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58 러일전쟁 (日露戰爭)

4-3 입헌 국가(立憲國家)의 출발  58 일노전쟁(日露戰爭)
[ 일영동맹(日英同盟) ]
삼국간섭 후 일본은 동맹을 러시아와 맺어야 할지, 영국과 맺어야 할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대립되었다. 논쟁의 초점은 러시아에 대한 시각의 차이였다. 러시아는 1900년에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1)을 구실로 만주(중국 동북부)에 2만 명의 병사를 보내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다. 러시아가 만주에 머물며 조선반도로 나오지 않도록 러시아와 타협이 이루어질지가 최대 쟁점이었다. (*2)

논쟁의 결착을 낸 것은 외교관인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제출한 의견서였다. 그것은 일노와 일영 어느 쪽 동맹이 일본의 국익이 될까를 논한 것으로, 일영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고무라 의견서는 정부의 방침으로 채택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섭한 결과, 1902(메이지 35)년 일영동맹이 체결되었다. 일영동맹은 그 후 20여 년 동안 일본의 안전과 번영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3)

(*1) 의화단은 향촌(鄕村)의 자위 조직을 기반으로 해 중국 전통 종교의 흐름을 따르는 조직으로, 외국인을 배척하여 선교사나 외교관을 살해하고, 베이징(北京)의 각국 공사관을 포위했다. 이에 대해 영국·러시아 등 구미 여러 나라와 일본을 포함하는 8개국이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2) 이 구상은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이라고 하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주창했다.
(*3) 당시 영국은 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대를 우려하고 있어서 이 동맹은 영국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일영동맹의 이점(고무라 의견서로부터)>
1 아시아에 있어서 영국의 목적은 영토 확장이 아니라 현상 유지와 통상 이익이며,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야심을 제지하여 비교적 오랫동안 동양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2 따라서 일영조약은 평화적, 방위적인 것으로, 국제 여론에서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
3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청국은 더욱더 일본을 신뢰하게 되어, 일본의 이익을 증진한다.
4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강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뜻에 따르게 하는 수밖에 없다. 영국은 동맹을 맺기에 가장 적당한 나라이다.
5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 일본 경제에 대한 국제적 신용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영국인은 동맹국의 공통 이익이라는 점에서 일본에 재정상, 경제상의 편의를 도모하게 될 것이다.
6 일본의 입장에서 대영제국과 시베리아의 통상상의 가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7 러시아 해군은 영국 해군보다 약해서 대항하기가 수월하다.

러일전쟁

러일전쟁의 풍자화

[ 일노개전(日露開戰)과 전쟁의 향방 ]
일본의 10배의 국가 예산과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는 만주의 병력을 증강하여 조선 북부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였다. 그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는 러시아의 극동 지역의 군사력이 일본이 겨룰 수 없을 만큼 증강될 것이 분명했다. 정부는 시기를 놓칠 것을 걱정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할 결의를 다졌다. 1904(메이지 37)년 2월, 일본은 러시아 군함에 공격을 가하여 일노전쟁을 개시했다. 전쟁터가 된 것은 조선과 만주였다. 1905년, 일본 육군은 고전 끝에 뤼순(旅順)을 점령했고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 승리했다.

러시아는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발트해로부터 발틱 함대를 파견했다. 함대 중 38척이 아프리카의 남단을 우회, 인도양을 횡단하여 약 7개월에 걸쳐 일본해에 도착했다. 이를 맞아 싸운 일본의 연합 함대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사령장관의 지휘 아래 병사들의 높은 사기와 뛰어난 전술로 발틱 함대를 전멸시켜, 세계의 해전사에 남을 경이로운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해해전[日本海海戰])

[ 세계를 바꾼 일본의 승리 ]
일본해해전에서 승리했을 때, 일본은 이미 외국으로부터의 빚과 국채로 마련한 국가 예산의 8년 분에 해당하는 군사비를 전부 써 버린 상태였다. 장기전이 되면 러시아와의 국력 차이가 드러나, 형세가 역전될 것이 명백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에 가장 유리한 시기를 골라 일노 간의 강화를 중개했다.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의 결과 1905(메이지 8)년 9월 포츠머스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조선)(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음)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러시아에게 인정하게 하고, 중국의 랴오둥 반도 남부(후에 일본은 관동주[關東州]라 부름)의 조차권(租借權)을 취득하였으며, 남만주에 러시아가 건설한 철도의 권익을 양도받고 남가라후토(南樺太, 역주: 남부 사할린) 영유를 인정시켰다. 한편 배상금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하려고 해도 국력이 한계에 달해 있다는 사정을 모르는 국민 중 일부는 이를 불만삼아 폭동을 일으켰다. (히비야화공사건)

일노전쟁은 일본의 생존을 건 전쟁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국의 안전 보장을 확립했다. 근대 국가로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유색 인종의 국가인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 대국이었던 백인 제국 러시아를 이긴 것은 식민지가 되어 있던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다. (*1) 그러나 한편으로 황색 인종이 장래에 백색 인종을 위협할 것을 경계하는 황화론(黃禍論 *2)이 구미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 유럽에서도 오랜 세월 러시아 제국에게 억압받고 있던 핀란드, 폴란드, 터키 사람들은 일본의 승리를 열렬히 환영했다.
(*2) 일청전쟁 후 이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등이 주장한 바 있다.

그림: 구미에서 본 일노전쟁 프랑스 신문의 만화 삽화(1904년). 거인 러시아에 도전하는 일본인을 온 세계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당시에는 모두가 러시아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

<일노전쟁과 독립에 대한 자각>
「일본이 러시아를 이긴 결과, 아시아 민족은 독립에 대한 큰 희망을 품기에 이른 것입니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

「만약 일본이 가장 강대한 유럽의 한 나라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것을 인도가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후일의 수상 네루)

「입헌제였기 때문에 일본은 위대해졌다. 그 결과 그처럼 강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란의 시인 시라즈이)

「일본인이야말로 유럽에게 자신들의 분수를 깨닫게 한 유일한 동양인이다.」
(이집트의 민족 운동 지도자 무스타파 카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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