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70 만주사변 (滿州事變)

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70 만주사변 (滿州事變)
[ 사변 전야의 만주 ]
 일노전쟁에서의 승리로 일본은 랴오둥 반도 남부의 관동주를 조차하고, 러시아로부터 남만주철도(만철, 滿鐵) 영업권을 양도받았다. 쇼와 초기의 만주에는 이미 2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을 보호하고 관동주 및 만철을 경비하기 위해 육군 부대(관동군) 1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관동군이 만주의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폭발물로 죽이는 등 만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 하자, 중국인의 배일 운동도 거세져서 열차 방해나 일본인에 대한 박해 등이 빈발했다. 더구나 일본에게는 북으로는 소련의 위협이 있었고, 남으로부터는 국민당의 힘도 미쳐 왔다. 그러한 가운데 관동군의 일부 장교는 만주를 군사력으로 점령하여 문제를 해결할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 만주사변에서 만주국 건국으로 ]
 1931년 관동군은 봉천(奉天, 현재의 심양[瀋陽]) 교외의 류타오후(柳條湖)에서 만철의 선로를 폭파하고, 그것이 중국측의 소행이라 하며 만철 연안 도시를 점령했다. 정부와 중앙 군부는 불확대 방침을 취했지만, 관동군은 전 만주의 주요부를 점령하였으며, 정부도 이를 추인(追認)했다. (만주사변)
 만주에서 일본인이 당하던 불법 행위의 피해를 해결 못하는 정부의 외교 방침에 불만이 고조되어 가고 있던 국민들 가운데는 관동군의 행동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고, 육군에는 거액의 지원금이 몰렸다. 1932년 3월, 관동군은 만주국 건국을 실현하고, 후에 청조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를 만주국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 만주사변을 세계는 어떻게 보았는가 ]
 1932년 5월 15일, 만주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려던 정우회(政友會)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 毅) 수상은 해군 청년 장교 일단에게 암살되었다. (5·15사건) 이로써 8년간 계속되어온 정당 내각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그 후 한동안은 군인이나 관료 출신자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을 비난했다. 국제연맹은 만주에 영국의 리튼경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는 만주에 사는 일본인의 안전과 권익이 위협받고 있었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일본군의 철병(撤兵)과 만주의 국제 관리를 권고했다. 이미 만주국을 승인한 일본 정부는 1933년 이 권고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그 후 중국과의 정전 협정이 체결되자,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 왕도낙토(王道樂土) 건설이라는 슬로건 아래 일본의 중공업 진출 등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중국인 등의 인구 유입도 현저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만주국의 실권은 관동군이 쥐고 있었으며, 항일 운동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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