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Ⅱ. 지역감정의 원류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Ⅱ 지역감정의 원류  (시대정신 2011년 여름호)
흔히들 지역감정이라 하면 1961년 이후 영남인이 오랫동안 집권하는 기간에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50년대에는 호남 출신의 인사가 영남에서, 거꾸로 영남 출신의 인사가 호남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영남 출신의 박정희가 서울 출신의 윤보선을 가까스로 누른 것은 호남 지역의 커다란 지지 덕분이었다. 그랬던 영남과 호남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영남 출신의 집권기에 호남 지역이 경제개발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호남 출신의 인사가 불리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호남을 차별하는 지역감정은 그보다 훨씬 더 연원이 깊다. 호남차별의 지역감정은 영남의 일만은 아니고 경기와 충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한국심리학회의 조사에 의하면 두 지역의 호남에 대한 차별감정은 영남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호남차별을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고려왕조부터였다. 태조 왕건이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8조는 금강 바깥의 사람들은 그 지역의 지세로 보아 반역하기 쉬우니 조정에 참여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왕건이 후백제를 아주 힘겹게 이긴 기억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이후의 조선왕조도 이 같은 지역감정을 이어받았다. 예컨대 1488년 김제 군수를 역임한 김미(金楣)가 왕에게 아뢰기를 전라도는 백제의 터인데 아직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강도가 횡행하고 왜적과 붙고 윤리가 문란하여 심히 다스리기 힘든 고장이라고 하였다. 왜적과 붙는다고 했듯이 전라도는 언제나 반역의 위험성으로 경계되었다. 이후 1589년에 벌어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호남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이후 호남을 반역향(叛逆鄕)으로 간주하는 조선왕조의 편견은 더욱 굳어졌다.

곧이어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전란의 기간 동안 전라도는 늘 반역의 가능성으로 경계되었다. 1594년 국왕과 대신이 전황을 논하는 자리에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호남의 인심이 평소 악한데 토적이 봉기하여 혹은 왜적에 붙고 혹은 산곡에 가득 숨어있으니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1595년의 어느 회의에서도 마찬가지 지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호남의 인심이 강퍅하고 완악하여 영남과 상이한 것이 마치 초나라와 월나라와 같다고 하였다.

이후 19세기까지는 당쟁의 시대였다. 당쟁의 결과 기호 출신의 노론이 정권을 독점하게 됨에 따라 영남인도 소외되기 시작했는데, 호남인은 그보다 먼저 아득하게 버려졌다. 18세기 후반 전라도 흥덕 출신의 황윤석(黃胤錫)이 미관말직으로 서울에 체류하면서 적은 일기가 있다. 그는 서울의 지배세력이 호남에 대해 얼마나 심한 편견을 갖고 있는지를 그의 일기에 몇 차례나 소상하게 적었다. 그에 의하면 서울사람들은 호남인의 기질이 경박하고 속임수가 많다는 편견을 가졌다. 또한 서울사람들은 호남인들이 잡술을 숭상하며, 이에 자주 변괴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황윤석은 이 같은 서울사람들의 편견을 고쳐보기 위해 호남인으로서 훌륭한 도학과 문장과 충절을 남긴 인물의 문집을 간행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황윤석이 쓰라리게 체험한 지역차별은 동시대 왕조실록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1735년 국왕 영조는 대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호남의 풍속이 참위설(讖緯說)을 숭상하여 인심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관련 서적을 몰수하여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실제 18세기의 여러 문적을 살피면 잡술, 곧 참위설을 숭상한 것은 호남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남차별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것도 참위설 또는 풍수지리설이었다. 예컨대 실학의 대가 이익(李瀷)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정간에는 기가 듬뿍 담겨 있어 물자가 번식하고 인재가 많이 양성되는 반면, 지리산 이서의 호남은 기가 흩어지는 국면이라 덕망 있는 자가 드물게 나오니 사대부가 거처할 곳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그의 풍수지리학은 영남을 찬양한 반면 호남을 홀대하였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 나타난 호남에 대한 편견은 일층 지독하다. 그는 호남의 샘물에 병기가 가득하고 남원의 지세에서는 살기가 느껴진다고까지 하였다.

호남에 대한 편견이 이렇게 한 시대의 문화를 이룬 가운데 조선왕조는 조세의 수취에서도 호남을 심하게 차별하였다. 호남의 토지에 대해서는 높은 등급을 부여하여 다른 지방에 비해 더 많은 조세를 수탈하였다. 그 수탈의 실태는 이후 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구체적으로 폭로되었다. 1917년 일제는 전국적으로 통일적인 기준에 따라 사정된 토지가격의 1.3%를 지세로 수취하기 시작하였다. 1.3%라는 부과율은 기존의 지세 총액보다 대략 20% 더 걷겠다는 목적에 따라 책정된 것이다. 그런데 전라도에서는 오히려 지세부담이 이전보다 3% 줄어들었다. 반면에 경기도는 58%, 충청도는 14%, 경상도는 33%나 증가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남은 일제의 지배기에 조선왕조의 차별과 수탈로부터 해방되었다.

고려왕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것은 936년의 일이다. 이후 14세기말 고려왕조가 조선왕조로 교체되었지만, 지배세력이 발본적으로 교체되지는 않았다. 그러한 지배세력의 초장기적 연속성으로 인해 고대왕조의 상호 쟁투에 관한 정치적 기억이 19세기까지 그대로 전승되었던 셈이다. 조선왕조가 지방을 차별한 것은 호남만이 아니었다. 평안도에 대한 차별은 일층 극심하였다. 그 지역의 주민은 조선왕조가 일제에 패망하자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그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우리에게) 일본 사람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 사람들은 500년 동안의 적”이었다면서 “기호파를 먼저 없애고 그 다음에 독립하자”고 할 정도였다.

요컨대 19세기까지의 왕조 지배체제는 잘 통합된 정치적 공동체의식을 함양하지는 않았다. 그 왕조가 해체되었을 때 남겨진 그의 백성들은 분열의 소지를 잔뜩 안고 있었다. 이민족 일제가 초월적인 권력으로 군림한 기간에는 갈등은 미봉되었다. 해방 후 이념의 극단적 대립과 함께 극한적인 정치투쟁이 벌어졌던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50년대의 한국 정치에서 호남 인사가 영남에서, 영남인사가 호남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감정보다 훨씬 고차적인 이념 대립이 그 시대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 대립의 장이 60년대부터 슬슬 걷히고 각 지방에 정치적 발언의 기회가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그와 더불어 지역감정도 슬슬 표출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을 보다 세밀히 복원해 내기 위해서는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다른 몇 가지 유산이나 부채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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