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Ⅴ. 국민의 발견과 해체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Ⅴ 국민의 발견과 해체  (시대정신 2011년 여름호)
지난 20세기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이 구래의 조선성리학을 대신하여 새롭게 발견한 커다란 하늘은 어떠한 것이었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인간들을 평화로운 질서로 통합하는 공화(共和)의 큰 원리는 무엇이었던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대답은 국민이란 새로운 정치철학의 범주이다. 1948년의 제헌헌법은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가리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이라고 칭하였다. 뒤이어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선언한 다음, 그 국민이 보유한 천부의 권리로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 이주, 직업선택 등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21세기 초에 이르러 그 국민의 권위가 19세기말 고종황제의 행차처럼 초라해졌다. 80년대 후반 민주화시대가 열리면서 민족, 시민 등과 같은 다른 범주의 정치철학이 국민을 해체하거나 분열시켜 왔기 때문이다. 여러 범주가 상호 경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를 통합하는 정치의 정신세계가 보다 고차의 원리로 진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합의 근본이 되는 범주를 해체해 버린다면, 그 때부터는 분열을 증폭하는 갈등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국민 범주를 해체시킨 상징적인 사건의 한 가지는 1996년에 있었던 국민학교의 초등학교로의 개칭이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1941년 일제가 전시동원을 위해 기존의 소학교에다 이름을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서투른 민족주의적 해석은 한국사에서 국민이란 범주가 어떻게 자생하였고 주체적으로 수용되었던가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였다. 19세기말까지 오늘날과 같은 국민이란 용어나 범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 범주는 개화기에 자유민권사상과 함께 도입되었다. 식민지기에 독립운동에 종사한 분들도 국민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임시약헌(大韓民國臨時約憲)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선포하여 이후 제헌헌법의 선례가 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 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1947년에 의결한 조선임시약헌(朝鮮臨時約憲) 제2조도 “조선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까지만 해도 여러 정치적 선언에서 국민과 인민이란 두 범주가 헤게모니를 다투었다. 1948년 제헌헌법이 만들어질 때도 국민을 대신하여 인민이란 용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결국 국민 범주가 채택된 것은 인민이란 범주가 그 본래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전용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범주는 정치적 선언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948년 5월 10일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ㆍ보통선거가 치러질 때 투표권을 행사할 국민의 범주가 법적으로 행정적으로 세밀하게 규정되었다. 그에 따라 북한에서 내려왔거나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들은 남한에 새로운 본적지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말해 38도 이남의 지역에 귀속 의지를 표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의 국적이 부여되었다. 그렇게 국민은 대한민국과 함께 새롭게 창출된 역사적 범주였다.

요컨대 국민이란 범주는 구한말 자유민권사상과 함께 유입된 이래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성숙하고 해방 후 공산주의와의 정치적 투쟁을 이겨내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주권자로 확정되고 선포된 것이었다. 그 역사적 성취가 김영삼 정부의 서투른 민족주의에 의해 일제의 잔재라는 누명을 쓰고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부류에 속하는 김영삼 정부의 실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94년 국민교육헌장이 사실상 폐기되었으며, 1995년에는 건국사의 갖가지 기억을 안고 있는 중앙정부의 청사를, 동양건축사에서 걸작으로 평가되는 그 건물을, 일제가 건립했다는 이유만으로 철거하였다.

민족이란 범주가 언제 어떻게 성립했는지, 그것이 보통 한국인들의 상식과 달리 불과 100년 전에 도입되고 확산되어 온 것인지에 관해서는 지난 10년간 훌륭한 연구가 많이 쌓여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민족이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예는 1900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이후 민족은 한국인들을 하나의 역사적 운명공동체로 감각하는 정치적 범주로서 식민지기에 걸쳐 널리 유포되었다. 민족 범주가 확정되는 것은 해방 후 대한민국의 성립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민족의 성조가 기자인가 단군인가를 둘러싸고 지식인들의 의식은 분열되어 있었는데, 대한민국의 성립과 함께 단기 연호가 사용되고 개천절이 4대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됨에 따라 기자에 대한 단군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민족주의는 40-50년대에는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대한국민’을 결속시키는 힘으로, 이후 60-70년대에 걸쳐서는 조국근대화를 위한 국민적 역량을 동원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민족주의의 역할이 변질되는 것은 80년 후반 민주화시대 이후 부쩍 활성화하기 시작한 통일운동의 과정에서였다. 민족통일을 위한 역사학은 대한민국을 민족의 분단을 초래하면서까지 반민족 친일세력이 미제와 결탁하여 세운 반공파시즘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하였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은 민족통일과 함께 없어질 나라로 그 역사적 위치가 설정되었다.

민족주의의 역사학과 정치학이 최고 절정에 달한 것은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에서였다. 여기서 남북의 두 정상은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며,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현행 헌법 제4조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지향하고 있음과 명확히 상치되는 것이지만, 공동선언을 주도한 정치가의 개인적 명망과 통일이 임박한 듯이 느끼는 대중의 착각이 어울려 커다란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선언을 통해 민족은 국민보다 상위 범주의 정치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점이 명확해짐과 더불어 국민의 분열은 노골화하고 민족주의의 쇠락도 시작되었다.

2000년의 공동선언은 개성공단으로 상징되는 남북한의 경제적 교류를, 실은 남한의 대북 지원을 다소간에 활성화하였을 뿐, 통일문제에 관해서는 하등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국가를 부수고 합치고 하는 것은 고도의 이념적 내지 이성적 영역의 문제이다. 인종이 다르더라도 이념이 같으면 로마제국이나 오늘날의 유럽연합처럼 통일을 이룰 수 있지만, 인종이 같더라도 이념이 다르면 통일은커녕 내전만 일어날 뿐이다. 본질이 그러한 문제를 민족이란 감성적 범주로 접근하려고 했으니 한계는 처음부터 명확하였다. 아마 ‘우리 민족끼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선언을 이끌어낸 두 당사자도 알지 못했을 터이다. 그렇게 애매모호한 감성정치가 그들의 헌법적 가치를 짓누르기 시작하자 많은 한국인들은 비로소 그들의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원 ‘대한국민’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대립해 왔으며, 그 결과 쉽게 치유되기 힘든 깊은 분열의 상처를 안게 되었다.

분열의 저변에서는 자유 이념의 빈곤이라는 근본적인 제약이 가로 놓여 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처참한 인권 실태를 고발한 작가를 초청한 것은 청와대가 아니라 백악관이었다.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킨 것은 한국의 국회가 아니라 미국의 의회였다. 탈북자들의 수용소 체험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깊은 관심을 표하는 것은 일본의 대학생이지 한국의 대학생은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무려 28년을 버텨낸 어느 탈북자는 자신의 체험을 전하는 강연장에서 대학생들이 질문은커녕 졸기만 하는 데 더 없는 실망감을 표하였다.

이러한 황망한 사태가 초래된 것은 원래 자유 또는 인권이란 범주의 정치철학이 불과 100년 전에 들어온 수입품이라는 사실, 그런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 범주를 해체한 뒤 자유ㆍ인권 지향의 어떠한 국민교육도 시행하지 않고 있는 현실, 게다가 자유주의 하면 있는 자의 논리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한국 지성사회의 저급한 평등주의 무엇보다 그런 풍토를 떠받치면서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조선성리학의 정치철학 등의 상호작용에 의해서인데,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은 별도의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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