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명성황후 시해사건

 Category : 【 명성황후 明成皇后 】 Tag :
한국인들이 일본을 비난할 때 곧잘 인용하는 사건이 1894년 일본인들에 의해 민비가 살해된 사건이다. 이걸 을미사변이라고도 하고 최근에 정착된 공식적인 명칭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이 일을 가지고 한국의 우익들은 마치 민비가 지네 어미라도 되는 양 국모를 죽였다고 통분해하며 일본을 비난하는 것이다. 나라야 어찌되든 지네 목숨 부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일본에 붙었다 청나라에 붙었다 하면서 개혁을 가로막았던 미친 불여우 민비를 한국인들은 무슨 자주독립의 순교자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과의 합병에 의해 조선왕조가 무너진 사건을 망국이라고 표현하고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높여 부르며 고종이 최후로 강대국한테 빌붙어보려고 보냈던 밀사 이준을 열사라고 칭송하는 등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데에는 교육과 미디어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요즘에도 남한의 한 전국방송에서는 민비의 일대기를 그린 명성황후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데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인들은 왕족들에게 공감을 느끼고 마치 자신이 조선의 왕이나 왕비의 후손이라도 되는 듯 지배층의 입장에서 조선말기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맨날 왕자와 공주만 등장하는 만화 탓인지 젊은 것들은 너나할것없이 공주병 아니면 왕자병 증세가 있는 환자고, 전 국민의 100%가 본관을 가지고 족보를 가진 조선 양반집안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는 한국인. 족보는 대부분 상놈살이에 한이 맺혀 조선말기와 일제시대에 돈주고 사거나 조작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어쨌든 한국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의 절대 다수가 조선 사회에서 양반이 죽이면 그냥 맞아죽어야만 했던 하층민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하다.

민비의 본관은 여흥이고 성이야 당연히 민씨겠지. 경기도 여주에서 증조할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낸 굉장한 집안에서 태어나 세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빌빌대다가 9살 때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13살 어린 나이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에 의해 왕비에 간택되어 궁중으로 들어갔으나 마마보이에 파파보이였던 병신머저리 고종과는 스타일이 안 맞아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같이 섹스 할 기회가 없으니 당연히 애를 못 낳을 수밖에. 그러다 고종이 친하게 지내던 궁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나중에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 민씨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고종은 나이가 들면서 미인의 관점이 성숙해지자 민비에게 점차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 즈음 민비도 장안의 섹시 미남들을 불러다들여 은밀히 동서고금의 온갖 방중술을 익힌 덕분에 고종을 밤마다 뿅 가게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점차 고종의 애정을 독점하여, 1871년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원자(왕의 첫째부인이 아들을 부르는 명칭)를 낳았으나 그만 5일 만에 깨골락 죽어 버렸다. 나중에 이 사건이 흥선대원군이 가져다준 산삼 때문임을 알게 된 민비는 더욱 대원군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게 되었다.

1873년 일본에 이 기회에 조선을 먹어버리자는 정한론이 대두되어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 건축사업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민비는 대원군을 몰아내기 위해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한다. 그 결과 흥선대원군 일파의 반대 상소와 모든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도록 만들어 드디어 민씨의 외척정권이 수립되었다. 결국 대원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민비는 쇄국정책을 마감하고 1876년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경기도 충청도 지방을 전전하며 피신생활을 하던 중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전의 국상이 선포된 것을 알고 고종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한편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자 민비는 청나라 군대에게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도록 한 다음 민씨 정권을 재수립하였다. 이후 민비는 유랑생활 중 한층 업그레이드한 섹스 테크닉으로 고종을 뿅가게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대원군 일파에 대한 복수에 열중하고, 무당을 궁궐에 끌어들여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 치성한다는 명목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등 민씨 일족의 부패상은 극도에 달하였다. 1884년 일본과 결탁한 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갑신정변) 잠시 정권을 잃었으나 다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세력의 집요한 침투로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성립되고 1894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흥선대원군에 의해 본격적인 체제 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는 1894년 8월 2일 일본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 민비를 죽인 뒤 시체를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상이 간략한 민비의 일대기인데, 조선말 긴박한 시기에 정치의 전면에 나서 처음엔 일본에 붙었다가 나중엔 청나라에 붙었고 마지막엔 러시아에 붙는 등 주로 외세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고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악질반동 매국노임을 알 수 있다. 민비의 결정적인 악행은 권력을 유지하려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치부를 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혁에 극렬하게 저항했다는 것이다. 이런 년을 조용히 없애버린 일본의 처사는 나름대로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행동이었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말기 운요호 사건 이후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인 주인 없는 땅이었다. 사실상 조선의 보호국이던 청나라는 내우외환이 겹쳐 망해가고 있는 중이었고 조선의 지배층은 개항 이후에도 권력다툼에 여념이 없어 사실상 현대식 무기를 가진 군대는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이 시기 조선반도 점령에 실질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는 일본과 청, 러시아였다. 나머지 서구열강들은 교역과 세력확장을 위한 교두보와 경제적인 이권 정도를 탐했을 뿐 조선의 점령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청나라는 물론 전통적인 속국이었던 조선을 계속해서 영향력아래 두거나 이 기회에 아예 청나라 영토로 편입하기를 원하였고 러시아는 전 역사를 통해 숙원이었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남하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조선반도 점령에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반도를 원하던 이유는 임진왜란 때와 같았다. 그들에게는 대륙진출을 위해 조선반도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이 3 나라 가운데 일본이 가장 빠르게 발전해 국력을 키웠고 적극적이었던 일본이 결국 조선반도의 주인이 되었는데, 일본은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청나라와 러시아가 거의 동시에 내부혁명으로 인해 붕괴되고 있던 시기에 힘의 공백을 틈타 조선을 일본영토로 합병할 수 있었다.

청 조선 일본 3개국은 19세기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랜 기간동안 쇄국정책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가 비슷한 시기에 굴욕적인 강제개항을 하게 된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1842년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일본은 1854년 조선은 1876년에 각각 개항하게 된다. 이 가운데 일본만이 14년이라는 과도기를 거친 끝에 급진개혁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에도 막부시대를 종식한 뒤 아시아 최초로 근대적인 헌법을 도입하고 서구식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개항시기 일본의 천왕은 지금처럼 상징적인 존재였을 뿐 모든 권력은 도쿠가와 막부에게 있었는데 이것이 격변기에 개혁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에도 나름대로 개혁세력이 존재했으나 왕실의 권력이 강했던 탓에 일본과 같은 신속한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조선의 개화파는 1870년 경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이어받은 박규수, 유홍기 등 중인계층이 중심이 된 개화 1세대가 생겨났고 나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양반가문의 엘리트들을 포섭함으로써 1880년대에는 실질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대부분 친일파였던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빌붙어 정권을 재장악한 민비에 의해 탄압을 당하자 향후 노선을 두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졌다. 이는 비슷한 시기 러시아의 혁명세력이 온건 멘셰비키와 급진 볼셰비키로 나뉘어진 것과 비슷한 일이다.

김홍집이 이끈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 일파와 타협 아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과학기술문명만을 받아들여, 개혁을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고 청과는 종래의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온건개화파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기본적으로 청에서 실시하고 있던 양무 개혁파와 비슷하였다. 이에 반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한국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서양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근대적인 정치제도까지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수구파인 민씨 정권을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고, 근대적인 외교관계의 수립을 위해서도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종식시켜 조선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상 급진파만이 실질적인 개혁세력이었고 이후 이들은 개화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개화당은 임오군란 이후 사이비 개혁파와 민씨 일파, 청나라의 연합공격을 받고 위기에 몰리게 되는데 1884년 5월 청과 프랑스가 베트남 문제로 충돌해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가운데 1,500여 명이 철수하고 8월에 청불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자 이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그 동안 자신들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일본이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정변과 이후 개혁작업에 필요한 군대와 차관문제에 호의를 보이자, 마침내 1984년 음력 10월 17일 이른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쿠데타 정권은 청군의 공격과 일본의 배신으로 인해 3일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개화당 수뇌부가 청군에게 사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9명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갑신정변을 배후조종했다는 국제적인 비난을 회피하려는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환영하지 않았고 그는 일본에서 10년을 전전하다 청나라로 건너가 1894년 3월 민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상하이에서 살해되었다. 개화당은 1895년 민씨 정권이 몰락하고 친일갑오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면을 받고 관직도 회복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는 갑오정권에 참여하여 을미개혁을 주도하였고,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개화당의 맥을 계속 이어갔다.

조선말기 개화파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왜 봉건제도 아래의 일본만이 자체적으로 서양식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개혁파들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심으로 일어나 막부에 대항했는데 이 당시 일본의 각 번은 독자적인 군주와 영토, 군대를 가진 작은 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의 존왕파 개화당은 스스로 무력을 가지고 뜻을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모든 군사력과 행정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던 조선과 청나라의 개혁운동은 앞선 지식과 사상을 지닌 엘리트 개혁세력과 무력에 의존한 하층 계급의 폭동이라는 양 갈래로 분리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개화당이 일찍이 무력 혁명을 준비하고 있던 동학운동세력과 연합할 수 있었다면 조선에서도 일본식 유신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것이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말기 애국 개화당에게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그들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델이었고 이들은 조선을 일본의 선례에 따라 개조해 부강한 자주독립국을 만들고자 했지만 사실상 이는 당시 국제정세에 비추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따라서 일본식의 개혁을 추구해 조선을 근대사회로 변모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의 일부가 되는 길뿐이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의 왕족은 사실상 나라가 망한 시점에서도 대한제국이라는 것을 만들어 정권을 연명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버둥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위대한 혁명운동이었지만 시기가 너무 늦었고 그들의 종교 이념상 중앙의 엘리트 개화당과 연계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패가 불기피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개화와 근대화가 주요 과제였던 조선말기에는 친일파만이 유일한 조선의 애국세력이었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1910년 한일합병 조약을 주도한 이완용 등 친일파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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