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64 베르사유조약과 대전 후의 세계

5-1 제1차 세계대전 시대  64 베르사유조약과 대전 후의 세계
[ 베르사유조약과 국제연맹 ]
1919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려, 일본은 5대국(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의 하나로서 출석하였다. 강화회의 결과,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은 전쟁의 책임을 추궁받아 모든 식민지와 영토의 일부를 잃고 가혹한 배상금의 변제에 시달리게 되었 다. 이것은 후에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강화를 위한 14개조의 원칙을 제창하여, 국가의 이해(利害)를 초월한 세계평화와 국제협조를 위한 기관으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프랑스 등의 다른 전승국 중에는 정치 현실과 동떨어진 공론이라 하여 반대하는 나라가 있었다. 하지만 전승국은 미국의 참전으로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20년 국제연맹이 발족되었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이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참가하지 못해, 국제연맹은 제한된 힘 밖에 발휘할 수 없었다.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요약발췌)>
3. 보호무역의 폐지
4. 군비의 축소
5. 민족자결에 기반한 식민지 문제의 공평한 해결
14.모든 국가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을 목적으로 한 연맹의 설립.

[ 아시아의 독립 운동 ]
대전 후 민족 자결의 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아시아에서도 민족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인도에서는 비폭력주의 지도자인 간디와 네루가 약속받았던 인도의 자치를 영국에 요구했다. 영국은 이를 탄압했지만, 민족 독립의 움직임은 오히려 규모가 커졌다.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조선에서는 1919년 3월 1일 구(舊)국왕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데모 행진을 벌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순식간에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3·1독립운동) 이 때 조선총독부는 무력으로 이를 탄압했지만, 이후에는 무력으로 억누르는 통치 방법을 변경했다.
중국에서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중국의 옛 독일 권익을 이어받게 되자, 1919년 5월 4일 베이징(北京)의 학생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항의 운동이 일어났다. (5·4운동) 이 운동은 그 후 중국 각지로 확산되어 갔다.

사진: 3·1독립운동

[ 일본의 대전 경기 ]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서는 군수품의 수출이 급증하였다. 아시아지역에 대한 수출도 큰 증가를 보이고 중공업도 급속히 발전하여, 일본은 대전경기(大戰景氣)라 불리는 공전의 호경기를 맞이하였다. 미쓰이(三井)∙미쓰비시(三菱)∙스미토모(住友) 등의 재벌(財閥)은 금융과 무역, 조선과 같은 다각 경영으로 급속히 힘을 키웠다.
이렇게해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일청∙일노에 이은 제 3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 한편으로, 큰 희생을 지불하지 않고 성과를 얻었기 때문에 향후의 전쟁이 총력전이 된다고 하는 세계의 동향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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