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8] 동양의 비스마르크 p249

이등박문은 위대한 인물이다. 타고난 강골에 건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망할 당시 68세였으니 100년 전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장수한 편에 속한다. 이 때문에 이토 공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러·일 전쟁 당시 旅順 공략전을 지휘한 노기 대장은 “실로 죽을 장소를 잘 얻은 사람이다”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근대 일본의 아시아 해방전쟁을 지휘하던 노혁명가가 만주에서 조선인 수구반동에게 살해당했으니 이는 군인이 전장에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1841년 현재의 山口縣인 죠슈에서 태어난 이등박문은 20대인 1860년대 봉건 막부를 타도하는 혁명전쟁에 참여해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나들었던 혁명가였다. 메이지 혁명이 성공하자 스스로 정권에 참여하게 된 이토는 1870년대 이노우에와 함께 영국에 유학하면서 메이지 혁명의 기치인 존왕양이尊王攘夷 중 양이攘夷 노선을 포기하게 된다. 애국심에 불타던 대일본제국의 청년 이토의 눈에 유럽인들은 단지 침략자로서만 비쳐졌으나, 막상 스스로 유럽을 견학하게 되자 유럽이 근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산업혁명의 기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토와 이노우에는 일본이 유럽에 너무도 뒤떨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토와 이노우에는 당시 서구 문물을 체계적으로 학습한 일본 신세대의 대표격인 인물들이다. 스스로 혁명에 참여해 봉건체제를 타도한 혁명가들이 선진국에 유학해 근대국가 건설에 꼭 필요한 각종 지식을 습득해 왔으며, 또한 이들의 지식이 그대로 신국가 건설에 반영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이 당시 얼마나 축복받은 나라였는가를 보여준다. 이같은 일이 각 단계별로 모두 힘들고 희귀한 일이기 때문에 근대일본의 부상은 세계사에서 하나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상을 지닌 청년집단은 어느 나라에나 나타나게 마련이다. 조선에는 김옥균과 박영효로 대표되는 전투적인 개화당이 있었으며 청에는 이홍장과 원세개가 있었다. 당시 이들은 모두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나 위에 말한 일본의 과정 중 조선의 개화당은 봉건체제를 타도하는 첫단계부터 실패하고 말았으며, 청의 신진세력들은 아예 혁명을 시도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나약하게 구체제와 타협하고 말았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건설에서 이처럼 기적과 같은 과정이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역시 막부시대 축적된 일본의 발전된 봉건제도가 뒷받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가 지휘한 독일의 통일과 부국강병책이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독일에서 낡은 체제가 파괴되고 혁명의 기운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비스마르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오랜 쇄국정책으로 이같은 외부의 혁명이 유입될 수 없었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독일과 같은 수준의 부국강병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등박문은 비스마르크보다 운이 더 좋았다.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비스마르크는 당시 35개 군주국과 4개 자유도시로 분열되어 있던 게르만민족을 통일시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정치협상과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오스트리아의 방해공작으로 대게르만주의에서 소게르만주의로 후퇴한 이후에도 비스마르크의 독일연방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헤아릴 수 없는 생존의 위험에 직면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느슨하기는 했지만 오랜동안 막부정권에 의해 통일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존왕제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섬나라이며 아시아의 동쪽끝이라는 이유로 열강에 의해 거의 방해받지 않고 순조롭게 신국가건설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홍장과 비스마르크, 이등박문을 비교해 볼 때 중국의 신진세대들이 왜 서태후를 죽이고 일본이나 독일처럼 입헌군주제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나는데, 이는 역시 중국에 봉건제도가 없었다는 사실로 귀착되는 것이다. 즉 이토와 이홍장의 차이가 당시 일본과 중국의 차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일본과 독일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입헌군주제의 통일국가를 건설했고, 결국 부국강병에 성공해 산업혁명의 본거지인 영국보다 더 강력한 산업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독일연방의 탄생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이 주도했고, 대일본제국의 탄생과정에는 이토의 죠슈-사쓰마 연합이 주도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처럼 이등박문과 같은 자질있는 지식인 혁명가가 스스로 성장해가면서 시종일관 격변기의 일본을 이끌었다는 것은 일본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즉 이등박문이라는 인물은 일본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과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된다. 이등박문은 원래 하야시 도시스케 林利助 라는 이름을 가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으나 하급무사의 집안인 이토 家의 양자로 들어가 무사의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청년기 이등박문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에서 수학했는데, 이 또한 천운을 만난 것이다. 요시다 쇼인은 아무런 외국 견학이 없이 스스로 눈을 뜬 일본의 개화1세대로서 이 송하촌숙으로부터 일본의 근대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1854년 페리제독의 함대에 몰래 올라타 미국에 밀항을 시도한 사건으로 유명한 요시다 쇼인은 1830년 하기의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개화지식인이다. 페리 함대에 의한 불평등조약에 불만을 품고 막부에 저항하다 30살의 나이에 막부 독재자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송하촌숙에서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高衫晋作, 이토 히로부미 등 90여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삼아 더더욱 막부타도 운동에 헌신했고, 결국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역이 되었다. 그를 신으로 모시는 쇼인 신사와 그가 강의하던 쇼카손주쿠는 오늘날에도 야마구치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남아있다.

조선에도 비슷한 시기 유대치라는 선각자가 나타나 양반과 왕족인 김옥균, 박영효 등을 교육시켜 개화당을 결성했으니 유대치-김옥균의 관계는 요시다 쇼인-이등박문의 관계와 놀랄만큼 비슷하다. 만약에 조선에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이들이 일본과 협조하여 조선 혁명을 이끌었다면 아마도 조선은 뒤늦게나마 일본과 함께 아시아 해방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이 불가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역시 아시아에서 일본만이 그 같은 신속한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발전된 사회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등박문은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다시 1870년에는 화폐제도와 은행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에 파견되었다. 이등박문의 영국 유학과 미국 유학은 모두 정부 관료의 자격으로 공식적인 견학이었으며 그가 습득해 온 선진국의 지식과 자료들은 모두 그대로 근대 일본제국을 건설하는 데 이용되었으니, 조선이나 청국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등박문이 일본 정계의 1인자로 부상한 것은 1880년대 초였다. 당시 일본은 사이고가 주동한 세이난 전쟁이 진압된 이후 다시 자유민권운동, 즉 급진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 때 정부 내 급진파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즉시 1882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1883년에 영국식 의회와 정당을 창설하고자 했는데, 이는 인기에 영합하는 전형적인 대중추수주의적인 행태였다. 이에 분노한 이등박문은 정부 내 동지들을 규합하여 북해도 개척에 관련된 비리 스캔들을 문제 삼아 급진파들을 축출하고 실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등박문의 입장은 헌법제정과 의회창설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므로 충분히 각국의 제도를 연구한 다음 1889년에 제헌, 1990년에 의회개설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이등박문은 선진국의 헌법을 조사하기 위해 다시 유럽으로 떠나 연구에 착수했다. 이후 1885년 일본최초로 내각이 창설되어 이등박문은 초대 내각총리에 부임하였으며, 1889년 일본 최초의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이 때 이후 근대 일본은 이등박문의 지휘 아래 일청전쟁, 일러 전쟁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에 승리에 명실 공히 열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으니, 역사가들이 이등박문을 일컬어 세계에 발을 내디딘 일본 그 자체와 같다고 평한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닌 것이다. 즉 근대 일본의 기적은 이등박문의 지휘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니, 이 같은 출중한 정치가는 아마도 동양 역사상 다시 등장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정계의 실권을 장악한 이등박문이 러일전쟁 이후 조선을 통치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정치와 관료제도, 화폐, 교육, 치안 등이 신속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조선과 만주는 임자 없는 불모지로서, 청과 러시아, 일본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고 결국 두 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과 만주를 통치하는 것은 순리에 따른 정당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과 청의 수구파들은 이등박문이 이 지역에 대한 침략을 선도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생각일 뿐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수구파의 대표인 안중근은 이등박문을 살해한 뒤 이등박문의 죄상을 다음과 같이 15개 항목으로 주장한 바 있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 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약간이라도 역사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안중근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억지스러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폐사용과 교육정책은 이등박문이 조선 통감으로 재직하던 4년 동안의 대표적인 치적이었는데, 안중근은 이를 죄악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경제학에 무지한 조선 왕실과 관료들에게는 현대적인 화폐정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수백년동안 동전만이 유통되어 왔다. 게다가 돈이 부족할 때마다 조선 정부에서는 當五錢,(상평통보 5개에 해당하는 액면가를 가진 동전) 當百錢 등을 발행해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이 동전들은 실제 통용되는 가치와 액면가치가 달라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동전은 보관과 운반이 불편하였으나 현대적인 중앙은행 제도와 화폐정책이 없는 조선으로서는 지폐를 사용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등박문이 부임하면서 일본의 제일은행권을 조선에서도 사용하게 하였으니, 이는 조선의 화폐가 일본의 화폐정책에 연동 고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의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외 민황후를 시해했다거나 정권을 강제로 빼앗았다거나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등의 죄목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등박문에게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또한 이등박문이 천황을 속였다거나 천황의 아버지를 죽였다거나 하는 주장은 사실도 아니려니와 마치 안중근 자신이 일본국민인 것처럼 남의 나라 걱정을 해주고 있는 것이어서 실소를 불러 일으킨다. 이처럼 안중근의 주장은 일관성도 없고 진실성도 없으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정체성이 오락가락하고 있어서 그가 얼마나 무지한 자인가를 알게 해주고 있다. 이 주장들을 보면 안중근은 그의 개인적인 불만을 모두 이등박문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죽임으로써 스스로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처럼 억지주장과 이유 없는 원한으로 가득 차 동양이 낳은 위대한 정치가를 살해한 수구반동을 한국에서는 다시없는 애국자이며 위인이나 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미래에 언젠가 한국인들이 역사에 대해 올바른 안목을 가지게 된다면 이등박문은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근대화의 아버지로 칭송을 받게 될 것이며, 안중근의 행동은 부질없는 수구 민족주의로서 비난받게 될 것이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이등박문에 대해 조선을 침략한 악의 상징으로, 안중근은 정의의 상징으로 일방적인 시각을 주입받아왔다. 일본에서는 이토에 관한 전기와 평전, 소설 등이 수십 종이나 출판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그에 관한 전문가가 단 한명도 없고, 단행본 한권 없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천박했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반면 안중근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고, 일본 천주교인들은 안중근에 대한 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최근 2000년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이등박문의 평전 한권이 번역 출판되었다.(이등박문, 도서출판 中心) 이 책에는 이등박문이 조선통감 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그는 한국 황태자인 영친왕의 태사(太師)<소사(少師)는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토가 안중근에게 살해당한 뒤 조선8도의 유림 대표들은 한군데 모여 이토의 치적을 기리는 집회를 열고 동상을 건립했으며, 각 도별로 謝罪團을 구성해 회초리를 싸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매를 자청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 황실은 이등박문이 사망한 뒤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추모했다는 사실도 언급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당시 천주교 조선대교구의 뮈텔 신부가 일기에서 이등박문의 치적을 칭송하면서 끝내 안중근의 고백(告白)종부(終傅)성사(聖事)를 거부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당시 조선인들의 이등박문에 대한 정서가 오늘날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러일전쟁이 끝난 뒤 이등박문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조선에서는 모든 정치가와 관료들이 환영단을 구성해 인천항까지 마중 나갔으며, 인천에서 경성에 이르는 연도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기를 흔들며 이등박문을 환영했을 만큼 그는 조선에서도 인기 있는 정치가였다.

최근 한국의 한 신문에는, 기자가 동경의 거리에서 몇몇 고교생들에게 이등박문에 대한 인지도를 취재한 기사가 실렸다. 기자의 질문에 대해 고교생들은 “이등박문이 누구야? 너 들어봤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혹시 천황 아니었나?” 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보았다. 현대 일본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에 대해 일본 국민들이 이처럼 무지하다는 것은 그 교육의 내용이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일본인들도 이제는 자신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인식이 바로잡혀야만 한국의 인식도 바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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