 올라가는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식민지의 경제가 발전하여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공업화되는 사태를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인도의 지도자 간디는 인도인들에게 영국에서 수입한 옷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손수 물레질을 해서 옷을 만들자는 캠페인을 전개했던 것이다. 간디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영국의 의도하는 영원한 착취 구도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일본이 시도한 대동아 공영권은 실로 바람직한 아시아 자립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사를 돌이켜볼 때 아시아는 일본의 '침략'이 있기 이전에도 그리 사람 살만한 동네가 아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침략이라는 것은 중국이 티벳을 침략했다거나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했다거나 하는, 자립적이고 분명한 국가체계가 전제되어야 성립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1900년대 전반기 아시아에는 태국과 일본 이외에는 '국가'라고 할만한 지역이 하나도 없었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청나라가 무너진 이후 중국과 한반도는 사실상 열강에 의해 분할 점령된 상태였고 나머지 지역은 모조리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동아 전쟁은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의 전쟁이었으며, 또한 당시 일본이 해방시킨 동남아 지역들이 차례로 독립정부를 수립한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시아 해방전쟁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도 중일전쟁으로 인해 1200만 명이 죽었다고 강변하면서 일본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1200만 명 대부분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인해 죽은 것이며, 당시 일본군이 장개석 군대나 모택동 군대에 비해 더 잔인했다고 판단할만한 근거는 없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4억이었고 평균수명은 25세 정도였다. 이는 전쟁이 없어도 중국 인구 가운데 해마다 1600만 명이 사망한다는 뜻이며 중일전쟁이 벌어졌던 7년 동안을 통틀어 보면 전쟁이 없었더라도 1억 명 이상이 사망했을 것인데, 유독 이 가운데 1300만 명이 중일전쟁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숫자놀음일 뿐이다. 오히려 모택동이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대륙이 통일되었다면 오늘날 중국인의 삶은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과거 전쟁에서 일본은 충분히 정당했지만 독일은 부당했고, 일본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 어쩔 수 없는 전쟁을 한 것이지만 독일은 다른 민족을 말살하고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전쟁을 했다. 즉 일본은 명분 있는 전쟁을 한 것이지만 독일은 명분 없는 전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독일은 민간인 3000만 명을 학살했지만 일본은 대량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중국이 주장하고 있는 남경사건이나 731 부대의 잔학 행위 등에 대해서는 먼저 객관적인 조사를 통해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문제는 일본에 관한 한 중국이나 한국 측에서 주장하는 자료들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밥 먹듯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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