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일본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조선 병합에 반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독자적인 문화를 1천년 이상 갖는 민족을 식민지로 병합한다면 일본으로서는 큰 후환'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입장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스스로 부국 강병해지게끔 이끌어서 대한제국을 일본과 협조적인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토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적도 있다.

“나는 한국 국민과 일본국민을 화해시키고 양자간에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이끌어내야할 입장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토는 1905년 한국의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메가다를 일본으로 쫓아버린 사건도 있었다. 메가다가 일본의 화폐개혁과 재정개혁을 단행한 이후 곧바로 토지조사 사업을 시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토는 그것을 막았고 그래도 메가다가 말을 듣지 않자 결국 그를 일본본토로 보내버렸다. 이처럼 이토는 조선에 대한 식민사업을 하는 것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보았던 것이고, 나름대로 상황을 관찰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토는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에서 '현자'로써 존경받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조선에서조차 이토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음은 해외의 저명한 인사들이 이토를 논평한 것이다.

“이토히로부미공은 일본의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정치가이다. 그의 한국 부임은 대단한 자기희생이었다. 이토공이 한국의 체계를 개선시키기 위한 계획안건들을 내놓았을 때 나의 마음은 요동쳤다. 거기에는 개혁, 공정, 알선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이 범한 모든 잘못된 체계들을 구제 시킬 것 같았다.”
캐나다인 져널리스트 흘레데릭·아서·막켄지 (1906년 런던·디일리 메일지)

“고결한 정치와 도덕을 중요시했던 진보적이고도 원만한 이토 총감에 의하여 한국인은 암흑 시대에서 벗어나 광명세계에 들어섰다. 그들은 과거의 오래 된 악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생명 재산이 확실히 보호되는 등, 모든 면에 있어서 3년간에 2배의 진보를 이루어냈다.”
선교사 랏드 박사


위대한 이토의 죽음은 세계각국의 저명한 인사들에게 엄청난 비통함을 안겨줬다. 심지어 '조선에게까지' 그러한 감정을 유발시켰다. 다음은 이토의 죽음을 애도한 해외 인사들과 대한제국 황제의 논평이다.

----------이토히로부미공 암살에 대한 독일인의 논조
“한국인이 공을 암살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슬퍼해야 할 사건이다. 공은 한국인의 가장 좋은친구였기 때문이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강경적인 태도로 한국에 임하자마자 일본은 의외의 반항을 만났다. 한국인들이 참혹하게 일본 거류민들을 살상했기 때문이다. 그 때 일본의 무단파 및 언론기관은 그 끔찍한 사건을 벌인 이들을 발복색원하자고 목청을 드높였지만 오직 공만이 온화방침을 고집해여 그 강경책이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정치는 철두철미하게 부패하고 있었다. 공은 올바른 개혁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일본 통치하에 있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자발적으로 깨닫게 해주려고 60세를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통감이라고하는 다난의 일자리를 맡았다.”
독일인 엘윈·belts 박사

----------이토공암살에 대한 러시아인의 논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심한 사건이다. 공과 같은 대위인의 서거는, 일본의 손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 러시아의 손실이며, 한국의 대손실을 낳게 할것이 자명하다.”
토우신 철도 장관 호르왓트 소장 <하얼빈·웨스트니트크지>

----------이토공암살에 대한 한국 황제의 논조
“이토를 잃음으로 인해, 동양의 인걸이 없어졌다. 공은 우리 나라에 충실과 정의를 세우기위해 장백산에 뼈를 묻을 각오로써 한국의 문명발달에 힘쓰며 양언하고 있었다. 비록 이토가 일본의 정치가라고 해도 그처럼 동양의 평화를 기원한 사람은 없다. 실로 이토는 우리 나라의 자부이다. 그 자부에 위해를 주는 사람(안중근)이 있다고 하면, 사물의 이사를 풀지 않는 유랑인일 것이다. 이토를 잃은 것은, 우리 나라와 일본 뿐만 아니라, 동양의 불행이다.”
10월 27일 대한제국 황제(고종)


이토의 암살로 인해 비통해한 것은 조선의 왕실뿐 만 아니었다. 수많은 조선의 관민들은 그것에 경악하여 이토에게 사죄·추도의 뜻을 보냈다. 11월 4일 이토의 국장에는 한국의 칙사 초정부 대표자등이 다수 참례했다. 같은 날 서울의 장충단에서는 이완용 수상의 주최로 조선의 관민1만명이 참례해 추도회가도가 개최되어 추도회는 전국 각지로 퍼졌다.

1개월 후 11월 26일에는 한성부 민회, 그 다음날은 대한 상무국 총회, 12월 13일에는 영도우지가 각각 추도식을 주최했다. 조선의 관민들은 이토의 죽음에 대해 '추도에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안중근의 그 범죄에 대한 것을 '대신 사죄'하기 위해 전국의 13도 곳에 호소해 「도일 사죄 13 도인민 대표 임시 회의소」를 건립하기도 했다. 또 이토공을 민 제묘와 같이 신으로서 모시는 운동이나 그의 동상이나 송덕비를 건립하는 운동까지 일어났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관민들은 자발적으로 이토히로부미를 '동양의 영웅' '조선의 대생불'로 존칭하며 숭배를 했다. 반면 당시 , 뤼순 감옥에 투옥되었던 안중근에게 면회가는 조선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충분히 면회갈 여건이 가능했는데도 말이다.
출처 :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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