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명성황후는 명례궁 수입의 88%를 당오전으로 충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출은 수입 291만 량을 훨씬 초과하는 444만 량이었다. 식료비는 354만 량 이며 총지출의 79%에 달하였다.

1855년부터 조선왕조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農業生産(농업생산)이 급속하게 감소하고, 物價(물가)가 지속적으로 치솟고, 市場(시장)이 분열하였다(李榮薰 2007). 이 위기의 기간에 명례궁의 수입은 <표1>에서 보듯이 1853-1854년 32,954량에서 1892-1893년 2,916,290량으로 무려 88배나 팽창하였다. 동기간 물가도 급하게 치솟았다. 예컨대 米(쌀) 1석의 가격은 6량에서 138량으로 23배나 올랐다. 이를 감안하면 명례궁의 실질 수입은 동기간 3.8배 증가하였다.

위기의 시대를 반영하여 宮房田(궁방전)으로부터의 실질 수입은 감소하였다. 액면으로는 8,742량에서 184,824량으로 21배 증가하였지만, 물가가 23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정부의 공상도 액면으로 8.5배 증가하였지만 물가의 상승폭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위기의 시대에 정부재정의 형편도 악화되었기 때문이다.(*5) 그런 가운데 명례궁의 실질 수입을 3.8배나 끌어올린 것은 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였다. 내하가 1892-1893년에 연평균 257만 량을 초과한 가운데 총수입의 88.2%를 차지하였다.

명례궁에 대한 왕실의 내하는 이전에도 있긴 했지만 비정기적이었다. 대개 銀(은)으로 내려졌는데, 때때로 다른 현물일 수도 있었다. 받자책에 의하면 錢(전)의 형태로 내하가 매년 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1882년부터이다. 이후 1894년까지 內下(내하)의 추이를 제시하면 [그림2]와 같다. 이에서 보듯이 내하는 1882년 38,100량에 불과하였는데 1887-1888년에 연간 50만 량을 넘었으며, 1891년 이후 급증하여 1894년에는 270만 량 이상의 거액에 달하였다.

[그림2] 明禮宮(명례궁)으로의 內下(내하)의 추이: 1882-1894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2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奎章閣圖書 19003-1, 21, 20, 19, 18, 17, 16, 7, 43, 42, 6, 5, 4)

이 내하금이 1882년부터 발행된 當五錢(당오전)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바로 그 해부터 錢(전) 형태의 내하가 연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오전의 발행은 閔妃(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閔氏(민씨) 政權(정권)의 유력한 재정수단이자 민씨 일족의 致富(치부) 方策이었다. 당오전의 발행은 물가를 급하게 끌어올리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그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당오전은 1885년부터 한동안 발행이 자제되다가 1889년부터 1894년 폐지되기까지 품목에 못 미치는 惡貨(악화)의 형태로 대량 발행되었다(吳斗煥 1991: 61-81). 그러한 당오전의 역사와 [그림2]의 추이는 연도별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개 일치하고 있다. 이 역시 내하의 수단이 다름 아닌 당오전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컨대 민비(명성황후)는 1892-1893년 명례궁 수입의 88.2%를 당오전으로 충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기간 명례궁의 지출은 <표2>에서 보듯이 수입 291만 량을 훨씬 초과하는 444만 량에 달하였다. 이 시기 명례궁 재정은 거대한 적자 구조였다. 동시기 명례궁의 會計冊(회계책)은 이 적자가 ‘加用(가용)’, 곧 借入(차입)으로 매워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3]은 1855-1892년의 회계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米와 錢(전)의 연말 시재의 추이이다.

[그림3] 명례궁의 年末 時在의 추이: 1853-1892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3

자료 : 『明禮宮會計冊 (명례궁회계책)』
(奎章閣圖書 19004-12, 42, 13, 53, 14, 28, 15, 54, 19077-2)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1863년 高宗(고종)의 시대가 열리면서 차입 구조로 들어섰다. 1873년에는 일시 차입 구조를 벗어났다가 1883년까지 조금씩 累積借入(누적차입)을 늘려갔다. 그러다가 그림에서 보듯이 1884년 이후 가파르게 누적 차입이 증대하기 시작하여 1892년에는 66만 량의 거액에 달하였다. 동기간 민비(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민씨 일족의 집권은 확고하였다. 借入先(차입선)이 어딘지, 정부재정인지 市中(시중)의 商人(상인)인지는 회계책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의 정부재정이 매우 困乏(곤핍)했음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명례궁은 1884년 이후 급속하게 지출규모를 팽창시키면서 당오전의 내하로 그 상당 부분을 충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래도 부족한 수입을 시중 상인들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하였던 것이다.(*6)

그 위기의 시대에 민비(명성황후)는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나 過濫(과람)하게 명례궁의 재정을 확장하였던가. <표2>에 보듯이 1893년 명례궁은 354만 량 이상의 食料費(식료비)를 지출하였다. 총지출에서 식료비의 비중이 79.6%에 달하였다. 식료비가 그렇게 크게 늘어난 것은 무척 잦아진 告祀(고사)ㆍ茶禮(차례)와 宴會(연회) 때문이었다. 차하책에 의하면 1893년 한 해에 모두 29회의 고사와 다례가 행해졌다. 민비(명성황후)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궁중에 神堂(신당)을 짓고 巫堂(무당)과 중을 불러들여 고사와 다례를 행하였다. 모두 성리학의 나라가 오랫동안 祖宗之法(조종지법)으로 금지해 온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1893년 한 해에 도합 37회의 연회를 베풀었다. 왕의 誕日(탄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궁중의 後苑(후원)에서 임시로 내외의 賓客(빈객)을 맞아 왕실의 위엄과 은혜를 과시하기 위해 베푼 연회들이었다. 1894년 2월의 받자책의 한 구절은 220만 량의 거액을 내하하면서 ‘誕日熟設條(탄일숙설조)’라고 하였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풍족하게 열 용도라는 뜻이다. 연회가 끝나면 빈객들을 대상으로 한 ‘賜饌(사찬)’이 이루어졌다. 일본에서 수입한 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 褓(보)에 싸서 지게꾼에 지워 빈객들의 집으로 운반하였다. 아울러 소주방, 생물방, 생과방에 소속된 熟手(숙수)들에게 工錢(공전)이 풍성하게 베풀어졌다. <표2>에서 보듯이 식료비만이 아니라 공업비와 임료가 크게 증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893년의 차하책에서 고사ㆍ다례와 연회에 관련된 식재료, 공업비, 임료를 모두 합하니 당년의 총지출 444만 량의 절반을 넘는 247만 량이나 되었다.

민비(명성황후) 이전의 宮主(궁주)들이 이렇게 풍성한 연회를 베푼 적은 없었다. 大院君(대원군)의 통치와 개항 이후 몇 차례의 政變(정변)을 겪는 과정에서 왕실의 살림살이를 유교적 公의 명분으로 규제하던 정치세력들이 모두 소거되고 말았다. 그 나머지 왕실은 1884년 이후 千年王國(천년왕국)의 宴樂(연락)을 누렸다. 지극히 공적으로 취급되어 온 銅錢(동전)을 남발하여 연회로 낭비하는 일은 18세기의 근엄했던 朝廷(조정)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7) 그 좋았던 시절이 1894년의 淸日戰爭(청일전쟁)으로 끝이 났다. 왕실을 비호하던 淸帝國(청제국)이 조선에서 물러났다. 일본의 지원으로 성립한 內閣(내각)은 왕실을 立憲君主制(립헌군주제)의 굴레로 묶으려는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시련의 계절이 왕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2.구래의 궁방재정 (2)1855-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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