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인물 칼럼]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인물 칼럼]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가난한 소년 시절 ]
메이지국가(明治國家) 건설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막부 말의 조슈번에서 무사보다 신분이 낮은 아시가루(足輕, 역주: 평시에는 잡역[雜役]에 종사하고 전시에 보병이 되는 병졸)의 자식으로서 자랐다. 처음으로 에도에 가는 것을 축하하는 날, 하기(萩)의 명물인「뱅어(白魚) 」를 먹고 울며 기뻐할 정도로 가난하였다.

청년이 된 이토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가손주쿠(松下村塾)에서 배웠다. 인간이 출세하는 것은「뛰어난 사람과의 만남」이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는, 젊었을 때부터 많은 선배들과 접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도막운동(倒幕運動, 역주: 에도막부를 쓰러뜨리려는 운동) 중에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에게 발탁되고, 메이지신정부에서는 28세로 효고현 지사가 되었다. 그후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참의(參議, 오늘날의 대신[大臣])가 되었다.

[ 절찬을 받은 「히노마루 연설」 ]
이와쿠라사절단이 구미에 2년 가까이 파견되었을 때, 이토는 대사(大使)인 이와쿠라 도모미 다음으로 부사(副使)가 되었다. 이때 영어를 할 수 있던 이토는 사절단을 대표해서 연설을 하였다.

그 가운데 이토는 수백년 이어진 일본의 낡은 제도는 「한 개의 탄환도 발사되지 않고,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철폐되었다」(폐번치현을 가리키고 있음)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국기에 있는 붉은 원은 「이제 막 바다 위에 떠오르려고 하는 태양을 상징하며, 우리 일본이 구미문명의 한 가운데를 향해 약진하는 모습입니다」라고 끝을 맺었다. 이것이 유명한 히노마루(역주: 붉은 원이라는 뜻으로 일장기를 상징)연설로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토는 그후에도 일본을 구미열강과 대등한 힘을 가진 근대국가로 만들기 위한 사업에 다른 누구보다 전력 투구하여 메이지정부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 헌법제정을 향한 노력 ]
이토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헌법제정과 국회의 개설이었다. 그는 1882(메이지 15)년부터 1년 이상이나 유럽에 유학하여, 독일 헌법학자 등으로부터 강의를 받고 귀국하였다. 1885년에는 45세로 초대 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그후 수년 간 이토는 많은 사람들과 상담하면서 헌법초안을 다듬어 완성하였다. 그는 헌법제정 과정에서 많은 보수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예산의 결정과 법률은 의회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는 원칙을 관철시켰다. 이렇게 이토가 심혈을 기울인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國憲法)은 1889(메이지 22)년에 발포되었다. 독일의 헌법 등에서 배우면서도 일본의 전통에 바탕한 그 내용은, 민간의 급진적인 자유민권론자나 다른 외국의 매스컴으로부터도 칭찬받는 것이었다.

이토는 다른 원로(元老)와는 달리 평생에 걸쳐 재산을 축척하지 않고, 누구와도 거리를 두지 않고 사귀었다. 생전에 그가 한 말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술을 마시고 놀고 있을 때라 해도 내 머리에서 언제나 국가라는 두 글자가 떠난 적은 없다. 나는 자손에 관한 것이나 집안 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언제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에 관한 것 뿐이다」. 이토의 활약을 떠받친 것은 다름아닌 이러한「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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