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6]-3 협력과 저항의 역설

[6] 협력자들  [6]-3 협력과 저항의 역설
우리의《재인식》에는 이 같은 협력의 실태와 정신세계에 관한 좋은 논문들이 몇 편 실려 있습니다. 우선 이혜령 교수의 <한글운동과 근대미디어>라는 논문을 소개하겠습니다. 한글운동이라 하면 사람들은 식민지기의 대표적인 민족운동의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문을 읽으면 반드시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 없는 복잡한 식민지기의 현실을 접하게 됩니다. 한글학자들이 한글의 맞춤법을 통일하고 그것을 보급하는 데는 총독부와의 협력이 절실하였습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한글학자들이 서로 다른 방식의 맞춤법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최현배와 같이 한글파에 속한 학자들은 ‘ㅆ’이나 ‘ㄶ’과 같은 쌍받침이나 겹받침의 사용을 주장한 반면, 정음파의 학자들은 그러한 복잡한 받침의 사용에 반대하면서 소리 나는 대로 적을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양파의 팽팽한 대립은 1930년 2월에 한글파의 주장대로 한글 맞춤법이 통일됨으로써 끝이 납니다. 총독부가 한글파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지요. 정음파의 저항은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성경이 원래 정음파의 맞춤법으로 쓰였으니까요. 그렇지만, 통일 맞춤법의 보급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장소는 학교였습니다. 그 학교가 총독부의 통제 하에 있고 총독부가 한글파의 손을 들어 준 이상 한글파의 승리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습니다. 결국, 기독교계도 1937년이면 한글파의 맞춤법 통일안을 수용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맞춤법의 통일과 한글의 보급이라는 민족운동은 총독부의 지배정책과 긴밀한 협력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저항과 협력의 경계는 불분명하였고 구체적 현실에서 양자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저항이 협력이기도 하고 협력이 저항이 되기도 하는 역설적인 관계는 조선처럼 제국주의의 완전 식민지였던 곳에서는 거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 식민지에서 제국주의의 지배는 정신과 물질에 걸쳐 또는 시간과 공간에 걸쳐 포괄적이며 총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이성시 교수의 <조선왕조의 상징공간과 박물관>(《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휴머니스트, 2004)이라는 논문을 읽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왕조의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세 왕궁을 박물관, 미술관, 동·식물원으로 민간에 개방합니다. 그 박물관에 진열된 역사적 유물의 상당 부분은 일본의 일류 고고학자들이 직접 발굴한 것입니다. 아니면 넘어지거나 반쯤 묻혀 있거나 깨진 것들을 모아서 정리하고 보존한 것들이지요. 그 유물을 통해 일제는 너희 조선도 우리 일본처럼 얼마나 훌륭한 문화였던가 하고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것을 보는 조선인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깨어지고 흩어진 자신의 역사를 정리해 준 일에 감사하면서도 다른 한편 일본이 자신의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음을 보고 부끄러워했지요. 실제로 최남선 선생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일제의 고적조사사업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일본인의 손을 통해 처음으로 조선인 생명의 흔적이 천명된 것은 얼마나 큰 민족적 수치인지”라고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경주의 석굴암이 일본인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고 그때 일본인들이 석굴암이야말로 동양예술의 진수라고 흥분해 마지않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오히려 부끄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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