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6] 민비사건과 한국인의 정체성 p221

[ 조선인가 일본인가 - 한국인의 정체성 ]
최근 필자는 인터넷의 한 지지자로부터 특이한 e-mail을 받았다. <대한황실 재건회>라는 조직에서 필자에 대한 대대적인 인신공격이 시작되었으니 대처하라는 내용인데, 증거물로 한 사이트에 게재된 인신공격성 글과 사진 등을 동봉하고 있었다. 지난 해 이후 나에 대한 인신공격과 살해협박 등은 매우 흔하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대한황실 재건회>라는 이름은 나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

한국을 연구하는 외국인들의 책을 보면 종전 후 한국이 독립할 때 조선의 왕실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일에 대해 궁금해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는 한국인인 내가 생각해보아도 매우 이상한 일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예전에 나는 이방자 여사라는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리고 이방자가 마사코라는 이름의 일본인이라는 사실, 晉과 玖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은 아마도 5%도 안될 것이다. 조선 왕실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친한파 일본인들이 더 열렬한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조선의 왕족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조선을 경멸하는 한국인들이지만 조선시대의 사극은 대단히 좋아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의 공중파 방송에서 조선 왕실의 역사를 다루는 드라마는 연중 끊일 날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 조선 왕실의 역사에 이렇게 관심이 많고 또한 조선왕족인 전주이씨가 전체 인구의 10%를 넘고 있는데도 한국에서는 그동안 왕실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한국인들은 겉으로는 조선의 왕족이며 귀족이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조선을 증오하는 정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을 증오하지만 또한 조선을 그리워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인이다.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어떤가. 현대 한국은 그 출발기부터 경제발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일본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일본은 한국에 있어 부모와 같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일본을 증오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인이다.
지난 해 은퇴한 서울대의 김윤식 교수(1936년생, 국문학, 한국 최고의 문학평론가)에 따르면, 한국의 주요 대학에 일본어학과가 없는 것은 우리가 일본을 외국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전전세대들은 누구나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전후세대의 반일 감정 탓으로 표현할 수 없을 뿐이다.

한국인들에게 일본이 영향을 미친 기간은 조선에 비해 훨씬 짧았지만 그 효과는 훨씬 더 강력했다. 그러나 패전 후 미국에 의해 반일교육을 강요당한 결과, 오늘날 한국인들은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뿌리를 조선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대한황실재건회>와 같은 단체가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도대체 이들은 옛 조선의 왕실을 재건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아마도 일본이나 영국처럼 왕실을 만들게 되면 조선의 후예로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명성황후 신드롬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 명성황후 신드롬 ]
‘명성황후’는 일-한 교과서 분쟁이 시작된 2001년 한국 문화계의 화두였다. 명성황후란 조선말 개혁에 극단적으로 저항하다가 조-일 혁명세력의 연합공격을 받고 살해당한 왕비를 말한다. 이 여자는 말하는 사람의 평가에 따라 민비, 민후, 명성황후 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과거 한국에서는 “민후같은 년”이라고 하면 여성에게 가장 치욕스런 욕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민비는 조선을 망친 왕비로서 인민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런 인물이 교과서 분쟁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애국과 충절의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드라마, 뮤지컬, 연극, 영화 등 모든 문화장르에서 만고의 애국자로 추모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비를 구국의 순교자로 미화하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간헐적으로 존재해 왔다. 일찍이 극우 성향의 한국 작가 이문열은 <여우사냥>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민비의 명예회복(?)에 앞장서왔는데, 최근 이를 한국의 극단이 <명성황후 The Last Emperess>라는 이름의 뮤지컬로 만들었다. 이 뮤지컬은 국내에서도 성공했고 이어 일본과 미국, 영국 등에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이 최근 들어 교과서 분쟁으로 빚어진 반일감정에 편승하여 TV의 사극, 연극공연, 소설, 음반, 영화와 뮤직비디오 등으로 확대되면서 반일감정의 상업화 현상이 나타난 것인데, 한국 언론은 이를 "명성황후 신드롬"이라 부르고 있다.

이 신드롬은 1년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 이어, 작년 말 성악가 조수미가 참여한 명성황후 OST 음반이 발매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조수미는 한국이 낳은 세계 정상의 성악가로서, 카라얀이 ‘신의 목소리’라고 절찬한 바 있는 국보급 가수이다. 정규 소프라노의 노래가 오랫동안 가요순위 1위를 차지하는 사태는 한국에서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조수미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악독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무사들을 사주하여 조선의 궁궐에 침입, 구국의 희망인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한다는 스토리가 잘 절제된 화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뮤직비디오와 OST 음반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출시되기도 전 이미 30만개가 예약 판매되었으며, 출시 이후 단 3개월만에 수백만장이 판매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의 발달된 인터넷망을 통해 이 뮤직비디오가 거의 모든 웹사이트에 게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말부터 한국인이라면 접속하는 사이트마다 올라와 있는 명성황후 뮤직비디오를 싫더라도 수십번씩 보고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X-Japan이 등장한 이래 한국의 신세대에게는 강력한 일본 문화의 바람이 불어닥친 적이 있었다. 이 유행은 X-Japan과 하루키, 재패니메이션을 알지 못하면 그 집단의 정서를 공유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신세대들에게 반일감정보다는 친일감정이 더 보편적이라 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호의와 동경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는데, 명성황후 신드롬은 이 같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최초의 인터넷 세대들은 10년 만에 친일에서 반일로 획기적인 정서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 갑오개혁과 민비시해사건 ]
동학농민운동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침략 공세를 펴던 일제는 갑오개혁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명성황후는 일제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제를 배후로 한 개혁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으로 대륙을 침략하려던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정책의 장애물인 명성황후와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 낭인들을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한 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체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국사, p337)

이것이 한국 정부가 명성황후 신드롬을 통해 전파하고자 하는 민비시해 사건의 전말이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살해된 구국의 순교자 명성황후, 이것이 최근 한국인들에게 정착된 명성황후의 이미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진실은 과연 어떠했는가.

1894년 5월, 동학농민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자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도 즉각 대응 출병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청국과 조선정부에 시정개혁과 조선의 독립을 제안하였으나, 청국과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기습, 점령한 뒤 정부를 개혁파로 교체한 뒤 무력으로 조선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하는데, 조선 최초의 근대개혁이자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조선에 이식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점령한 뒤 시행한 개혁과 완전히 같은 것으로서, 당시 일본군이 동아시아 지역의 혁명군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조선의 수도를 장악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 일본은 곧이어 평양성 전투에서 이홍장의 정예군을 궤멸하고 요동반도에서 청국의 해군을 격파한 뒤, 파죽지세로 만주와 산동반도 등으로 진격하였다. 곧 북경 함락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자 청국은 항복하였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대만과 조선, 만주 지역을 넘겨받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이 조선의 보호국이던 청을 격퇴하고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자 조선은 300년 만에 청으로부터 완전독립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의 후원으로 시정개혁조치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조선은 일본의 뒤를 이어 동아시아 두번째의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뿐, 신조선과 일본의 앞에는 더 큰 적 러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전략은 만주와 조선, 일본을 점령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해 3국간섭을 자행하였는데, 이는 만주와 산동반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러독프 연합군과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당시 국력으로 이들 강대국과 맞설 수 없었던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만주와 산동반도에서 철수했던 것이다.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고 조선반도에서도 철수하게 되자 민비와 조선의 수구세력은 러시아를 등에 업고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민비는 김홍집과 박영효가 이끌고 있는 혁명정부를 점차 압박해 들어가며 갑오개혁의 성과들을 하나둘씩 원점으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정계에서는 점점 친러파의 입김이 세어졌고, 몇 달 후 김홍집은 총리직에서 실각했으며 1894년의 혁명정부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공사 이노우에도 퇴조하는 일본 세력과 함께 동경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같은 정세가 지속되면서 1895년 8월이 되자 조선 내각에는 개혁세력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민비의 사주를 받은 친러파들만 남게 되었다. 민비가 주도하는 친러파들은 시정개혁의 중심이던 군국기무처를 해산하고 혁명정부가 이룩해놓은 모든 개혁의 성과들을 원점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개혁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일본이 빠진 조선의 개혁세력은 너무나도 힘이 약했던 것이다. 이에 당시 조선 혁명세력을 이끌고 있던 박영효는 수구파의 수괴인 민비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박영효의 음모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개화 이후, 고종은 밖으로 일본의 견제를 받고 안으로는 우리 정부(군국기무처를 말함)가 독주하여 무슨 일을 처리하려 할 때 한 건도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궁(민비를 말함)은 이를 매우 분통히 여기고 점차 고종의 복권을 꾀하여 러시아와 내통하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중궁의 행위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었으나 그는 중궁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중궁을 살해하지 않으면 그 화근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날짜를 정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일본으로 병력을 요청했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한 사이여서 자기의 뜻을 내통하였으나 유길준은 그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박영효는 자기의 음모가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변장한 후 일병에게 호위를 요청하여 용산으로 가서 기선을 타고 도주하였다. 그의 일당 申應熙, 李圭完 등도 그와 함께 도주하였다.(敎文社, 梅泉野錄, 1994, p347)

박영효는 조선의 왕족으로서 1884년 조선의 쿠데타를 주도한 혁명가이다. 당시 쿠데타는 성공했으나 민비가 청국의 군대를 끌어들이고 일본군-조선혁명군으로 구성된 혁명수비대가 청군과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3일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일청전쟁 이후 귀국하여 2차 조선혁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개화인사인 유길준을 동지로 생각해 민비 살해를 논의했으나 유길준은 그 사실을 고종에게 밀고해버린 것이다.

이때 일본으로 도주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박영효는 이후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까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것은 1884년에 이어 그의 두 번째 망명이 되었다. 항상 일본군과 함께 조선혁명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이 패퇴할 때마다 일본에 망명해야만 했던 박영효의 정치역정은 당시 다른 모든 아시아 혁명가들의 운명을 대변해주고 있다. 일본은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한 혁명의 기지였던 것이다.

일본에 망명한 뒤에도 박영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을 면담하고 조선에 남아있는 동지들과 대원군 등에게 밀사를 보내 민비 제거의 당위성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이들은 대원군이 거사의 정치적인 방패막이가 되어 여론을 관리하고 일본 측은 군사행동을 맡기로 각각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많은 조선의 혁명가들이 일본군 행동대에 참여하였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혁명군은 경복궁을 기습하였다. 당시 경복궁은 미국의 퇴역 육군소장 윌리엄 다이 장군이 이끄는 500여명의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으나, 치밀하게 준비된 혁명군은 몇 시간의 전투 끝에 다이 장군의 수비군을 격퇴하고 경복궁을 장악할 수 있었다. 혁명군에 의해 경복궁이 포위되자 민비 체포조가 신속하게 궁궐을 수색했다. 곧 궁녀들 틈에 변장을 하고 숨어있던 민비가 발각되었으며, 평소 민비와 교분이 있던 일본 여인이 그를 확인해주었다. 민비는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혁명군은 그녀의 목을 자른 뒤 시체를 불태워버렸다.
이날 새벽 혁명군의 경복궁 공격과 때를 맞추어 대원군은 서울 시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격문을 붙였다.

“최근 민비를 중심으로 한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함으로 인해 5백년 종사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를 보위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을미사변은 1894년에 이은 제2차 경복궁 쿠데타였으며, 개혁파의 입장에서는 위기에 빠진 조선 혁명을 구해내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이 2차 혁명이 성공함으로 인해 조-일 연합의 혁명세력은 민비와 친러파들을 제거하고 혁명정부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조-일 혁명세력은 조선을 방패막이로 삼아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었고, 일본은 보다 국력을 키워 러시아를 견제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조선이 민비 등 친러 수구파에 의해 장악당하게 되면 일본의 운명도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처지로 변했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투입하고 있었는데, 이 철도는 의심할 바 없이 러시아의 동아시아 침략군 수송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규군으로 러시아 등 3국 연합에 맞설 수 없었던 조-일 연합은 조선혁명의 교두보를 지켜내기 위해 소규모 게릴라전을 통해 흉적을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이후 실각했던 김홍집은 다시 총리대신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고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등 개혁세력들이 속속 입각해 중단되었던 개혁조치를 다시 진행해 나갔다. 이 기간동안 고종은 혁명군의 인질이 되어 일본군 훈련대가 수비하는 경복궁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6개월이 흐른 1896년 2월, 미국공사 앨런과 러시아공사 웨베르 등은 어느 날 새벽 고종을 경복궁에서 몰래 빼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사관으로 조정을 천도함)이라 한다. 이후 고종은 러시아군의 경호 아래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김홍집, 유길준 등 혁명정부의 각료들을 모조리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한 날 아침, 파천 소식을 접하고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하던 총리대신 김홍집은 광화문 앞에서 무장한 경찰에게 체포되어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채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폭도들은 김홍집을 때려죽인 뒤 그의 시체를 손발이 묶인 채로 발길질하며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개처럼 끌고 가 종각에 팽개쳐버렸다. 공식적으로 조선반도에서 철수한 일본은 이같은 조선 혁명의 실패를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향후 일한관계에서 민비 살해사건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만약 한국 측에서 주장하는 대로 ‘108년 전 일본 공사가 깡패들을 동원하여 조선의 궁궐에 난입, 국모를 죽이고 강간한 사건’이라면 일본은 한국과 북조선에 대해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게다가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그려지고 있는 바 그 왕비가 외세에 대항하여 힘겹게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끌어가던 구국의 희망이었다면 그 죄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반일교육과 반일 미디어로 인해 이와 같은 인식을 지니게 되었고 그런 잔혹한 범죄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일본을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민비라는 인물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흉적이었으며, 일본에 앞서 조선의 개혁세력 자체에서도 끊임없이 민비 살해를 기도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만이 조선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면 일본은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희생한 벗이요 은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이처럼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면 일본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찾게 될 것이다. 따라서 108년 전 조선의 수도에서 발생한 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아니라, 일한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지난 2001년 한국에서는 반일감정을 상업화하는 소설이 한 권 등장했다. 이른바 <황태자비 납치사건>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한국인 2명이 동경에 잠입, 일본의 황태자비를 납치해간다는 스토리로 시작된다. 이 책을 쓴 김진명은 10년 전 남북한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결국은 일본에 핵무기를 발사한다는 내용의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책은 대단히 유치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200만부 이상 판매되었고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2001년의 <황태자비 납치사건>도 50만부 이상 판매된 성공작이었다. 반일감정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가장 수지맞는 사업이다.

한국인들이 황태자비를 납치해간 것은 그를 인질로 해서 일본정부로부터 과거 민비살해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를 입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435호 문서'라고 불리는 증거인데, 민비시해 사건의 전말이 일본군에 의해 자세하게 기록된 문서이다. 이 문서는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린 것인데, 한국인들은 이것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람들이다. 일본의 다나카 형사는 435호 문서를 제공하지 않으면 황태자비를 살해하겠다는 범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나카 형사는 매우 힘들여 그 문서를 입수하였고 이를 범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역사 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마지막 재판이 열렸다. 한국측 변호사는 근거 자료가 없어 더 이상 밀고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일본측은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두 범인과 황태자비가 법정에 나타난다. 납치되어 있던 동안 범인들은 황태자비를 잘 보호해 주었고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황태자비는 435호 문서를 읽고 스스로 범인들에게 협조할 것을 결심한다. 황태자비는 한국측 증인으로 일본측과 대항하여 진실을 가려내고자 했다. 그녀는 435호 문서를 일본인 앞에 대항하듯 읽어내려갔고, 황태자비라는 칭호를 포기한 채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는 현명한 세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줄거리이다.

즉 일본인들이 직접 기록한 극비문서에는 일본 낭인들이 민비를 살해한 뒤 시체를 돌아가면서 강간했다는 증언이 있고, 이것이 일본의 역사왜곡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책의 목적은 스토리의 재미보다는 민비의 처참한 죽음을 屍姦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극하려는 데 있다고 하겠다. 국모가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다니 얼마나 억울한가, 그에 반해 일본의 황태자비는 얼마나 영민하고 용기가 있는가, 민비도 만약에 살아있었다면 일본의 황태자비와 같았을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단순하게 한국인의 원초적인 분노를 자극하는 시도는 매우 효과적인 반면, 당시 조선 사회를 이해함으로써 진실에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짐이 임어한지 32년이 지나도록 치화가 미흡한 것은 왕후 민씨가 친척을 끌어들여 그들을 좌우에 두어 짐의 이목을 옹폐하고 인명을 박해하였으며, 정령을 탁란케 하고 관직을 매매하였기 때문이다. 민비의 학대는 하늘까지 치솟아 사방에서 도둑이 일어나고 종사는 위태롭게 기울어 조석을 보존할 수 없었다. 짐이 민비의 극악무도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벌을 내리지 못한 것은 짐이 불명한 데도 이유가 있지만 그의 일당이 두려워 그렇게 하였다.(중략) 민비의 죄악은 실로 천지에 가득하여 다시는 종묘를 계승할 수 없기에 우리 왕가의 고사에 의하여 그를 서인으로 폐하는 바이다.”

이것은 민비가 죽은 며칠 뒤 조선 국왕이 발표한 칙서이다. 전호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민비 살해사건은 사실상 조선혁명세력의 제2차 쿠데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후 고종은 혁명세력의 인질이 되어 경복궁에 연금당한 신세였기 때문에 이 칙서는 당시 개혁파의 뜻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역사가인 황현은 “이 조서가 비록 고종의 의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때 사람들은 실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즉 비록 이 조서가 고종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내용은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이는 민비 살해가 조선 내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정당한 거사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실 민비는 그 정치적인 성향에서 개혁에 극렬하게 저항했던 반역자였기에 죽어 마땅하지만, 개인적으로도 그다지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민비는 중전이 된 이후 고종의 애첩들을 모조리 잡아다 고문하거나 죽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선 궁중의 권력은 왕비가 관장하는 내명부와 왕이 관장하는 외명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왕이라 할지라도 내명부의 일은 간여할 수가 없었다. 내명부란 궁중의 여성 세계를 말한다. 따라서 왕후에게는 왕과 동침한 궁녀들을 고문하거나 죽일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민비는 고종의 애첩들에게 성기를 불로 지지는 궁형을 가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으나 간혹은 고종의 애원에 따라 죽음을 면하고 궁궐을 쫓겨난 궁녀도 있었다. 민비는 고종의 애첩들을 학대함으로써 고종을 장악했던 것이다.

또한 민비는 무식하며 탐욕스럽고 극단적으로 이기적이었다. 그는 모든 근심을 미신에 의지해 해결하려 했다. 일찍이 민비는 두 살 난 자신의 아들(후에 순종, 조선의 마지막 임금)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은 20만냥이라는 엄청난 뇌물을 바쳤다. 아들이 청국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은 뒤에는 금강산 1만2천 봉우리마다 각각 돈 1천냥과 쌀 한섬, 비단 한필씩을 바쳐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었다고 한다. 국고 1천2백만냥을 미신에 탕진한 것이다. 당시 쌀 1석이 1냥, 황소 한 마리가 20냥이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금액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언제나 궁중에 무당들을 불러들여 굿판과 치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용한 점쟁이에게는 즉석에서 비단 1백필과 돈 1만냥씩을 건네주는 등, 나랏돈을 물쓰듯이 했다.

민비가 정권을 장악한 뒤 이런 식으로 4년이 흐르자 조선의 국고는 바닥나고 모든 공무원에게 봉급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후 5년간 조선의 문무백관들은 정부에서 한 푼의 급료도 받지 못하였다. 녹봉이 나오지 않자 관료들은 이권브로커가 되어 돈을 긁어모았고, 인민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민비 뿐만이 아니었다. 민비가 조선의 국정을 농단한 22년 동안 민비의 종친인 여흥민씨들은 조선의 모든 요직을 독차지하고 백성의 고혈을 빨았다. 민비 집권기간 중 공직을 맡은 여흥민씨는 2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 조선의 서태후 ]
즉 민비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염원했던 구국의 희망이 아니라 조선을 망친 망국의 원흉인 것이다. 민비는 결코 조선의 쟌다르크가 아니며 차라리 중국의 서태후에 비견할만한 인물이다. 서태후는 청나라 말기 중국을 48년 동안이나 통치하면서 중국의 개혁을 가로막았던 여걸(?)이다.

1898년 중국에서는 광서제가 이끄는 개혁파들에 의해 戊戌變法이라고 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변법은 103일만에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거사에 가담한 개혁파는 모조리 살해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광서황제는 가택연금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광서황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이후 광서제는 10년간 감금당해 있다가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 서태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서태후는 극히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 한 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로만 은 3kg이 들었는데 그 당시 이 돈으로 5000kg(약60석)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 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었다. 또한 서태후는 중국의 궁궐에 전화 설치를 막았는데 그 이유는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 꿇고 있는지 앉아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아주 잔혹했는데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이기도 했다. 이런 악독하고 이상한 여자가 통치하는 국가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만약 중국의 광서제와 개혁파들이 1898년에 서태후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면 중국의 운명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19세기말 유럽제국주의의 침략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 당시 세계 조류에서 뒤쳐져있던 조선과 중국, 하와이는 공통적으로 여성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조선의 민비와 중국의 서태후, 하와이의 릴리오칼리니 여왕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던 중요한 시대에 개혁을 가로막고 사리사욕을 채운 부정적인 인물이다. 하와이는 1893년 혁명이 일어나 개혁에 저항하던 릴리오칼리니 여왕을 축출하고 이후 1897년 미국과 합병함으로써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에서도 역시 1895년 개혁파들이 민비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러시아와 고종의 방해로 개혁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일본이 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물리친 뒤에야 일본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근대화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과 합병한 조선은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중요한 시기 서태후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이후 오랜 혼란기를 거쳐야 했고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진 지역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하와이와 조선의 사례는 스스로 발전할 수 없을 때에는 이웃의 유력한 블럭에 합병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당시 약소국들의 차선책이었음을 보여준다.


[ 조선 노비사회 ]
어쨌거나 사망 당시만 해도 모든 조선인들에게 저주의 대상이었던 민비가 오늘날 자주독립의 순교자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현상은 한국인들이 처해 있는 정체성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조선 왕조를 그리워하고 마치 일본의 통치를 받지 않고 조선왕조가 계속되었다면 오늘날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실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깨끗한 거리와 집, 단정한 옷, 점잖은 말씨 등으로 묘사되는 TV의 사극을 보면서 조선도 나름대로 훌륭한 사회였으며 외세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국가로 유지되었을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오기 전 조선은 너무나도 미개하고 비참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조선은 전형적인 노예사회였다. 전 인구의 30% 이상이 노비였으며 수도인 한성의 경우는 인구의 70% 이상이 노비나 천민이었다. 노예들은 물건처럼 매매되었으며 평생을 주인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평민이나 중인 계급은 노비에 비해 약간의 자유가 있었으나 귀족이나 관리들에게 약탈당하는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양반이라고 불리는 귀족들은 무위도식하면서 하위 계급에 대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어느 학자는 이같은 조선을 20%의 거머리가 나머지 80%의 피를 빨아먹는 구조로 비유하기도 했다.

관직은 공공연하게 매매되었으며 관리들은 전혀 일을 하지 않았다. 1894년의 개혁 이후에도 수도인 한성 부윤은 평균 3개월마다 한번씩 교체되었으며, 1년 예산의 절반이 부윤의 연봉으로 지출되었다고 한다. 관직이 자주 교체되는 것은 단 하루라도 관직에 오르면 퇴임한 뒤에도 그 지위가 평생 유지되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은 사소한 권한이라도 생기게 되면 이를 최대한 이용해 축재를 했다.

한 예로 조선의 장성한 남자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있었는데, 현역복무를 하지 않는 한 매년 베를 납부해야 했다. 이를 군포라 한다. 관원들은 막 태어난 갓난아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했고, 심지어 아직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했다. 전라도 강진의 한 가난한 농부는 사내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포를 징수하러 온 관원들에게 군포대신 황소를 빼앗겼다. 이 농부는 해마다 군포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칼로 아들의 성기를 모두 잘라버렸다. 그런 다음 더 이상 사내아이가 아니므로 군포를 납부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사례이다.

조선은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미개하고 잔혹한 사회로서, 이 같은 사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개혁을 하고 근대화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조선반도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전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이 어느 정도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다른 개발도상국의 부러움을 사는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조선을 위해 일한 일본인들 덕분이다.

조선인들은 스스로 이 같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한 이후에도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아무런 향수도 그리움도 지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조선의 왕실을 재건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일부 한국인들의 시도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이 같은 행동에는 한국과 일본을 이간질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려는 어느 집단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한국은 일본이 낳고 길러낸 자식과 같으며, 한국인은 일본과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진심어린 우호관계를 추구하는 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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