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5. 典圜局(전환국)의 운영 실태

대한제국기에 전환국은 총 1,803만여 元의 화폐를 鑄造(주조)하였다(甲賀宣政 1914: 37). 중앙은행이 부재했던 그 시대에 전환국이 주조한 화폐는 어떠한 경로를 거쳐 市中(시중)의 通貨(통화)로 발행되었던가. 전환국의 운영 실태에 관해서는 奎章閣(규장각), 서울대도서관,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에 고작 몇 건의 문서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규장각의 「典圜局文書(전환국문서)」(經古349.1 H193jb)는 1900년 7월 15일부터 9월 6일까지 전환국의 管理(관리) 沈相薰(심상훈)이 인천전환국 技師(기사) 韓旭(한욱)에 내린 27건의 훈령을 綴(철)한 것이다. 대부분의 훈령은 황제의 啓單(계단)에 근거하여 무슨 용도로 얼마의 銅貨(동화)를 즉시 出給(출급)하라는 내용이다. 예컨대 7월 15일의 훈령을 소개하면 황제의 萬壽聖節(만수성절)을 맞아 進饌費(진찬비) 1만 元을 상납하기 위한 용도로 계단을 첨부하여 훈령을 내리니 도착 즉시 동 금액을 올려 보내되 巡檢(순검)으로 하여금 호송케 하라고 하였다. 그 밖에는 皇子(황자) 義和君(의화군)에 대한 증여, 漢城電氣會社(한성전기회사)의 보스윅(Borswick)에 대한 지불, 郵船會社(우선회사)에 대한 지급, 전환국이 雇聘(고빙)한 日本人(일본인)들에 대한 賞與(상여) 등의 용도이다. 이처럼 전환국의 주조 화폐는 전환국의 管理(관리)가 황제의 명령을 받아 황제가 지정한 곳으로 現送(현송)하는 방식으로 발행되었다. 지정된 용도와 현송처는 거의 대부분 황실의 소비나 사업과 관련된 것이었다.

서울대도서관의 「典圜局文書(전환국문서)」(經332.4951 T128j)는 1904년 전환국의 管理署理(관리서리) 崔錫肇(최석조)가 매 월말에 그 달에 주조한 銅貨(동화)를 황제에게 ‘捧上(봉상)’한 내용이다. 이 문서가 전하고 있는 동년의 주조 총액은 3,500,455원이다.(*11) 이후 1914년 전환국의 甲賀宣政이 밝힌 동년의 주조 총액은 3,462,635원이다(甲賀宣政 1914: 37). 두 금액이 거의 일치하는 것을 보아 ‘봉상’의 실제 의미는 주조액에 대한 보고였다고 보인다. 동 문서를 작성한 최석조는 별도의 곳에서 “1902년 典圜局(전환국)의 주조 총액 280만 元 가운데 150만 원이 帝室用(제실용)으로 別庫(별고)에 따로 보관되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12) 이로부터 당시 황제는 주조액에 관한 전환국의 보고를 받은 다음, 그 중의 얼마를 자신의 창고로 옮기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황제의 처분을 위한 기초 자료로서 작성된 보고서가 위의 서울대도서관 문서라고 생각한다.

이 문서는 명례궁에 내려진 황제의 內下金(내하금)이 전환국에서 직접 실려 온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음에 큰 의의가 있다. 명례궁의 받자책에 의하면 황제는 1904년 7월 1,042,015원을 명례궁에 내하하였다.(*13) 그런데 위 문서에서 최석조가 보고한 동년 6월과 7월의 주조액이 1,058,316원이다. 두 금액이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같은 돈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황제는 전환국의 보고에 기초하여 동년 6월과 7월에 주조된 銅貨(동화) 전량을 명례궁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문서는 전환국의 활동이 동화의 주조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년 5월 전환국은 동화 이외에 222,229圓의 紙幣(지폐)를 봉상하였는데, 官蔘(관삼)을 放賣(방매)한 금액 중에서 나중에 ‘還淸(환청)’할 조건으로 ‘貸用(대용)’한 것이라 하였다. 1904년 3월 이후 관삼은 三井會社(미츠이회사)에 의해 위탁 판매되었는데(李潤相 1996a: 173), 지폐 22만여 원을 ‘대용’한 곳은 거기였을 것이다. 이 같은 일은 1900년의 규장각 문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동 8월 16일자 훈령은 지폐의 쓰임새가 浩大(호대)하므로 미리 동화로 3만 元의 지폐를 바꾸어 두라고 전환국에 명하였다. 다시 말해 전환국은 황제가 필요로 하는 화폐를 종류에 맞추어 공급하는 곳이었다. 전환국의 銅貨(동화) 주조도 어디까지나 황제 개인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의 문서를 소개한다. 동 위원회가 寫眞(사진)으로 소장하고 있는 이 자료는 4점의 문서를 철한 것인데, 그 중의 3점이 전환국과 관련된 것이다. 작성자는 內藏院卿(내장원경)이자 典圜局(전환국)長인 李容翊(이용익)이다. 황제의 心腹(심복)이었던 이용익이 전환국에 보관 중인 화폐의 액수와 用處(용처)를 황제에게 보고한 것이 그 내용이다. 3점을 차례로 간략히 소개한다. 1900년 3월의 제1 문서는 지난 2월말 전환국의 時在가 81만 元인데, 그 중의 12만 원을 금년의 松都(송도) 蔘圃(삼포)의 間賣條로 內藏院(내장원)에 지급하였으며, 나머지 69만 원은 전환국이 銀貨(은화)를 주조할 용도로 보관 중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작년의 官蔘(관삼) 買入(매입)에 든 50만 원의 출처는 모두 전환국에서 찍은 돈이며, 함경도산 麻布(마포) 85同을 구매하여 某人(모인)에게 맡겨 두었으며, 지금 蔘 가격이 떨어질 위험이 있으니 조속히 처분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보고하고 있다. 1900년 7월의 제2 문서는 전환국의 시재를 간략히 보고한 내용인데 소개를 생략한다. 제3의 문서는 시기가 불명한데, 60만 兩(양)으로 쌀을 사서 京鄕(경향) 각처에 맡겨 두었다는 것과, 158만 량은 殖利(식리)의 목적으로 7처에 分散(분산)하였는데 當日(당일)이라도 회수가 가능하다는 것과, 이 식리전을 포함하여 현 시재는 178만여 량이라는 것 등이 그 내용이다.

이처럼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황제의 대리인 이용익이 전환국의 주조 화폐를 관삼, 마포, 미곡 등을 구입하고 판매하는 상업자금으로 활용하였으며 나아가 高利貸(고리대) 자금으로까지 투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용익은 전환국이 찍어내는 화폐를 자본금으로 했던 대한제국 최대의 상인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를 忠犬(충견)으로 거느렸던 고종 황제 자신이 최대의 상인이었으며, 전환국은 그의 더 없이 훌륭한 資金源(자금원)이자 私金庫(사금고)였다.

후일 전환국의 事務長(사무장)이었던 三上豊은 “전환국은 국왕의 전환국, 화폐도 국왕의 화폐라 해도 좋은 까닭에 주조하는 것도 사용하는 것도 모두 국왕의 생각대로였다”고 회고하였다(三上豊 1932: 175-6). 이상과 같은 몇 건의 단편적인 문서가 전하는 전환국의 운영 실태는 三上豊의 회고가 일본인의 편견만은 아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惡貨(악화)가 남발됨에 따라 물가가 등귀하고 韓貨(한화)의 가치가 하락하는 등의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가 그에 조금도 구애되지 않았던 것은 전환국과 거기서 주조된 화폐가 어디까지 황제 개인의 재산이었고 그의 지불을 기다리는 황실의 살림살이는 너무나 浩大(호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급박한 內外情勢(내외정세)는 그 같은 황제의 放縱(방종)을 언제까지 放置(방치)하지는 않았다. 전환국의 백동화 남발은 시중의 여론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1903년 하반기 이래 조정의 원로들은 이용익을 거듭 탄핵하였다. 동년 12월 결국 이용익은 내장원경과 전환국장에서 면직되었다. 곧이어 露日戰爭(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백동화의 남발로 피해를 본 일본상인들은 일본군이 전환국을 차압하고 폐쇄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그 동안 이용익이 관리해 온 전환국의 화폐, 곧 황제의 자산은 모두 內藏院(내장원)으로 이관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三上豊은 1904년 2월(양력) 전쟁 발발 후 백동화 134만 원, 은화 90만 원, 金地(금지) 얼마가 내장원의 창고로 옮겨졌다고 회고하였다(三上豊 1932: 152-3). 실제 내장원의 회계책을 보면 1904년 1월(음력)에 백동화 1,499,750원, 적동화 12,000원, 은화 915,000원이 새롭게 수입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金地(금지)는 동년 8월에 되어서야 기재되는데, 927兩重(냥쭝)이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동년 8월 대한제국에 제2차 韓日協約(한일협약)을 강요하여 財政顧問(재정고문)을 파견하였다. 서울대도서관의 문서에 의하면 전환국은 동년 10월부터 주조 활동을 중단하였다. 대한제국의 재정을 감독하기 시작한 日帝(일제)의 작용이었다. 같은 작용이 내장원의 회계책에서도 관찰된다. 동년 8월 1903년의 官蔘(관삼) 販賣價(판매가) 중에서 三井會社(미츠이회사)로부터 찾아온 것이라 하면서 334,000원의 지폐가 수입으로 계상되었다. 11월에는 함경도산 마포 132동이 수입으로 잡혔다. 그 동안 이용익이 관리한, 어딘가에 맡겨져 있던 황제의 재산이 내장원의 공식 회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내장원의 연간 수입은 1903년의 589만 兩(양)에서 1904년에 3,004만 량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렇게 된 것은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李容翊(이용익)이 관리해 온 황제의 자산이 1904년의 정치정세에 규정되어 내장원의 재정으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내장원의 재정은 빈약하였으며, 1904년에 돌출적으로 비대해진 것은 황제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요컨대 대한제국기 皇室財政(황실재정)의 중심은 典圜局(전환국)에 있었다. 전환국이 주조한 1,803만 원의 화폐 가운데 상당 부분은 明禮宮(명례궁)을 비롯한 궁방으로 現送(현송)되어 황실의 생활비와 의례비로 지출되었다. 1897-1904년간 명례궁으로 옮겨진 것만도 345만 원이 넘었다. 전 궁방에 분배된 것을 합하면 1,803만 원의 적어도 절반은 되었을 터이다. 황제는 나머지 돈을 상업자금이나 고리대자금으로 활용하였다. 그에 따른 수익이 얼마였는지는 추측하기 힘들다. 어쨌든 1903년 12월 그의 심복 이용익이 殘高(잔고)로 관리한 황제의 자산은 242만여 원에 달하였다.(*14)이로부터 황제가 궁방 이외의 곳에 지급한 돈이 대략 600-700만 원은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돈이 생산적으로 殖産興業(식산흥업)이나 軍備擴充(군비확충)의 용도에 투자되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러했다면 무언가 흔적이라도 남아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三上豊에 의하면 1903년 10월 황제의 卽位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는 도합 900만 원이 드는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였다(三上豊 1932: 131). 그런 비생산적인 용도에 황제가 주조하거나 번 돈의 대부분이 蕩盡(탕진)되었을 것임은 황실재정에 관한 이상의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되고 남는 바라고 하겠다.
출처 : 大韓帝國期 皇室財政의 기초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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