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6세기 조선통신사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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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에도 막부의 9 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군 승직을 축하하기 위해서 항례의 조선 통신사가 초빙 되었다. 이 제11차의 조선 통신사에게, 서기관으로서 수행한 김인겸은, 그 일본의 긴 여행의 기록을 “일동장유가”라고 제목을 붙여 남겼다. 그 책에는 일본의 풍부함을 본 김인겸의 감상이 표현되고 있다.
조선 통신사

-----[1764년 1월 28일 오사카]-----
100만채는 정도는 될 듯한 집의 모두는 “기와 지붕”이다. 굉장하다. 오사카의 부호의 집은「조선의 최대의 대저택」의 10배 이상의 크기로, 구리 지붕에,내부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사치스러움은 비정상이다.도시의 크기는 40 km 이며, 그 모두가 번영하고 있다.믿을 수 없다.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사실은 오사카 였다. 세상에, 이와 같이 훌륭한 도시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서울의 번화가의 10000배의 발전이다. 북경을 본 통역이 통신사도 있지만 북경의 번영도 오사카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더럽고 어리석은 피를 가진 짐승과 같은 왜놈이 중화주의 시대에, 이 토지에 왔다. 그리고 2000년간, 평화롭게 번영해, 하나의 천황가를 존속시키고 있다. 한심스럽고, 원망스럽다.
오사카 오사카

-----[1764년 1월 28일 교토]-----
거리의 번영이 오사카에는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천황이 사는 도시이며, 매우 사치스러운 도시다. 산의 모습은 용장, 강은 평야를 둘러싸 흘러 비옥한 농지가 무한하게 퍼지고 있다. 이 풍부한 낙원을 왜인이 소유하고 있다. 분하다. “황제”이나 “천황”를 자칭 해, 아이나 손자에게까지 불리고 있다. 분하다.
이 개와 같은 왜인을 모두 소탕 하고 싶다. 이 토지를 조선의 영토로 하고, 조선왕의 덕으로 예절의 나라로 만들고 싶다.
교토

-----[1764년 2월 3일 나고야]-----
거리의 번영, 아름다움은 오사카와 같다. 굉장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인구가 많음, 토지의 풍부함, 가옥의 사치스러움…이 여행의 최고다. 난징에도 없는 풍경이다.조선의 수도도 훌륭하지만, 나고야와 비교하면, 매우 처량하다. 사람들의 아름다움도 최고다.
나고야 나고야

-----[1764년 2월 16일 도쿄]-----
좌측에는 집이 늘어서, 우측에는 바다가 퍼져 있다. 산은 전혀 보이지 않고, 비옥한 토지가 무한하게 퍼지고 있다.누각이나 저택의 사치스러움, , 사람들의 활기차, 남녀의 화려함, 성벽의 아름다움, 다리나 배….모두가 오사카나 쿄토에서 삼배는 우수하다. 이 훌륭함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은, 나의 재능으로는 불가능하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은 나고야와 같다.
도쿄

에도시대에는 에도의 인구는 최성기의 1721년에 130만명이라고 해 1800년경의 런던 86만명, 파리 54만명으로 추계되는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에도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도쿄 도쿄

도쿄는 2000년의 유엔의 밀레니엄 도시 백서에 의하면, 세계 최대의 도시이다. 유엔“밀레니엄 도시”백서 2000년판으로부터
1 도쿄   2,640만명
2 멕시코  1,810만명
3 봄베이  1,800만명
4 상파울로 1,780만명
5 뉴욕   1,660만명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사절들의 주요 임무는 전쟁 중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것이었다.1607년과 1617년,1624년,1636년,1643년에 파견된 조선사절은 조선통신사라고 불리는데 특히 첫 세 차례통신사들은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 송환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통신사의 직함 자체도 끌려간 사람들을 되돌려 오는사신이란 뜻의 ‘쇄환사(刷還使)’였다.

이들 통신사들은 적극적으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의 귀환 작업을 했다.(조선인들을 되돌려 오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사명당 유정을일본인들이 집에 가둔 후 뜨거운 불을 때 죽이려 했지만 도력으로 방안을 얼음장처럼 만들었다는 어린 시절 열심히 읽었던 동화책속설화도 이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본인 학자 요네타니 히토시에 따르면 1599년부터 1643년 사이에 조선 피로인들의 귀환 사례는 63건 이었다고 한다. 특히 1599-1610년 사이에 집중됐고 전체 확인되는 귀환자 숫자는 6323명 이라고 한다.

이런 일부의 조선인들이나마 고국 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데는 일본의 전쟁관습인 ‘히토가에시(人返し)’가 일정부분 역할을 했다고한다. 전통시대 일본에선 전장에서 사람을 약취한 자는 전쟁이 끝난 후 포로의 옛주인이 사람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경우, 그들을원래 살던 곳으로 보내는 관행이 있었다는 것.

전쟁이 끝나 조선에서 사절이 와 쇄환을 요구하자, 일본의 막부와 다이묘들은 이런 관념에 따라 포로를 적극적이진 않지만 돌려주기시작했다는게 요네타니 히토시의 평가다. 일부 다이묘들의 경우, 자발적으로 잡혀온 조선인을 모아서 조선 사절에게 보낸 경우도있다는 것.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은 조선인 송환에 더욱 소극적으로 변해간다.

여기에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한 것은 잡혀간 조선인중 송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 상당수가 일본에서 새로운 삶의 기반을 잡은 점이 이런 태도의 바탕이 됐다.

1624년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간 강홍중이 남긴 ‘동사록’이란 책에선 “붙잡혀 온 사람들이 맨손으로 온 후, 수년동안 재산이 늘고 생활이 편해져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다”는 표현이 나온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선 노역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노임이 지급되고, 노임도 충분해 “사람들이 흔쾌히 일을 하러 나선다”는 것.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엄격한 강고한 신분제 사회이자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과 달리 일본에서 조선의 기술자와 일반인들은 자신의노력에 따라 현금수입을 얻는 일본이 오히려 억압이 적은 사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의 삶이 모두 참혹했을 것이라는 것은 일종의 ‘신화’라는 설명이다. 오히려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경우가 더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사료가 적지 않다고 한다.

1600년과 1602년,1603년,1604년에 자력으로 일본을 탈출한 39명에겐 조선정부가 부역과 잡역 면제조치를 해줬지만 그 외의귀환 피로인들에겐 그같은 조치를 취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1605년 유정과 동행해 부산에 도착한 피로인들에게 조선이 취한 행위는 그들에게 귀국이 끔찍한 악몽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한다. 귀국한 유정은 이경준이라는 관원에게 피로인들을 맡기면서“형편대로 고향에 나누어 보내라”고 부탁했고 이경준은 부산항에 정박한 조선 수군에게 사후처리를 위임한다. 그런데 각 배의선장들은 “피로인 남자들과 여자들을 포박해 노예로 삼고, 피로인여성이 미인이면 남편을 묶은채 바다에 던져놓고 그 여자를 자기것으로 삼았다”는 당대의 생생한 증언이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1624년이 되도 크게 개선되지 않아 강홍중이 부사로 참여한 조선사절이 일본에서 146명의 피로인을 데리고 귀국했지만 모두 부산에 방치돼 버리고 만다.

이런 추태가 소문으로 퍼지면서 일본 현지에서 이문창이라는 조선인이 “조선의 법은 일본보다 못하고, 생활하기 어려우며, 본국에 돌아가도 조금도 좋은 일이 없다”는 말을 퍼뜨려 이후 송환작업에 어려운 일이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일본인 학자인 요네타니 히토시는 이같은 상황에 대해 “조선이 잡혀간 조선인 송환에 집착했던 것은 국가의 체면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지 잡혀간 백성들이 불쌍하다고 여겼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는다.
출처 : 16세기 조선통신사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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