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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사와 공의 원리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Ⅳ 사와 공의 원리  (시대정신 2011년 여름호)
6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속하게 된 서로가 서로에 낯선 익명성의 사회는 지역감정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인들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사회조직의 특질이었다. 이 저신뢰의 대중사회가 그에 속한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를 포함하여 타인의 정체를 규정하거나 구별함에 있어서 몰개성적 범주에 의존하게 만든 인과관계를 납득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왜 몰개성적 범주냐, 다시 말해 왜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나 타인의 정체를 확인함에 있어서 다른 것도 아닌 지역감정이나 후술하는 민족감정과 같은 몰개성적 범주 내지 집단적 상징에 기댈 수밖에 없었느냐는 좀 더 엄밀히 그 역사적 배경과 인과를 따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국의 정신사에 있어서 사적 개체로서 개별 인간이 공적 질서로 통합되는 원리, 곧 한국인의 공사관(公私觀)이 검토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이하 그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조선성리학이 정치와 문화에 절대적 지배력을 행세한 17-19세기의 공사 관계를 검토하면 그것이 두드러지게 관념적이고 윤리적이었다는 특질을 발견한다. 예컨대 조선성리학의 세계에서 공은 공리(公理)로서 자연과 인간사회의 생성과 운동을 관통하는 근본 원리에 해당하였다. 반면 사라 함은 사욕(私慾)으로써 어디까지나 공리에 의해 억제되고 순치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설정되었다. 공이 선이라면 사는 악이었다. 그 점이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의 성리학에 비해 조선성리학이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비교사적 특질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성리학의 교의에서 인간 욕망의 자연성에 바탕을 둔 자립적 개체로서 사의 존재는 끝까지 긍정되지 않았다. 공과 사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전자에 의해 후자는 소멸되어야 하는 이공멸사의 관계였다.

17세기 후반 유형원(柳馨遠)이 그의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이라는 토지개혁을 주장할 때의 논리가 바로 그와 같았다. 곧 농업이 천하의 대본인 것처럼 토지는 천하의 공물로서 공유이어야 하며, 이에 개인이 토지를 사유지로 갖는 것은 공리에 어긋나는 사욕으로서 마땅히 폐지되어야 했다. 이 같은 논리는 19세기 말까지 여러 성리학자가 펼친 토지개혁론에서도 마찬가지였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 있었던 농지개혁의 명분으로까지 이어졌다. 나아가 오늘날 이른바 진보파로 불리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게 천박한 인간 이해가 어디 있느냐고 펄펄 뛰는 것도 길게 보면 위와 같은 17-19세기 공사관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까지 조선성리학의 공사관에서 관찰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공과 사의 상하 위계질서이다. 공리를 터득하고 실천하여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군자로서 임금이고 양반이고 관료이고 어른이고 선배이다. 공의 질서나 권위는 이 사람들에 의해 담당된다. 반면 사욕에 사로 잡혀 도덕적으로 미완성이나 실패한 사람은 소인으로서 신하이고 상놈이고 농민이고 어린이고 후배이다. 사에 속하는 이 부류의 사람들은 공을 섬기고 공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 같은 신분적 위계의 공사관은 봉공(奉公)이란 말의 용례에서 잘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는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 진황(賑荒), 해관(解官)의 13부로 이루어져 있다. 수령에 임명된 자가 임지에 도착하여[부임] 임지를 떠날[해관] 때까지 마음에 두고 행할 바를 위와 같이 나열한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그 모두가 봉공이다. 그런데 정약용이 열세 가지의 하나로 나열한 봉공은 수령이 임금의 명을 충(忠)으로 받들고, 상사인 관찰사를 성(誠)으로 섬기고, 이웃 고을의 수령과 우애함을 말하였다. 곧 공의 영역은 양반관료 사회로 국한되며 거기서 수령이 취할 올바른 마음자세와 몸가짐을 봉공이라 하였다.

조선성리학의 공사관에서 관찰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공을 구성하는 권위가 상호 충돌하게 되면, 예컨대 부모에 대한 효와 임금에 대한 충이 우선순위를 다투는 갈등이 발생하면 언제나 효가 충보다 우선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17세기에 유명한 예송(禮訟)이 두 차례나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임금은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여부였는데, 그렇다고 주장한 쪽이 결국 패하여 나중에 사약까지 받고 말았다. 이후 효의 윤리가 충을 제압하면서 19세기말까지 부동의 헤게모니를 차지하였다. 잘 알려진 일이지만, 1908년 조선왕조가 패망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13도의병총대장 이인영이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졌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그 합리성이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조선왕조의 신하들에게서 임금은 타넘을 수 없는 권위였지만 초월적인 권위는 아니었다. 송(宋) 이래 중국에서는 황제 지배체제를 두고 일군만민(一君萬民)이라 하였는데,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말이었다. 조선왕조의 신하들은 집집마다 임금보다 더 높은 자신의 조상을 하늘로 모셨기 때문이다. 왕조가 위태로워지자 기호에 군림한 노론의 명문 송씨 가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그 가문과 대립해 온 인근의 윤씨 가문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조상이 송씨 가문의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기인 1898년의 일이다. 비운에 죽은 명성황후의 능을 찾은 고종황제의 행차가 궁궐로 돌아오는 길에 광통교 위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그러자 행차에 참가하고 있던 백관들은 물론 황제를 지근에서 모시는 시종원경과 경호병들조차 어가를 다리 위에 두고 흩어졌다. 그렇게 황제라 하지만 소낙비에 근위병이 흩어질 만큼 그 권위가 초라하고 분산적이었다. 충보다 효를 우선으로 여겼던 조선성리학이 오랫동안 나라를 지배한 결과였다.

요컨대 조선성리학의 사회ㆍ정치철학에서 자립적 개체로서 사의 존재는 끝까지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러했던 한 개별 사의 총화로서 공의 세계는 끝까지 미출현이었다. 사를 규정한 최고 도덕으로서 효는 인간들을 가문 단위로 분립케 했다. 조선성리학의 세계에서 가문을 초월하는 더 크고 높은 공의 세계로서 사회나 국가는 닫혀 있었다. 사람들은 가문이나 동향이나 동학의 인연을 벗어난 이방의 세계에서는 마치 쟁반 위의 모래알처럼 분산하고 대립하였다. 지극히 개성적이지만 좀처럼 단결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사회조직적 특질은, 흔히들 그러한 지적이 일제가 부식한 정체성론(停滯性論)의 편견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곤 하지만, 실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익숙하게 그의 사회생활에서 경험해 온 삶의 상식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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