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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3.甲午更張(갑오경장)의 충격과 회복

명례궁 재정은 1894-1895년의 甲午更張(갑오경장)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우선 無土(무토) 궁방전이 폐지되었다. 갑오경장은 宮房田(궁방전)과 衙門屯土(아문둔토)에 부여해 온 免稅(면세)의 특권을 폐지하였다(甲午陞總/갑오승총). 그에 따라 民有地(민유지)로서 해당 結稅(결세)를 궁방에 상납하던 무토 궁방전이 폐지되었다. 또한 무토가 폐지되는 과정에서 有土(유토)의 일부도 함께 폐지되었다. 유토 가운데는 무토와의 경계가 애매한 것들이 있었다. 사실상의 민유지로서 아주 낮은 수준의 賭地(도지)를 궁방에 바쳐 온 유토였다. 이런 부류의 유토를 갑오경장 당시에 第2種有土(제2종유토)라 하였다(李榮薰 1988: 135-6). 실은 갑오경장 이전에 이미 12처의 제2종유토가 명례궁의 수취 대상에서 이탈하였다. 18세기말 이래의 일이었다. 그 같은 추세의 연장에서 갑오경장으로 무토가 폐지되자 13처의 제2종유토가 더불어 폐지되었다. 전술하였듯이 18세기말 명례궁의 유토는 전국적으로 41처에 분포하였다. 그러했던 유토가 갑오경장 이후는 22처에 불과하게 되었다.(*8) 궁방전의 수입원으로서의 가치는 현저히 감소하였다.

갑오경장이 명례궁 재정에 가한 가장 심각한 타격은 當五錢(당오전)의 폐지였다. 그에 따라 1892 -1893년 총수입의 88.2%나 차지했던 王室(왕실)로부터의 內下(내하)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895년에는 궁주인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乙未事變/을미사변). 명례궁은 가장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를 상실하였다.

갑오경장으로 성립한 내각은 日本貨幣(일본화폐)와 동일 稱量(칭량)의 新式貨幣(신식화폐)를 발행하였다. 신식화폐 1元은 舊 常平通寶(구 상평통보) 5兩(양)에 해당하였다. 명례궁의 차하책은 1895년 정월부터 지출 수단을 구 상평통보에서 신식화폐 白銅貨(백동화)로 바꾸었다. 그 때부터 제반 물가가 일률적으로 1/5로 切下(절하)되었다. 그런데 화폐의 단위만큼은 이후에도 여전히 구래의 兩(양)을 고집하고 있었다. 명례궁의 받자책은 1895년 8월까지 구 상평통보로 수입을 기재하다가 이후 신식화폐로 바꾸었다. 여기서도 화폐의 단위는 여전히 구래의 兩(양)으로 표기되었다.

[그림4] 1894-1904년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의 추이이다. 1894년의 수입과 지출은 구 화폐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비교의 편의를 위해 1/5로 절하하였다. 동기간 화폐의 단위는 받자책과 차하책에서 여전히 兩(양)이었지만 독자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元으로 표기하였다.

[그림4]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 1894-1904  (단위: 元)

황실재정_그림4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明禮宮上下冊 (명례궁상하책)』
(奎章閣圖書 19003-4, 41, 40, 39, 38, 37, 36, 35, 34, 33, 32)
(奎章閣圖書 19001-68, 73, 67, 57, 6, 64, 16, 61, 63, 9, 74)

명례궁의 수입은 갑오경장의 충격을 받아 1894년 69만여 元에서 1896년까지 10만여 원으로 크게 줄었다. 이후 1897년 大韓帝國(대한제국)의 성립을 맞아 1899년까지 48만여 원으로 회복되었으며 그 수준에서 1902년까지 정체하였다. 연후 1903-1904년에 148만여 원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이 같은 각 연도의 수입에 있어서 80% 또는 90% 이상은 內下(내하)였다. 1903년에 수입이 크게 증가한 것은 내하가 전년의 33만여 원에서 127만여 원으로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받자책은 그 중의 100만 원에 대해 ‘未下條(미하조)’라고 용도를 밝혔다. 즉 각종 재화를 구입하고서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들을 상환할 목적이었다. 실제로 그림에서 보듯이 1894년 이후 지출은 언제나 수입을 초과하였다. 명례궁 재정은 1894년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변함없이 借入(차입)에 의해 꾸려졌다. 그것을 상환하기 위해 1903, 1904년에 대량의 내하가 이루어져 흑자재정으로 돌아섰지만, 누적되어 온 차입이 얼마나 상환되었는지는 의문이다. 1903년의 흑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뿐 아니라 1904년에는 지출이 증가하여 거의 收支(수지)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표3>명례궁의 수입 내역과 지출 용도: 1903-1904  (단위: 元)

황실재정_표3

자료 : 『明禮宮捧上冊 (명례궁봉상책)』 (奎章閣圖書 19003-33, 32),
『明禮宮上下冊 (명례궁상하책)』 (奎章閣圖書 19001-9)

1903-1904년의 수지 상황을 보다 자세히 제시하면 <표3>과 같다. 兩(양)年의 평균 수입 151만여 원은 거의 대부분 내하로 이루어졌다. 내하의 비중이 무려 96.3%나 되었다. 2.0%의 供上은 宮內府(궁내부)로부터의 지급을 말하는데, 갑오승총으로 폐지된 무토의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 1897년부터 행해진 지급과 역대 국왕의 肖像(초상)을 모신 眞殿(진전)에서의 享需(향수)를 충당하기 위한 지급 등을 말한다. 宮房田(궁방전)은 전술한대로 수입원으로서의 가치를 잃어 그 비중이 1.6%에 불과하였다.

1903년의 지출 용도를 보면 食料費(식료비)가 77.7%의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그 점에서 1893년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 원인을 살피면 景孝殿(경효전)에서 행해진 78회의 上食(상식)과 茶禮(차례)가 가장 중요하였다. 경효전은 1895년에 시해된 閔妃(민비/명성황후)의 魂殿(혼전)이다. 민비(명성황후)는 1893년에는 살아 있는 궁주로서 번다한 고사와 연회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1903년에는 죽은 궁주로서 번다한 상식과 다례를 받아먹었다. 그 외에 1903년 한 해에 황제에게 進御床(진어상)이 28회나 바쳐졌다. 그 중의 9회에는 賜饌床(사찬상)까지 베풀어졌다. 1902년 나이 50에 耆老所(기로소)에 들어 노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황제는 尊體(존체)를 보전하기 위해 수시로 그의 내탕으로 하여금 珍羞盛饌(진수성찬)의 床(상)을 올리게 하였다. 게다가 1903년은 그의 즉위 40주년이었다. 정부는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였으며, 명례궁도 그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였다. 식재료에 이어 인건비가 16.6%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명례궁에 속한 궁속들이 110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5] 명례궁의 실질 수입과 지출: 1894-1904  (단위: 元)

황실재정_그림5

자료: [그림4]와 동일.

주지하듯이 대한제국기에 典圜局(전환국)이 다량의 백동화를 발행하여 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다. 차하책이 전하는 각종 재화의 가격은 1894-1904년에 평균 3.4배나 상승하였다. 동기간의 연도별 物價指數(물가지수)를 작성하여(*9) 각 연도의 실질 수입과 지출을 제시하면 [그림5]와 같다. 여기서 보듯이 1904년의 실질 수입과 지출은 1894년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요컨대 명례궁 재정은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살아 활동한 1893-1894년이 絶頂期(절정기)였다. 갑오경장과 을미사변으로 명례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에도 왕실의 내하가 이루어졌고 그 금액이 1903 -1904년에는 145만여 원의 거액에 달했지만 재정의 실질규모는 절정기의 절반에 불과하였다. 그 사이 公的規範(공적규범)에서 이탈한 황실의 살림살이가 虛禮(허례)와 浪費(낭비)의 극을 달렸다는 점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當五錢(당오전)에 이어 그 허례와 낭비를 지탱한 내하의 출처는 어디였던가.
출처 : 大韓帝國期 皇室財政의 기초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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