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49 중앙집권 국가로의 길

4-2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49 중앙집권 국가로의 길
[ 판적봉환(版籍奉還) ]
정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가는 어떻게 해서 성립된 것일까.
보신전쟁에서 승리했다고는 해도 신정부는 번(藩)들의 연합체로서 그 기초가 불안정하였다. 신정부 내에서는 각 번의 의향을 언제나 배려할 필요가 있어, 일본국 전체의 입장에서 개혁을 행하는데 항상 곤란이 따랐다. 또한 국내가 다수의 번으로 나뉘어진 채로는 언제 어느 때 외국 세력에게 이용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었다. 국내의 통일은 급선무였다.

이에 신정부의 중심이 되어 있던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사가현∙나가사키현)의 네 번(藩)은 1869(메이지[明治]2)년 번주(藩主)가 자청하여 그 영토(판[版])와 인민(적[籍])을 천황에게 반환하고, 다른 번도 잇달아 이러한 움직임에 따랐다(판적봉환[版籍奉還]). 이 판적봉환에 의해 전국의 토지와 인민은 천황(오야케[公])의 것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지배권은 여전히 각 번에 남겨져 있었다.

[ 폐번치현(廢藩置縣) ]
1871(메이지[明治]4)년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의 신정부 지도자들은 전국의 번을 일거에 폐지하는 개혁에 관해 비밀리에 상담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쓰마∙조슈∙도사의 각 번에서 모은 천황 직속의 약 1만의 친병(御親兵)을 배경으로, 7월에 도쿄에 체재하고 있던 전 번주들(*1)을 황거(皇居, 이전의 에도성)로 모이게 해 천황의 이름으로 폐번치현(廢藩置縣)의 포고를 알렸다.

폐번치현은 분권적인 제도인 번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제(*2) 하에서 지방조직인 현을 두는 것으로, 번에 남겨져 있던 군사(軍事)와 징세(徵稅)의 권한도 신정부의 것이 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으로부터 모아진 연공은 번이 아니라 신정부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무사는 실직(失職)하였지만 무사의 녹(祿)은 그후 한동안 신정부가 대신해서 급부하였다.

신정부는 번의 반란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큰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새롭게 설치된 현은 신정부에서 파견된 현령(현지사[縣知事])이 통치하게 되어, 일본은 통일된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1) 당시에는 판적봉환에 의해 지번사(知藩事)라는 직명이었다.
(*2)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다양한 권한이 중앙정부에 집중되어 있는 정치 구조를 중앙집권제라고 한다. ⇔지방분권

[ 사민평등의 사회로 ]
한편 정부는 사민평등(四民平等)을 내세워 사람들을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국민으로서 통합해 나갔다. 우선 종래의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번주와 구게를 화족(華族), 무사를 사족(士族), 농민과 상인(町人)을 평민(平民)으로 하였다. 또한 평민에게도 성을 붙이는 것을 허락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직업선택, 결혼, 주거,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나아가 1871년에는 해방령(解放令)이 나와 에타(穢多, 역주: 근세·중세 천민 신분의 하나)와 히닌(非人,역주: 에도 시대의 천민 계층)으로 불리던 사람들도 평민이 되어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였지만,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사회적 차별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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