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69 중국의 배일 운동(排日運動)과 협조 외교의 좌절

5-2 제2차 세계대전 시대  69 중국의 배일 운동(排日運動)과 협조 외교의 좌절
[ 중국의 배일 운동 (排日運動) ]
 청조 멸망 후의 중국에서는 각지에 사병을 둔 군벌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쑨원의 뒤를 이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각지의 군벌과 싸우며 국내 통일을 꾀하고 있었다. 1928년 장제스는 베이징을 진압하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중국 통일의 움직임은 일본이 권익을 갖는 만주에도 도달했다. 그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세 번에 걸쳐 산둥 지방에 출병했다.
 중국의 국내 통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불평등 조약에 의해 중국에서 권익을 갖는 외국 세력을 배격하는 움직임이 고조되었다. 이는 열강의 지배에 대한 중국인의 민족적 반발이었지만, 폭력에 의해 혁명을 실현한 소련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도 받아 과격한 성격을 띠게 되었 다. 세력을 확대해 오는 일본에 대해서도,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벌이고 일본인을 습격하 는 배일 운동이 활발해졌다.

[ 협조 외교의 답보 ]
 정당 내각하에서 2기에 걸쳐 외무대신을 역임한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는, 영미와 협조하여 조약을 지키면서 중국의 관세자주권 회복 요구를 지지하는 등 중국의 민족 감정에 동정적으로 대응하는 협조 외교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배일 운동은 진정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정책으로 대처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타나, 시데하라의 외교를 연약한 외교라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국 정세에 대한 미 외교관 맥머리(McMurry)의 견해>
인종 의식이 되살아난 중국인은 고의로 자국의 법적 의무를 경멸하고, 목적 실현을 위해서는 무턱대고 폭력에 호소하며 도발적인 처사를 했다. 그리고 힘에 호소하려 하면서 힘으로 반격을 당할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지만, 적대자가 약한 모습을 보 이면 순식간에 거들먹거린다. チ중국에 호의적인 외교관들은 중국이 외국에 대한 적대와 배 반을 계속한다면 조만간에 한두 국가가 참다 못해 호된 보복을 할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1935년의 메모에서 일부 요약)

[ 세계 공황과 높아지는 군부에 대한 기대 ]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이 된 미국에서 1929년 주가가 대폭락하는 공황이 일어났다. 불황의 여파는 전세계에 미쳐 세계 공황이 일어났다. 대미 수출에 의존하는 일 본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아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쇼와 공황) 농촌에서도 미국을 대상으 로 하는 생사(生絲) 수출액이 격감하여 농민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1930년 런던에서 해군 보조함의 제한을 의제로 하는 국제 회의가 개최되었다.(런던군축회의) 이 회의에서 일본에 불리한 협정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일부 군인과 그에 동조하는 야 당 정치가는 정부를 거세게 공격했다.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수상은 폭한에게 습격을 당해 중상을 입고(후에 사망), 퇴진 위기에 몰렸다.
 군인이 정치에 직접 참견을 하는 것은 군인칙유(軍人勅諭)(*1)에서 금지되고 있었지만, 군인들 사이에서는 배일 운동의 위기에 처해진 만주 재주(在住) 일본인들의 궁상과 만주권익에 대한 위협에 대처할 수 없는 정당 정치에 대해 강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와는 달리, 군인들 사이에서 독자적으로 정책을 논하고 실행하려는 생각을 가진 장교 그룹이 형성되었다. 국민도 경제 불황으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서 정쟁(政爭)으로 나날 을 보내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당 정치에 실망하여 차츰 군부에 기대를 모으게 되었 다.

(*1) 1882(메이지 15)년에 내려진 천황의 말로, 군인의 마음가짐을 설명한 문장.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