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4.內藏院(내장원) 재정과의 관계

대한제국의 황제는 그의 전제권력이 성립하는 1899년을 전후하여 정부재정에 속한 여러 公的財源(공적재원)을 궁내부 산하의 內藏院(내장원)으로 편입시켰다. 예컨대 1898년 내장원은 紅蔘專賣(홍삼전매)를 실시하고 蔘稅(삼세)를 징수하였다. 鑛稅(광세)도 내장원에 속하게 되었다. 1899년에는 구래의 衙門屯土(아문둔토)와 牧場土(목장토)가, 1900년에는 구래의 驛土(역토)가 내장원으로 이관되었다. 1901년에는 漁稅(어세)와 鹽稅(염세)가 내장원으로 넘어갔다. 그 외에 내장원은 沿江稅나 庖肆稅(포사세)와 같은 여러 명목의 잡세를 신설하거나 增徵(증징)하였다. 그 결과 내장원 재정이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內藏院會計冊(내장원내장원회계책)』에 따르면, 1897-1900년 내장원의 연평균 수입은 20만 兩(양)에 불과하였는데, 1901-1902년에 200만 량, 1903년에 589만 량, 1904년에 3,004만 량으로 증가하였다(李潤相 1996a: 161-2). 특히 1904년의 급속한 팽창이 인상적이다. 그 결과 1903-1904년 내장원의 수입은 공적인 정부재정 수입의 43-69%에나 달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金載昊 1997: 118).

기존의 연구는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대한제국기 황실재정 가운데 내장원 재정이 가장 큰 비중을 점했던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렇지만 이제 그 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내장원의 수입과 지출을 일일이 기록한 위의 회계책에서 쓰이는 화폐의 단위는 구 常平通寶(상평통보)의 兩(양)이다. 그 이유는 대개 다음과 같았다고 여겨진다. 갑오경장에 의해 新貨幣(신화페)가 발행되었지만, 그 유통 범위는 전국적이지 않았다. 신화폐 白銅貨(백동화)는 주로 서울, 경기, 황해, 평안에서 유통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구 상평통보가 지배적 통화를 이루었다. 내장원은 상평통보 지역에 대해서도 각종 세를 수취하였기 때문에 수입의 상당 부분은 상평통보의 형태였다. 회계책에 의하면 내장원은 1903년까지 錢(전), 銀貨(은화), 紙幣(지폐), 木(나무), 布(천)를 수입과 지출의 수단으로 하였다. 전은 상평통보, 은화는 신화폐의 本位貨(본위화)(1元), 지폐는 일본 第一銀行券(제일은행권)을 말하였다. 여기에 빠진 신화폐 白銅貨(백동화)와 赤銅貨(적동화)가 내장원에서 쓰이는 것은 후술하듯이 1904년부터인데, 그것도 그리 큰 비중은 아니었다. 내장원이 끝까지 상평통보를 會計單位(회계단위)로 삼은 이유를 당장에 다 밝히기는 힘들지만, 역시 총수입 가운데 그것의 비중이 컸고, 황실재정의 여러 기구 가운데 舊貨幣(구화폐)를 취급하는 곳이 하나 정도는 있을 필요가 있었다는 점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었다고 보인다.

대한제국에서의 현금 환전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콜리어스(Collier's)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
150달러를 환전하고 엄청난 엽전더미 앞에서 기념촬영

요컨대 내장원은 명례궁이 1895년부터 신화폐를 재정수단으로 채택했음과 대조적으로 1906년까지 구화폐를 고집하였다. 단순히 會計單位(회계단위)로만 구화폐가 활용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 현물로서 구화폐가 수입되고 지출되었다. 회계책에 의하면 1903년 1월 ‘常平錢(상평전)’ 5,000량을, 2월에도 ‘상평전’ 6,519량을 인천에서 운반해 왔다. 내장원은 錢(전)을 보관하기 위해 1903년 6회에 걸쳐 2,800坐(좌)의 ‘錢櫃(전궤)’를 제작하거나 宣惠廳(선혜청)에서 빌려 왔다.10) 전을 封裹(봉과)하기 위한 613斤의 종이가 11회에 걸쳐 구입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 내장원은 1903년 6회에 걸쳐 ‘상평전’ 5,600량을 황제에 內入(내입)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모두 내장원 재정에서 구화폐가 현물로 쓰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명례궁과 내장원의 재정규모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내장원의 兩(양) 단위 수입액 또는 지출액을 1/5로 切下(절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식으로 앞서 소개한 내장원의 수입액과 [그림4]에 제시된 명례궁의 수입액을 비교한 결과, 1896-1900년 내장원의 수입 규모는 명례궁의 2-3%에 불과하였다. 1901-1903년은 17-26%이다. 수입이 3,004만 량으로 급팽창한 1904년은 명례궁의 3.2배이다. 요컨대 1903년까지 내장원 재정의 규모는 명례궁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명례궁 이외에 그보다 더 컸을 內需司(내수사)나 비슷한 규모의 壽進宮(수진궁)ㆍ龍洞宮(용동궁)과 같은 궁방들이 있었다. 이에 1904년조차도 그 수가 15에 달하는 궁방들의 총수입은 내장원을 초과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중심은 내장원이었다는 종래의 이해는 이제 수정될 필요가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 대한제국기 명례궁의 재정을 뒷받침한 內下(내하)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살피도록 하자. 내장원이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내장원이 취급한 화폐가 상평통보로서 명례궁이 사용한 백동화가 아니었을 뿐더러, 그 재정규모가 1903년까지 명례궁의 26% 이하여서 명례궁 수입의 80-90%를 차지한 내하를 공급할 능력이 전혀 못되었기 때문이다. 수입이 명례궁보다 3.2배 많아진 1904년의 경우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동년 내장원이 황제에게 ‘內入(내입)’한 금액은 1,031만 량, 곧 260만 원이었다(李潤相 1996a: 195). 그 중의 146만여 원이 명례궁으로 지급된 내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명례궁의 차하책이 제공하는 몇 가지 정보는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1904년 명례궁은 134만 4,100원의 내하금을 ‘推來(추래)’하는 데 6,720元 50錢(전)의 운반비를 지출하였다. 1원당 운반비는 0.5錢(전)이다. 이 운반비는 1901년 이래 변함이 없었다. 다시 말해 명례궁으로의 내하금은 1901년 이래 동일한 장소에서 출발하였다. 참고로 1899년의 1원당 운반비를 조사하면 10배나 많은 5전이다. 그 때는 훨씬 먼 곳에서 내하금이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제 仁川에 있던 典圜局(전환국)이 1900년 漢城府(한성부)의 龍山(용산)으로 옮겨온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운반비가 1/10로 싸진 것을 그 이외의 다른 것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904년 명례궁에 들어온 대량의 내하금은 그 출발지가 1901년 이래의 龍山典圜局(용산전환국)이었다. 巡檢(순검)의 호위를 받으면서 지게꾼들이 白銅貨(백동화)의 櫃(궤)를 운반하는 행렬을 상상해보라. 그것만큼 대한제국의 실체를 잘 드러내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출처 : 大韓帝國期 皇室財政의 기초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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