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  6.맺음말

大韓帝國期(대한제국기) 皇室財政(황실재정)에 관한 종래의 연구는 內藏院(내장원)을 황실재정의 중심 기구로 간주한 위에 오래 전부터 존속하면서 황실재정의 다른 한 축을 이루어 온 宮房(궁방)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본 논문은 왕실(황실)의 廚房(주방)에 食材料(식재료)를 조달했던 明禮宮(명례궁)이란 궁방을 대상으로 하여 18세기말 이래 20세기 초에 걸친 재정의 구조와 추이를 분석하였다. 1793-1794년 명례궁의 수입원은 크게 宮房田(궁방전)의 地代(지대)와 政府(정부)의 供上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 왕실은 자신의 사유 재산을 보유한 私的存在(사적존재)이면서 정부의 공상에 기초한 公的存在(공적존재)이기도 하였다. 왕실재정의 이중적 성격은 儒敎的(유교적) 公(공)의 名分(명분)에 지지되고 또 견제되면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다. 명례궁 재정은 黑字(흑자) 기조였으며, 18세기의 경제적 안정과 왕실의 儉素(검소)로 인해 상당한 양의 在庫(재고)를 보유하였다.

19세기가 되어 명례궁은 赤字(적자) 기조로 돌아섰다. 재고 자산은 18세기말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명례궁은 1830년대까지는 전통적인 儉素(검소)風(풍)을 고수하면서 收支(수지)의 균형을 맞추었다. 재정이 뚜렷이 악화되는 것은 1840년대부터였다. 누적된 적자로 재고가 바닥이 나고 일시 借入(차입)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19세기 전반 명례궁 재정이 적자 기조로 빠진 것은 동시대 농업생산의 전반적 정체를 반영하여 궁방전의 수입이 줄고 왕실의 살림살이가 커지는 가운데 宮屬(궁속)이 늘어나 賃料(임료)의 지출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명례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大韓帝國期(대한제국기)가 아니라 1882-1894년의 고종 연간에 있었다. 명례궁의 실질 수입은 1854-1893년에 3.8배나 팽창하였는데, 그 주요 기간이 1882-1894년이었다. 왕실은 1882년부터 발행된 當五錢(당오전)을 명례궁에 지급하였으며 그것이 전 수입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럼에도 명례궁 재정은 큰 폭의 적자였다. 명례궁의 지출이 크게 늘어난 것은 궁의 주인인 閔妃(민비/명성황후)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告祀(고사)와 茶禮(차례)를 빈번하게 행하고 왕실의 위엄과 은혜를 과시하기 위한 宴會(연회)와 賜饌(사찬)을 繁多(번다)하게 베풀었기 때문이다.

高宗(고종)의 登極(등극) 이래 몇 차례 커다란 政變(정변)을 거치면서 왕실을 儒敎的(유교적) 公(공)의 名分(명분)으로 견제하던 정치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 위에 성립한 閔氏(민씨) 정권은 전통적으로 극히 公的(공적)으로 관리되어 온 화폐의 주조를 執權(집권)이나 致富(치부)를 위한 私的(사적) 수단으로 행사하였다. 유교적인 공적 규범에서 크게 이탈한 왕실재정은 1894년 甲午更張(갑오경장)과 뒤이은 민비의 시해로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皇室財政(황실재정)은 점차 원래의 양태와 규모로 복구되어 갔다. 典圜局(전환국)이 대량으로 발행한 신식화폐 白銅貨(백동화)가 그 직접적인 재정수단이었다. 황제가 內下(내하)한 전환국의 화폐는 명례궁 수입의 절대 다수를 점하였다.

대한제국기 명례궁의 주요 지출은 민비의 魂殿(혼전)에 올리는 上食(상식)과 茶禮(차례), 그리고 황제를 위한 進饌(진찬)이었다. 다량의 백동화의 內下(내하)에도 불구하고 1904년 명례궁의 실질 지출은 1894년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은 1894년 이전 민비가 궁의 주인이었던 시절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황제는 當五錢(당오전)을 대신한 白銅貨(백동화)를 가지고 그것을 절반의 규모로 복원하였음에 불과하였다.

요컨대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는 전환국에 있었다. 황제는 전환국의 주조 화폐를 家産(가산)으로 장악하였으며, 황실의 허례와 낭비에 그것의 대부분을 지출하였다. 여분의 화폐는 황제의 심복에 의해 商業資金(상업자금)과 高利貸資金(고리대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종래 紅蔘專賣(홍삼전매)를 비롯하여 각종 財源(재원)을 집중하여 황실재정의 중심으로 알려진 內藏院(내장원) 재정은 명례궁이 대표하는 궁방재정에 비해 그 규모가 아주 초라한 것이었다. 1904년 내장원 재정이 갑자기 肥大(비대)해진 것은 황제의 심복 李容翊(이용익)이 관리하던 황제의 자산이 내외의 정치정세에 떠밀려 내장원으로 편입된 所致(소치)일 뿐이었다.

이상과 같은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을 두고 볼 때 종래 몇 사람의 연구자들이 내장원이 電車軌道(전차궤도)와 留學生學資金(유학생학자금)과 같은 생산적 용도에 몇 건의 少額(소액)을 지출한 것에 근거하여 황실재정의 지향을 근대적인 것으로 규정하거나 1904년 내장원이 황제에 상납한 용도를 알 수 없는 자금이 反日獨立運動(반일독립운동)에 쓰였을 것으로 추론한 것은 荒說(황설)에 가까운 것이었다.

본 논문이 장래의 과제로 남겨두고 있는 것은 적지 않다. 內需司(내수사)와 壽進宮(수진궁) 등, 다른 宮房(궁방)의 재정기록을 활용하여 전 궁방의 재정규모를 산출해 내는 작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 작업이 수행되면 皇室財政(황실재정)과 政府財政(정부재정)을 비교할 수 있으며, 양자를 통합한 대한제국의 國家財政(국가재정) 전체가 복원될 수 있다. 18세기까지의 理學(이학) 君主(군주)들이 극히 공적으로 취급했던 通貨(통화)의 주조가 어찌해서 19세기말에 이르러 왕실(황실)의 더없이 노골적인 家産(가산)으로 장악되어 허례와 낭비에 탕진되었는지는 실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결국 한 왕조의 패망을 초래한 이 같은 國家體制(국가체제)의 逸脫(일탈)은 經濟史(경제사)의 영역을 넘어 政治史(정치사) 내지 思想史(사상사)의 영역에서 그 內在的(내재적) 原因(원인)이 종합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출처 : 大韓帝國期 皇室財政의 기초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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