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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2.구래의 궁방재정 (1) 1793-1852년

明禮宮(명례궁)은 왕실의 中宮殿에 속한 內帑으로서 궁중의 內燒廚房(주방)과 外燒廚房(주방)에 각종 食材料(식재료)를 공급함을 주요 기능으로 하는 궁방이었다. 소재지는 漢城府(한성부) 城內의 中部 皇華坊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壬辰倭亂 당시 義州에서 돌아온 宣祖가 머물렀던 慶運宮이 있었다. 이후 光海君이 昌德宮을 신축하여 이거하자 경운궁은 仁穆大妃의 거소가 되었다. 명례궁은 1623년경 인목대비의 내탕으로서 경운궁의 일부 시설로 설치되었다고 보인다.(*3) 이후 19세기말까지 명례궁은 주로 중궁전의 내탕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후일 1897년 俄館으로 播遷했던 高宗(고종) 황제가 景福宮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으로 이거하여 宮域을 확충하자 명례궁은 그 북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명례궁은 자신의 수입과 지출에 관해 세밀한 기록을 남겼는데, 현재 奎章閣(규장각)에 1792- 1906년의 것이 전하고 있다. 『明禮宮捧上冊(명례궁봉상책)』은 매년 월별로 수입의 物目과 數量를 기록하고 집계한 장부이다. 『明禮宮上下冊(명례궁상하책)』은 같은 형식으로 기재된 지출에 관한 장부이다. 『明禮宮會計冊(명례궁회계책)』이란 장부도 전하는데, 명례궁의 창고에 보관된 각종 물목의 時在를 半年마다 조사한 자료이다. 이들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동기간 명례궁 재정의 구조와 추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다음의 <표1>은 받자책[捧上冊]에서 1793-1794년, 1853-1854년, 1892-1893년의 연평균 수입규모와 수입원을 조사한 것이다. 2개년의 연평균을 구한 것은 풍흉에 따른 생산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이다. 수입은 錢(전), 米, 豆, 木, 布 등 약 20여 종의 물목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을 모두 兩(양) 단위의 錢(전)으로 환산하여 통합하였다. 환산에 필요한 각 물목의 전 표시 가격은 모두 받자책과 차하책[上下冊]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4)

1793-1794년 명례궁의 수입원은 크게 供上, 內下(내하), 奴貢, 宮房田(궁방전), 其他의 다섯 가지로 이루어졌다. 공상은 戶曹, 宣惠廳(선혜청), 均役廳과 같은 정부의 재정기관이 왕실을 받든다는 취지에서 행한 다양한 명분의 정기적 상납을 말한다. 內下(내하)는 왕이나 왕비가 궁방의 모자라는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下賜한 것을 말한다. 奴貢은 1793년 당시 전국 32개 군현에 분포한 127구의 奴로부터 수취한 身貢 수입을 말한다. 婢貢은 이미 1774년에 폐지되고 노공만 남았는데, 그것마저 1801년에 폐지되었다. 宮房田(궁방전)은 명례궁에 속한 有土(유토), 無土(무토), 柴場, 草坪 등 토지로부터의 수입을 말한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왕실의 주요 수입원은 전국에 분포한 수만 구의 노비들이었다(宋洙煥 2000: 404-5). 17세기 이후 奴婢制가 쇠퇴하자 왕실은 대체 수입원으로서 전국 각처에 궁방전을 마련하였다. 유토는 궁방의 소유지를 말하며 지대로서 賭地(도지)가 수취되었다. 유토 궁방전이 확대되자 관료들은 “王者는 私藏을 가질 수 없다”는 儒敎的(유교적) 公(공)의 名分(명분)을 내세워 그를 견제하였다. 이에 17세기말 유토의 증설은 중단되었으며, 그 대신 토지의 소유권이 아니라 結稅(결세)만을 궁방에 이속하는 무토라는 궁방전이 생겨났다(李榮薰 1988: 139-87). 1793-1794년 당시 명례궁은 전국적으로 41처의 유토, 17처의 무토, 4처의 시장, 2처의 초평을 보유하였다. 마지막으로 其他는 명례궁에 속한 願刹로부터의 진상, 명례궁에 속한 洑ㆍ漁箭ㆍ主人 등으로부터의 수입, 다른 기관이나 인물로부터의 부정기적인 移轉, 다른 기관에 대여했다가 환수한 미곡 등을 묶은 것이다.

<표1>明禮宮(명례궁)의 연평균 收入規模와 收入源의 推移  단위: 兩(양)

황실재정_표1

자료:『明禮宮捧上冊(명례궁봉상책)』(奎章閣(규장각)圖書 19003-91, 92, 55, 54, 6, 5)

1793-1794년 명례궁의 가장 큰 수입원은 궁방전으로서 46.4%의 비중이었다. 그 다음이 정부의 공상으로서 43.4%였다. 이렇게 왕실은 정부의 공상만으로 생활하지 못하고(않고) 私藏으로서 노비와 토지를 보유하였는데, 그로부터의 수입이 정부의 공상보다 컸다. 조선왕조의 왕실은 정부 위에 놓인 초월적 권위의 공적 존재만은 아니었으며, 자신의 노비와 토지 재산을 두고 民 또는 정부와 이해관계의 대립을 보인 사적 존재이기도 했다. 왕실재정의 공적 성격과 사적 성격은 조선왕조의 이념적 토대인 유교적 공의 명분에 규제되어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다. 궁방전 수입과 정부 공상이 비슷한 비중을 이루었던 18세기말 왕실재정의 실태로부터 조선왕조 왕실의 그 같은 역사적 특질을 읽을 수 있다.

수입규모는 이후 1853-1854년까지 19,697량에서 32,954량으로 67%나 증가하였다. 동기간 각종 물목의 가격에는 변함이 없었다. 실제의 市場(시장)價格은 약간 상승하였지만, 그 폭이 크지 않아 명례궁은 동기간 동일 가격으로 재정을 운영하였다. 다시 말해 67%나 수입규모의 실질적인 증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방전 수입의 비중은 9,145량에서 8,742량으로 감소하였다. 그렇게 된 것은 유토 궁방전에서의 농업생산이 증진되지 못하여 賭地(도지) 수입이 정체하거나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한반도의 중ㆍ남부에서 널리 관찰되는 水稻作 생산성의 정체 내지 쇠퇴 현상이(이영훈ㆍ박이택 2004: 261-2, 李榮薰 2007: 270-3) 명례궁의 궁방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궁방전을 대신하여 수입규모의 증가를 이끈 것은 정부의 공상과 왕실의 내하였다. 호조와 선혜청은 1819년 정월부터 매월 150량씩, 도합 300량을 새롭게 공상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 몇 가지 새로운 공상이 행해져 공상의 비중은 43.4%에서 52.0%로 늘어났다. 왕실의 내하도 5.1%에서 9.1%로 늘었다. 3.7%에서 12.4%로 크게 늘어난 其他의 대부분도 실은 왕실의 내하였다고 보인다. 그 속에 典洞宅이 해마다 4,000량씩 명례궁에 이전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전동댁의 실체는 알 수 없는데, 왕실의 일부이거나 왕족이었다고 보인다. 이를 내하에 포함시키면 그 비중이 20%로 늘어난다.

동기간 정부의 공상과 왕실의 내하가 늘어난 것은 지출의 증가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의 <표2>는 차하책에서 1793, 1853, 1893년의 연간 지출규모를 食料費(식료비), 資材費, 工業費, 賃料(임료), 其他의 용도로 분류하여 조사한 것이다. 年年의 지출은 수입과 달리 비탄력적이어서 2년간의 평균을 취하지 않았다. 식료비는 궁중에서 각종 음식을 만드는 內ㆍ外燒廚房(주방), 生果房, 生物房 등에 들어가는 다양한 재료의 지출이나 구입비를 말한다. 명례궁의 노비들이 시중에서 구입을 대행한 ‘貿易價’의 경우 그 구체적인 내역을 알 수 없지만, 모두 식료비에 포함시켰다. 자재비는 柴木ㆍ炭과 같은 燃料費, 궁중의 內人들을 위한 被服費, 주방에 쓰이는 각종 布木類와 紙類의 비용, 종이ㆍ붓과 같은 사무용품비, 燈油ㆍ柴油와 같은 照明費 등을 말한다. 공업비는 궁중 안에서 이루어지는 染色ㆍ薰造ㆍ沈醬ㆍ園藝ㆍ馬飼育의 비용과 각종 器物ㆍ器皿의 구입 내지 수선비를 말한다. 임료는 명례궁에 속한 內人ㆍ次知ㆍ掌務ㆍ奴ㆍ婢ㆍ庫直ㆍ冶匠 등 제반 궁속에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보수, 지게군의 雇價를 비롯한 각종 운반비, 내ㆍ외소주방에 속한 熟手(숙수)의 工錢(공전), 궁속들의 여행비, 왕실의 왕족ㆍ나인ㆍ내관ㆍ守宮ㆍ원찰에 대한 증여 등을 포함한다.

<표2>명례궁의 支出規模와 用途의 추이  단위: 兩(양)

황실재정_표2

자료:『明禮宮上下冊(명례궁상하책)』(奎章閣(규장각)圖書 19001-4, 15, 8)

1793년의 지출은 17,559량으로서 1793-1794년의 평균 수입 19,697량보다 적었다. 18세기말 명례궁 재정은 黑字(흑자) 기조였다. 반면 1853년의 지출은 38,208량으로서 1853-1854년의 평균 수입 32,954량을 초과하였다. 당초의 흑자 기조가 언제부터인가 적자 기조로 돌아섰다. 그렇게 된 것은 표에서 보듯이 1793년에 비해 식료비와 임료의 지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임료가 3배나 크게 증가하였다. 차하책에 의하면 명례궁의 궁속은 1797년 63명에서 1834년 77명으로 증가하였다. 궁속의 수가 늘어난 것은 궁중에서 전개된 왕실의 일상생활이 보다 번거로워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식료비의 증가가 말하듯이 궁중에서의 宴會(연회)와 祭祀가 보다 빈번해지고 규모가 커졌다. 궁중에서 영위된 각종 공업의 비용이 4배나 증가한 것도 왕실의 살림살이가 커졌음을 대변하고 있다.

[그림1] 명례궁 年末 時在의 추이: 1793-1853  (단위: 兩(양))

황실재정_그림1

자료:『明禮宮會計冊(명례궁회계책)』(奎章閣(규장각)圖書
19004-33, 27, 34, 95, 36, 24, 88, 32, 84, 18, 40, 12)

[그림1]은 『明禮宮會計冊(명례궁회계책)』에서 1793-1853년간 5년마다 연말 시재가 어떠했는지를 조사한 것이다(1823년 缺). 연말 시재의 물목은 50여 종 이상으로 다양하나 그 중 90% 이상을 차지하는 金, 銀(은), 錢(전), 米의 시재만을 錢(전)으로 환산, 통합한 것이다. 1793년 말 명례궁의 시재는 46,230량에 달할 정도로 풍족하였다. 쌀로 치면 7,705석에 달하는 규모이다. 18세기의 경제적 안정과 왕실재정의 儉素(검소)가 그 같은 대규모의 비축을 가능케 하였다.

이후 1809년까지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17,000량 전후로 급속히 감소하였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명례궁 자신의 赤字(적자) 累積(누적)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정부기관으로의 移轉 때문인지는 추후 별도로 조사될 필요가 있다. 이후 純祖 연간(1801-1833)에 걸쳐 명례궁의 연말 시재는, 해마다 기복이 있긴 하나, 13,000량을 전후하는 수준에 안정되었다. 명례궁의 시재가 다시 한 번 악화되는 것은 憲宗 연간(1834-1849)의 일이다. 그 결과 1848년 명례궁의 시재는 일시 558량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어쨌든 19세기에 들어 명례궁 재정은 왕실의 쓰임새가 커지면서 적자 기조에 빠졌으며, 그에 따라 18세기가 넘겨준 풍족한 在庫(재고)를 조금씩 消盡해 갔다.
출처 : 大韓帝國期 皇室財政의 기초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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