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식민지시대의 경제성장 [차명수 영남대 교수] 6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식민지 시대는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을‘수탈과 착취’했던 제로 섬 게임의 시대였고,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점점 더 못 살게 되고 일본 사람들은 더 잘 살게 되었다는 생각은휴전선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상식이 되어 있다. 그렇게 된 중요한 한 이유는 남북한 정부가 각각 검정한 역사 교과서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의국민계정 추계는 이런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보였다. 1941-45년의 전쟁기간에대해서는 1인당 생산을 추계할 수 없지만,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새로운 총생산 및 인구추계는 식민지 시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911-40년 동안에 1인당 생산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인당 생산 증가의 이면에서 일본인들의 소득이 증가하면서 조선인들의 소득이 감소하는 극단적 소득분배의 불평등화가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사람들의 소득이 일본 사람들의 소득보다는 느리게 증가했지만, 조선인들의 평균적 생활수준은 향상되었다. 식민지기에는 전체 자산에서 일본인 소유 자산의 비중이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식민지 권력이 조선인의 자산을 수탈해서 일본인들에게 분배하거나 조선인들이 가난해져서 자산을 일본인들에게 팔아 넘긴 결과가 아니었다. 이는 유입된 일본 자본이 한국에 새로운 생산설비를 건설하고 자본스톡을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필자는 이런 사실들이 역사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고 근거 없는 주장들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한 역사 교과서가 입을 모아 가르치고 있는 또 하나의 가설은,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이것이 일제의 착취와 수탈로 짓밟혔다는 것이다. 그런데최근의 경제사 연구는 18, 19세기에 인구는 정체했으며 생활수준은 하락했을 가능성이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식민지 시대에 인구가 매년 1.33%, 1인당 생산이 2.37%의속도로 증가했던 것과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이는 남북한 역사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조선 후기는 정체, 식민지기는 발전의 시대였음을 알려준다.

1930년대 공업화 과정에서 상당 규모의 자본이 북한지역에서 축적되었는데, 해방 후남한은 북한지역의 자본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또 1950년 북한의 남침은 남한에 남아 있던 자본마저 상당 부분 파괴해 버렸다. 그래서 허수열(2005)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 남한의 경제성장을 식민지기 성장의 연장선상에서 보려는 것은 무리이며, 두 시기는단절된 시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식민지 과거와 최근 반 세기는 공장이나 철도처럼 금방 눈에 띄지는 않지만 끊기 어려운 고리들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식민지기 동안 계속된 사망력 변천은 결국 해방 후 남한의출산력 변천을 가져오고, 이는 부양률을 하락시켰다. 그 결과 저축률과 투자율 상승이 급속히 상승하고 빠른 자본축적이 진행되면서 고도성장이 진행되었다.

둘째, Acemoglou,Johnson & Robinson(2001)은 유럽 국가들의 지배를 받은 지역에는 식민지기의 제도가 독립 후에도 유지 존속되어 독립 후 경제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 중요한 한 이유는 식민지기에 형성된 근대적 엘리트들이 독립 이후에 자신들의 모태가 된 식민지기의 제도를 유지시킬 강한 인센티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지배를 받은 한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남한 경제발전의 토대가 된 근대적 시장경제 체제는 식민지기에 형성된 것이었다(Cha2000). 그리고 식민지기에 출현한 장교, 관리, 판사, 검사, 경찰들은 해방 후 남한의 시장경제 체제를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시키려는 북한군과 빨치산의 노력을 저지한 핵심적세력이 되었다.

셋째, 식민지기에는 근대교육이 보급되고 근대적 행정 사법 기구, 공장에 취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인적 자본이 축적되었다. 식민지기의 문맹률 감소, 취학률 증가, 조선인 기술자∙기능공∙숙련공 증가가 이를 보여주는 지표인데(古㼓 1996; 안병직1993), 인적 자본스톡의 크기와 증가속도를 측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식민지 시대에 근대적 경제성장이 일어났다는 말은 식민지 통치가 근대적 경제성장을가져왔다는 말과는 다르다. 맬더스적 정체에서 근대적 경제성장으로의 이행은 한국합병이전, 갑오개혁 이후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사망률이 떨어지면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1898년부터였다. 지대와 임금의 하락이 멈추고 상승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이우연 2001; 차명수 2001). 실질 논가격 하락추세가 상승 추세로 반전된 것은 이보다 더 빠른 1880년대였다(차명수∙이헌창 2004:161, 그림 7-A).

그러나 이는 내재적 발전론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밖으로부터의 근대문명의 충격과 이에 자극을 받은 위로부터의 개혁의 결과였다. 우선, 청일전쟁 이후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유입이 급증했는데, 이 중 상당 부분은 조선에 대한 토지 투자였다. 일본인 지주들이 가지고 온 일본품종 벼가 1890년대 후반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이는 1900년경 이후의 지대와 임금의 하락 추세를 상승 추세로 반전시키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오두환 985: 337-38). 둘째,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아래 놓인 조선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해 인구증가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보건위생 개선정책을 실시했다(신동원 1996).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기전에 근대적 경제성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한국이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맬더스의 덫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근대적 경제성장은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빨라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첫째, 1876년 개항을 계기로 선진 생산기술의 전파를 가로막는 장벽들이 철거되기 시작했는데, 1910년 합병은 이 장벽들을 거의 완전히 무너뜨렸다. 식민지 지배와 함께 외국인(특히 일본인)들의 대조선 투자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political risk)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자본유입이 증가했을 것이다. 또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자본이동뿐 아니라 노동력 이동도 급격히 확대되었다. 특히 일본인 기술자와 숙련 노동자들의 조선유입, 조선인노동자들의 일본 이민을 통해 기술전파 속도는 더욱 빨라졌을 것이다. 식민지기 무역은완전한 자유무역이 이루어지던 개항기에 비해서는 보호무역주의적이었지만, 1950,1960, 1970년대의 남한에 비해서는 훨씬 자유무역주의적이었다.

둘째, 조선총독부는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도입하고, 근대적 재정통화제도를 확립했다.아울러 조선총독부는 철도, 도로, 항만, 교통, 통신 설비를 확충해 나갔다. 이런 정책들은 시장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자원배분을 효율화하고 기술습득 및 개발을 자극함으로써경제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는 세율인상을 통한 세수확대, 일본 자본시장에서의 자본도입을 통해 공공투자를 늘려 나갔는데, 이는 총 투자율을 올림으로써 경제성장에 기여했을것이다. 일본정부가 제공한 보충금 등의 경상 이전과 사업공채의 발행은 만성적 적자에 시달리던 조선총독부의 재정 상황을 호전시켜 공공투자 확대를 도왔을 것이다.
출처 :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제13장 경제성장∙소득분배∙구조변화 [차명수 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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