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7] 별을 쏘다 p240

1909년에 조선인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저격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어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해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살해함으로써 일본의 고질병인 번벌정치가 마무리되어 20세기 초반 일본이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 의견은 이토 공이 명치 유신 이후 일본에서 사쓰마-죠슈 독재를 유지해 온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토 공이 암살된 이후 1910년대 말 사쓰마 조슈 지역의 권력독점 시대가 마무리되어 이후 상당한 수준의 국민 대통합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는데, 1920년대 반 사쓰마 조슈 연합의 주도로 일본에서는 국가 표준말 정책이 강화되는 한편 국민 내부의 지역차별 행위가 소멸했고 이는 결국 분열되어 있던 열도의 다양한 지역과 인종간에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장은수, 20세기는 독일, 일본 21세기에는 한국이 세계를 주도한다, 1995) 이같은 해석은 장은수씨가 오늘날 한국의 고질적인 경상도 독재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독일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제시한 것인데, 특이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필자의 해석인데, 이토 암살사건은 일한합병을 20년 정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와 조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을사년 신협약의 체결을 주도하고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일본에 부담이 되는 조선 합병을 결코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다만 일진회 등 조선의 혁명세력이 청원하던 바였으나, 안중근의 이토 살해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여론은 급속히 합병으로 기울게 되었으니 안중근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애국을 한 셈이 되었다. (김완섭, 친일파를 위한 변명, 2002, 춘추사)

물론 안중근 본인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이같은 결과들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는 이등박문을 제거하게 되면 조선이 다시 독립할 수 있고 동양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어떠한 중요한 사건을 만들어낸 사람의 의도와 그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것 역시 역사를 평가하는 일을 힘들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된다.

한국인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조사를 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세종대왕, 이순신 제독, 김구, 안중근 등이 인물들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세종과 이순신은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한국의 영웅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들인데, 세종은 한글 창제 등 수많은 업적으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성군이었으며 이순신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낸 훌륭한 제독이었기 때문이다. 세종과 이순신은 한국인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으므로, 한국이 낳은 국보급 인물들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비하면 김구나 안중근 같은 인물들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에서 일본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인물 자체로는 어떤 점이 훌륭하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즉 이같은 인물들은 한국의 비정상적인 반일교육이 만들어낸 가짜 위인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비하면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일본의 이등박문이나 메이지 천황은 서구의 아시아 침략이 절정에 달해있을 때 일본의 부국강병을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들로서, 일본이 세계에 자랑할만한 국보급 위인들이라고 하겠다. 실제로도 오늘날 세계 역사학계에서 메이지 천황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이등박문 역시 당시 독일의 비스마르크, 청의 이홍장과 함께 세계 3대 정치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에 비해 김구나 안중근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만약 누군가 미국이나 유럽의 역사학자들에게 안중근과 김구를 아느냐고 물어보고 돌아다닌다면 매우 실망스런 결과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김구와 안중근은 조선의 혁명기에 낡은 왕조에 충성하면서 변화에 극렬하게 저항했던 보수반동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김구는 1896년 조선의 황해도에서 스치다 士田라는 나가사키 현 출신의 상인을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한 뒤, 관헌의 체포를 피해 중국으로 도망친 殺人鬼인데,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발랐다.

김구는 당시 객주에서 우연히 신분을 숨기고 있던 스치다를 발견했는데, 단지 일본인으로 생각되었고 閔后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복수심에 불타 이처럼 처참한 살인을 행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유교 교육을 받은 無知莫知한 조선인이라지만 추정만으로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지른다는 타고난 살인마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인물이 이후 관헌을 피해 중국으로 달아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것을 만들어 소위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 운동의 수준이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894년 이후의 조선 정세는 친일 혁명세력과 반일 수구세력의 전쟁터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의 내전은 1895년의 단발령과 1907년의 군대해산이라는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격화되었다.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조선 유교사회와 완전히 결별을 각오해야만 하는 상징적인 조치로서, 당시 조선의 혁명가들은 궁궐 앞에 대포를 설치해놓고 국왕의 頭髮을 잘랐다. 국왕의 단발에 성공한 혁명세력은
전국에서 강제로 단발을 실시했는데, 이 때 김구와 같은 수구세력들이 군대를 일으켜 저항했으므로 그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겨우 머리카락 때문에 라고 파악해서는 안 되는데, 당시는 頭髮을 자르는 문제가 혁명세력과 수구세력이 충돌하는 戰線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조선의 혁명세력은 수구세력의 首魁인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뒤 군대를 해산했다. 이 때 해산된 군인들은 조선왕조에 충성하는 수구파들과 연합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때의 내전은 2년간 지속되었다. 안중근은 이 2차 내전에 참가한 수구반동파였으며 이토 공은 그 와중에서 희생된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 공을 살해한 뒤 일본제국의 법정에서 자신은 대한제국의 군인이며 한국과 일본은 전쟁 중이므로 포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내전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수긍할만한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안중근의 죄는 살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역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역사의 올바른 전진을 가로막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관성집단을 우리는 흔히 수구반동 세력이라 칭하는데, 이 같은 반역의 무리들이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기고 그 과정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백번 죽어 마땅한 것이다. 또한 역사의 전진을 위해 반역의 무리들을 처단하는 살인은 정당한 것이니, 살인 자체는 범죄가 아니되 어떤 뜻으로 어떤 상황에서 살인을 했는가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태평성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살인을 죄악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많은데, 지나간 시대의 혁명기를 평가할 때에는 살인에 대해서도 보다 능동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옳다. 즉 혁명의 과정에서 더욱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살인이 불가피하다면 이는 주저 없이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1879년 조선의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의 양반계급이었으며, 안중근은 어린 시절부터 글 읽기보다 무술에 열중했던 무인 기질의 인물이었다. 안중근의 아버지는 1894년 동학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조직해 동학군을 진압했는데, 안중근도 이 때 부친을 따라 전투에 참가하였다.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으로서 안중근의 수구반동적인 성향은 이때부터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후 안중근은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에 입교하였고 프랑스 신부로부터 신학문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안중근은 1907년 고종의 축출과 군대해산으로 조선에서 2차 내전이 발생하자 수구파에 가담해 싸웠다. 그는 오늘날 블라디보스톡 근처인 연해주로 가서 반란군을 조직, 주로 일본군의 부대를 기습하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1908년에는 함경북도 경흥까지 쳐들어와 혁명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1894년에 부친과 함께 동학 혁명군을 토벌했던 반동적인 성향을 되풀이한 것이다.

당시 안중근이 소속되어 있던 朝鮮 傀儡軍은 연해주 일대의 100명도 안되는 소규모 부대로서, 1908년 함경북도 회령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한 뒤에는 흔적도 없이 해산되어버렸다. 이는 연해주 일대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이같은 흉악무도한 수구파들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릴라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안중근은 1909년 3월 몇몇 과격분자들을 모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손가락을 잘랐다. 그 해 10월 伊藤博文 공이 러시아 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假裝, 하얼빈 驛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고 환영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이토 공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3발을 명중시켰다.

이토 공의 얼굴을 모르던 안중근은 처음 기차에서 내리던 이토의 수행원에게 총을 쏘았고, 이어 이토에게도 사격을 가했다. 역에서 총성이 울리자 역을 경비하던 러시아 병사들과 환영군중들은 일제히 총소리가 나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었고, 이토 공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그는 숨지기 전 자신을 저격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朝鮮 義烈團의 안중근이라는 답변을 듣고 ‘바보 같은 놈’ 이라고 크게 탄식한 뒤 숨을 거두었다.
처음 안중근의 신병을 확보했던 러시아는 이 사건의 정치적인 중요성을 감안, 곧바로 범인을 일본 총영사관으로 넘겼다. 일본 정부는 곧 안중근을 뤼순으로 이송하여 뤼순감옥에 수감하였다.
그 해 겨울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안중근은 자신이 조선의병의 참모중장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본과 조선은 전쟁 중이며 자신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조선군대의 장성으로서 전쟁행위를 수행한 것이라 주장했다. 즉 대한의용군 사령관으로서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공을 총살했으니 포로 대우를 해달라는 것인데, 한국의용병 참모중장이라느니 대한의용군 사령관이라느니 하는 것은 스스로 아무렇게나 지어 붙인 거짓 직함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당시 신속한 조선혁명의 진전에 불만을 품은 몇몇 수구파들과 당을 지어 인민의 생지옥인 조선왕조를 재건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안중근은 뤼순의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10년 3월26일 처형되었다. 만약 일본이 아니었다면 즉 조선이나 청국, 혹은 러시아였다면 그는 간단한 절차를 거친 뒤 즉결처분되었을 것이 분명한데, 안중근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일국의 최고 정치가를 암살한 범인에게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기소와 변론, 최후진술을 거쳐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또한 범인의 주장을 충분히 경청하며 자서전을 출판하도록 배려하는 등의 관대한 제도는 당시의 세계 각국의 야만적인 정치 행태를 감안할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초 담당검사는 이 같은 안중근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무기징역을 구형하려 하였으나, 극형을 구형하라는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어쩔 수없이 사형을 구형하였다고 한다. 즉 당시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안중근은 이후에도 살아남아 자신의 터무니없는 논리를 선전하고 다녔을 것이라는 얘기인데, 이는 다른 민족의 입장을 십분 배려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처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안중근은 이듬해인 1910년 2월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자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조선대교구의 뮈텔 주교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부탁했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안중근을 심하게 비난했다. 뮈텔 주교는 당시 일기에서, “천주교인으로서 살인을 저지른 안중근의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며, 이토 공은 그동안 조선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조선인들은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침략의 원흉으로만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조선인들이 이토의 죽음에 환호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뮈텔 주교가 끝내 執典을 거부하자 안중근의 세례를 담당했던 다른 조선인 신부가 뤼순으로 가서 안중근의 최후 안식미사를 집전했다.

이 같은 흉악범 안중근에 대한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평가는 어떠한가. 놀랍게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안중근은 조선민족의 영웅이며 이등박문은 침략자라는 것이다. 한국의 거리에는 태극기와 함께 안중근의 손도장이 찍힌 大韓國人이라는 휘호를 붙인 차량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는데, 이처럼 안중근은 한국인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만고의 애국자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은 전 국민에게 조선혁명의 완성이었던 일한합병을 전면 부정하고 미개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도록 반일 세뇌교육을 강요하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마저도 이 같은 시각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일본에 오기 전까지는 일본 사회의 이 같은 시각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이후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사형 당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이등박문은 일본을 위해 일하다 순국한 애국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안중근 또한 한국에서 대표적인 애국자로 추앙 받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일본인에게 안중근은 현대 일본의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로, 한국인에게 이등박문은 조선을 침탈한 원수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일관계의 비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그러나 이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뿐, 일본에서 안중근을 ‘현대 일본의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일본인들은 이등박문을 일본의 국부로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안중근을 일본의 원수로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

심지어 오늘날 일본의 역사 바로잡기 운동에서 중심에 서 있는 ‘만드는 모임’에서도 안중근은 한국의 영웅이다, 안중근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발언이 나오고 있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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