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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Ⅲ. 사회 편성의 양태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Ⅲ 사회 편성의 양태  (시대정신 2011년 여름호)
사회학자 송복은 조선왕조 시대에 다 같이 차별을 받았던 영남과 호남이 60년대 이후 지역갈등의 주역으로 대립하게 된 것은 급속한 인구이동이 빚어낸 결과라고 해석하였다. 주지하듯이 고도성장기 한국의 인구이동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급격하였다. 1960년 군부와 시부의 인구비율은 72 대 28이었는데, 1985년에는 35 대 65로 역전되었다. 1987년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한 총인구이동은 22.6%에나 달하였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이동은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거대한 익명성의 사회를 형성하였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의 정체를 이해하거나 규정함에 있어서 탈 개성화 된 범주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출신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지역감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에 공감하면서 필자 나름으로 보충하고 싶은 점은 이주자들이 새로운 이주지에서 맞게 된 익명성의 사회가 그들의 원거지에서 또는 새로운 이주지에서 원래부터 존재했던 사회의 특질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주자들이 그들의 원거지에서 공동체성이 강한 사회에 소속되었더라면 이주 후에도 그러한 공동체를 건설했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이주지에 원래부터 강한 공동체사회가 존재했었다면, 이주자는 그 공동체에 포섭되는 방식으로 정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익명성의 사회가 아니라 실명성의 공동체사회가 성립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6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경험하게 되는 익명성의 사회는 실은 한국인들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또는 부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전통사회가 미풍양속으로 가득 찬 공동체사회였으리라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한국의 전통사회는 자아중심의 비공동체사회로서의 특질을 강하게 지녔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서유럽이나 일본의 전통사회가 좋은 예를 보이고 있는, 정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잘 뭉쳐진 민간단체의 예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18세기까지 상인과 수공업자의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인들의 단체는 19세기 중엽부터 조직되기 시작했는데, 단체 결성의 기본 취지는 상업적이라기보다 상호부조의 도덕적인 데 있었으며, 가입과 탈퇴도 자유로운 열린 조직이었다.

농촌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할 마을도 잘 뭉쳐진 영속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마을이라 함은 인간들이 거주하는 공간의 구획을 의미할 뿐이었다. 마을은 인간들의 사회ㆍ경제생활에 필요한 치안, 질서, 수리, 영림, 교육, 도로, 축제 등의 공공재를 공동으로 생산하거나 그에 필요한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단체 내지 법인격이 아니었다. 그러한 공공재는 마을 내외의 다양한 신분층위와 공간범위에서 이해관계의 당사자들로 구성된 계(稧)에 의해 공급되었다. 계는 특정의 목적 기능을 위해 직접적인 이해를 지닌 사람들끼리 구성한 결사체로서 공동체라기보다 이익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예컨대 어느 마을의 신분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동계가 결성될 때, 마을의 모든 사람이 거기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계는 그 취지에 찬성하는 양반신분을 정식 구성원으로 하였으며, 같은 양반신분이라도 초대되지 않은 부류가 있었다. 또한 양반신분이 아닌 주민은 동계의 멤버라기보다 지배의 대상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전통사회를 두고 다층이심(多層異心)의 사회라고 그 유형적 특질을 규정한 적이 있다.

사회조직의 이 같은 특질로 인해 사회가 갈등기에 접어든 19세기 이후 마을은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세기말 전국적으로 3만 9천 이었던 마을의 수가 20세기 초까지 6만 3천으로 증가하였다. 사회적 갈등이 격심하였던 다른 한 가지 징표로서 소송의 수를 들 수 있다. 전라도 영광군의 경우 1871년 한 해에 2,949건의 소송이 있었는데, 그 절반이 민사소송이었다. 당시 영광군의 호수는 12,600여 호, 이에 평균 8-9호에서 1건의 민사소송이 있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8-9호의 작은 범위에서 적어도 2호가 이해관계의 갈등을 원만히 조정하거나 타협하지 못하여 관청으로까지 나아가 송사를 벌였던 것이다.

1998년의 『사법연감』에 의하면 1987-97년간 인구수는 11.2% 증가하였으나 소송사건은 106%나 증가하였으며, 1997년 한 해 동안 3.2명당 1명이 소송 관계로 법원을 이용하였다. 이 같은 소송의 빈도는 다원화된 산업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수준 이상의 과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컨대 현대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 한국의 인구 당 민사소송의 건수는 일본의 거의 60배라고 한다. 사회가 일본에서처럼 지연단체나 직능단체로 탄탄하게 조직되어 있을 때 분쟁은 미연에 억제되거나 사후에라도 자율적으로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쟁송자에 대한 단체의 나쁜 평판은 승소에 따른 이익을 초과하는 소송의 비용일 수 있다. 현대 한국사회가 위와 같은 소송의 남발 현상을 보이고 있음은 이 같은 기능을 수행할 사회의 단체성 내지 공동체성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현대 한국사회의 특질은 위의 영광 사례에서 보듯이 자연경제가 지배적이었던 19세기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20세기 전반 일제의 조선 지배는 그 전통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가하였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6만 3천 여 마을을 2만 3천 여 동리로 통폐합하였다. 들어선지 불과 3년 밖에 되지 않은 외래권력이 원주민의 일상생활이 전개되는 주거공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던 것은 구래의 마을이 자기 재산과 인격으로 영속하는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수십만에 달하던 계가 담당해 온 질서, 수리, 영림, 교육 등의 공공기능이 총독부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 질서에 흡수되었다. 민간사회에 남겨진 자율적 질서는 상장례(喪葬禮)의 상호부조를 위한 족계(族稧) 정도에 한정되었다. 30년대에 총독부가 벌인 농촌진흥운동은 그나마 전통사회가 보유하고 있던 각종 자치기능을 해체하는 중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해방 후 한국의 사회 편성이 어떠한 양태였는지는 50년대에 행해진 농촌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당시 농촌을 방문한 사회학자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사회조직은 면사무소와 같은 관료제적 행정기구, 가입이 거의 강제된 자유당의 지방조직, 그리고 상장례의 상호부조를 위한 족계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외에 교회, 학교 사친회, 4H클럽 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참여자나 활동의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농촌 주민의 생활재료를 수급한 장시도 일반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시장이었다. 도시에는 상공회의소나 방직협회와 같은 상공인들의 단체가 존재했지만, 정부의 정책을 대행하는 준(準) 관료기구이거나 동업자들의 대정부 로비 창구로 기능함이 일반적이었다.

이 같은 한국 전통사회의 비조직적 특질은 70년대 초 박정희정부가 새마을운동의 준비를 위해 전국 34,665개 마을을 대상으로 행한 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그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리더십을 결여하고 있는 마을이 50%, 리더십이 후진적인 마을이 41%나 되었으며, 강건한 리더십으로 자조계획을 수립하고 집행 중인 마을은 9%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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