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71 중일전쟁 (日中戰爭)

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71 일중전쟁(日中戰爭)
[ 2∙26사건 ]
 1936년 2월 26일 아침, 육군 청년장교 일파가 1400 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수상 관저와 경시청 등을 습격하였다. 이들은 대신 등을 살해하고 도쿄의 나가타정(永田町) 주변을 점거하였다.
 사건의 수모자들은 정당∙재벌∙중신(重臣)을 타도하고 천황을 받드는 군부 정권의 수립을 노렸다. 하지만 쇼와천황은 중신을 살해한 반란분자를 용서하지 않는 단호한 결의를 보였다. 반란은 3일 동안 진압되어 수모자는 엄형(嚴刑)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후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현역 군인 밖에 될 수 없다는 제도가 부활하고 육해군이 지지하지 않는 내각의 성립은 곤란해 졌다.

[ 시안사건(西安事件) ]
 중국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권과 중국 공산당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내전 상태에 있었다. (국공내전[國共內戰])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이 협력하여 항일할 것을 호소했다. (*1) 그러나 장제스는 먼저 국내의 공산당 세력을 쓰러뜨리고, 그 후 일본과 싸운다는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공산당 군대는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국민당 군대에게 쫓겼다.
 만주 지방의 군벌로 관동군에게 쫓겨난 장쉐량(張學良)은 장제스에게 공산당 토벌을 명령 받았지만, 내심으로는 공산당의 항일 호소에 찬성하고 있었다. 장쉐량은 1936년 장제스를 시안(西安)에서 감금하여, 공산당과의 내전을 그만두고 일치단결해 일본과 싸울 것을 인정하게 했다. (시안사건)

(*1) 1935년에 코민테른 세계대회가 열려, 세계 각국의 공산당이 국내의 다른 민족주의적인 정당과의 적대를 중지하고, 협력해서 외국 세력을 추방한 후에 공산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하는 방침이 결정되어 있었다.

[ 루거우차오사건(盧溝橋事件)에서 일중전쟁으로 ]
 한편 일본군은 만주국의 유지와 자원 확보를 위해 인접한 화북(華北) 지방에 친일 정권을 만들기도 하여, 중국측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또한 일본은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후 다른 여러 열강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베이징 주변에 5천 명의 군을 주둔시켰다.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의 교외인 루거우차오에서 훈련하고 있던 일본군을 향해 누군가가 총포를 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다음날에는 중국군과 전투 상태가 되었다. (루거우차오사건) 사건 그 자체는 소규모로 현지 해결이 시도되었으나 일본측도 대규모 파병을 결정하였고, 국민당 정부도 즉시 동원령을 발포했다. 그리하여 이후 8년간에 걸친 일중전쟁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8월, 외국의 권익이 집중된 상하이에서 일본인 장병 두 명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이것을 계기로 일중 간 충돌이 확대되었다.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 시키면 장제스가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2월에 난징을 점령했다. (*2) 그러나 장제스는 벽지인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기고 항전을 계속했다.

(*2) 이 때 일본군에 의해 중국 군인과 민간에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 (난징사건) 또한 이 사건의 희생자 수의 실태에 대해서는 자료상 의문점도 제기되고, 다양한 견해가 있어 오늘 날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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