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2] 조선총독부는 강도였나 p169

한국에서 출판된 각종 교과서와 공무원 시험서, 교재, 역사서적 등에 묘사된 토지조사사업 항목을 보면 한국 사회가 일제시대에 대해 얼마나 악의적인 사실왜곡을 일삼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한일합병 직후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한 공무원 시험서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다.

<토지 조사 사업>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본이 우리나라 토지 소유권의 확립을 구실로 하여 펼친 대대적인 조사 사업으로서 식민지 정책 수행을 위하여 토지 소유 관계를 정리하고 개편한 사업이다. 이 사업의 결과 농민들은 당연히 그들의 소유가 되어야 할 농토를 빼앗겼고, 門中 소유 또는 촌락 공유의 토지는 총독부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일제는 여러 가지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의 토지를 빼앗은 결과 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논밭과 임야가 총독부의 소유로 나타났다.

1. 일제의 실시명분: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 확립
2. 실제목적: 토지약탈
3. 방법: 기한부신고제
4. 결과: 1)전 농토의 40%가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어 일본인에게 불하됨 2)우리 농민은 소유권이나 영구 경작권을 잃고 기한부 계약의 소작농으로 전락, 생계유지를 위해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함

다른 종류의 책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묘사를 전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첫째, 조선총독부가 조사사업을 통해 전 국토의 40%, 혹은 어떤 책에서는 50%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토지를 조선인민으로부터 강탈해갔다는 것이다. 또한 둘째, 조사사업의 결과 대부분의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해 삶의 터전을 잃고 거지처럼 국내외 각지를 떠돌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글에서는 조사사업을 둘러싼 이 두 가지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하나씩 논의해 보기로 한다.

그 이전에 2002년부터 새로이 도입된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나타난 조사사업에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기로 한다. 2002년판 국정교과서는 일제시대에 대해 ‘약간’ 진전되어 조사사업에 있어서 문제의 ‘40%’라는 숫자를 삭제하였다. 이는 과거 교과서의 어처구니없는 조작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의 왜곡과 조작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국권 피탈 후 일제는 우리 경제를 식민지 경제 체제로 개편하였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농업 부문에서 강행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토지조사사업에서는 우리 농민이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택한 것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일제는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기관에 속해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탈취한 토지를 동양 拓植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 회사나 개인에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우리 농민은 많은 토지를 빼앗기고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에는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으며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소작권은 인정되지 않고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되어 지주제가 강화되었다. 따라서 소작농은 50%-7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國史, p360)

지난 2001년 5월 한국 정부는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예를 들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바다를 넘는다’거나 ‘조선반도에 진출했다’라는 사소한 용어 사용까지도 일일이 트집을 잡아 35개항의 수정을 요구한 바 있는데, 만약 일본 정부에서 마찬가지 수준으로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대응한다면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만 35개항 정도는 충분히 수정 요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국정 교과서에서는 1876년 개항 이후 1945년까지 70년 동안 일본에 관련된 기술이 통째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 필자가 일본 외무성의 교과서 왜곡문제 담당자라 하더라도 특정 부분을 지적해 수정을 요구할 엄두를 내기 힘든 상황이다. 이것은 온몸이 망가져 어느 특정 부위를 손보는 것으로는 소생하기 힘든 환자와 마찬가지 상태라고 생각된다.

토지조사사업은 통치 초기 대표적인 치적이라 할만한 총독부의 업적이다. 그런데도 그 역사적인 의미와 공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마치 일제가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즉 한국의 교과서 집필자들은 善意로 실시된 일본의 조선통치에 대해 기본적으로 ‘총독부는 강도’라는 조잡한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문장이 나타나는 것이다.


[1. 일제는 과연 조선의 토지를 강탈했는가 ]
한일합병 이후 8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던 토지일제조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 기본조사사업이었다. 이 사업이 성공함으로 인해 비로소 토지 소유권이 법의 보호를 받아 현대적인 소유권 제도가 정착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토지의 생산성이 향상되고 자유로운 토지매매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즉 조사사업은 미개한 조선에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를 이식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였으며, 이 사업의 성공으로 인해 조선은 비로소 원시적인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자체를 착취구조로 보는 사람에게는 양반계급의 착취나 原始資本主義에서 기업영농을 하는 지주의 착취나 마찬가지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는 자본주의는 보다 발달된 착취구조로서 인민에게 보다 나은 삶을 가져다준 경제질서라고 말하고 싶다. 封建사회조차도 경험하지 못한 미개한 조선경제를 단기간에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로 전환시킨 기적과도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 헌신적이고 체계적인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성과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토지에 관한 한 '소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였다. 조선에서 모든 토지는 기본적으로 국가소유였으며 민간의 토지 소유는 사실상 국가에 의한 임대권으로만 존재했다.

조선왕조는 수 백년 동안 전국규모의 토지조사사업을 한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워낙 비용과 인력이 많이 들고 복잡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토지조사를 ‘量田사업’이라 불렀는데, 이는 토지의 성격과 위치 등을 측량해 서류에 기록하는 사업이었다. 이는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부정확한 작업이었으며, 그나마 전국 규모의 양전은 1719년(肅宗45)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200년 동안 중단되어 있었다. 그런 탓에 조선의 토지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소유자 사망, 이주, 개간, 산불 등으로 토지의 성격과 소유자(경작자)가 바뀌었음에도 정부는 실태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1898년 대한제국 정부는 이같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전국규모의 양전사업(光武量田)을 시작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이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이등박문이 이끄는 통감부는 보다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재정혁신과 일제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고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즉,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은 한국 일각에서 주장하는 바 광무양전으로 시작된 자주적인 조사사업을 저지한 뒤 이를 총독부가 토지 강탈사업으로 변질시킨 것이 아니라, 광무양전을 계승해 훨씬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사업으로 대체한 것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이씨왕조를 대신해 대한제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조선총독부는 대단히 미개하고 저개발 상태인 조선 경제 전반에 대해 장기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재정혁신과 안정적인 세금징수를 위해 토지와 인구, 산업 등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당시 모든 현대국가에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일본은 이미 1895년 일본영토로 편입된 대만에서도 같은 성격의 國勢調査를 실시한 적이 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국가에서는 토지의 정확한 위치와 성격, 소유관계가 정확히 밝혀져야만 그에 기반해서 정책이 수립되고 세금을 거둘 수가 있으며 또한 매매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조선 현대화의 초석을 닦은 이 거대한 사업에 대해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에 의해 최초로 체계적인 연구서가 출판된 바 있다.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각종 제도 정비 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착수했고 8년이나 걸려 시행한 큰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이 ‘사업’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 1997년 민음사에서 출판된 <조선토지조사사업>은 564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연구서로서 대한제국의 광무양전지계사업 (光武量田地契事業)과 이를 계승한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을 체계적으로 연구분석한 최초의 실증적인 연구성과이다. 또한 이 책의 저자들 - 金鴻植 미야지마宮嶋博史 李榮薰 朴錫斗 趙錫坤 金載昊 등은 일제 식민통치 시기에 대해 기존 경제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참신한 시각을 지닌 그룹이라는 점에서도 이 작업의 의미는 크다 할 것이다.

기존 연구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책의 저자들은 ‘사업‘을 둘러싼 기존 학설에서 극복되어야 할 세가지 신화로서 ① 일제가 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토지를 강탈해갔다는 이론, ② 일제시대 조선의 사회구성체는 植民地半封建사회였다는 이론, ③ 광무양전이 근대적 토지개혁이었다는 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가운데 저자들이 특히 일제의 토지강탈 신화에 대해 중점적으로 비판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고 자부한다.

지난 1990년대 대우그룹은 상업성이 없는 학술서적 출판을 지원하기위해 대우재단 주도로 대우학술총서 사업을 전개했는데, 이 책도 그 총서 시리즈로 발간되었다. 이 책은 그러나 최근 석연 찮은 이유로 절판된 상태인데, 아마도 저자들의 용 기있는 주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출판계 및 학계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여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서로 인해 그간 반일 책동의 주된 수단으로 악용되어 온 일제의 토지 강탈이론은 비로소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강조된 저자들의 주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사업'의 과정에서 토지의 강탈은 없었다. 사업의 과정에서 국유지(토지) 약탈은 전혀 없었고(이영훈, 539면), ꡐ사업ꡑ 기간에 쌀값(米價)이 4배나 올라 농민의 입장에서 지세의 실질부담은 오히려 절반 정도로 줄었다. 박문규(朴文圭)이래 인정식(印貞植) 이재무(李在茂)신용하(愼鏞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관변학자들에 의해 토지 강탈에 대한 억측이 확산되어온 것은 조선민족의 집단 심성구조가 이를 수용했기 때문이다(김홍식, 22면).

조사사업이 시작되기 이전 조선에는 소유관계가 불분명한 토지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토지가 총독부 소유로 되는 일은 드물었던 것이다. ‘사업’을 영구병합의 꿈을 가진 침입자가 조선의 말단모리배와 결탁해 벌인 한탕의 토지사기극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봉착한 총체적 위기의 본질을 호도하고 왜소화시키는 무책임한 작태이다(김홍식, 31~33면). 또한 토지 경계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지 처리에서 민족별 편기(偏奇)도 없었고 총독부는 전반적으로 민유처분에 관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이영훈, 조석곤)

둘째, '사업'은 근대적 개혁이었다. 이 사업을 통해 조선 총독부는 전국적 범위에서 인민의 사적 소유를 근대적 규정에 따라 법인화하고 증명제도를 구비하여 근대적 소유제도 및 지세제도를 확립했다. ‘사업’은 토지의 경계와 성격을 파악하고 규정하는 측면에서는 이미 이같은 조사가 상당히 철저하게 이루어진 광무양전과 계승관계에 있지만, 소유자 파악의 측면에서는 광무양전이 불철저했고 ꡐ사업ꡑ을 통해 비로소 완결될 수 있었다(미야지마조석곤이영훈).

셋째, 농촌주민 또는 일반인민은 '사업'의 성과를 환영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한국 농민들은 대체로 즐거워하고 협조를 제공하는 분위기였으며, 8년에 걸친 사업기간 동안 농촌 주민이 이에 물리적으로 저항한 사건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총독부는 조사사업을 위해 ‘임시토지조사국’이라는 기관을 설치 운영했는데, 이 작업을 수행한 총독부의 관료들은 실지조사實地調査나 분쟁지 처리에서 엄정한 공정성에 입각해 깨끗하고 강력하며 효율적으로 임했다. 저자들은 이같은 강력한 관료집단이야말로 근대국가에 꼭 필요한 본질적 구성요소였을 것이라고 하며 총독부 관료들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당시 조선총독부의 관료들은 100년이 지난 현대 한국의 공무원들보다도 훌륭한, 수준 높고 청렴한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신고주의는 효율적인 사업방식이었다. 특히 조사사업과 관련해서 한국의 국정교과서와 관변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신고주의에 대해서 저자들은 조선 후기에 이미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뒷받침해주는 제도와 관행이 충분히 발달되어 있어서 신고주의는 그에 조응한 효율적인 소유자 파악방식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씨가(柳氏家) 사례를 보면 신고주의에 대한 대응도 대한제국기의 양전이나 과세지 조사 때와 크게 달랐다(박석두).

즉 조사사업에서 먼저 일정한 기간동안 정해진 양식에 따라 토지의 물목과 소유자로부터 신고를 받은 뒤, 분쟁이 발생한 토지에 대해서만 총독부가 개입해 소유자를 확정해주는 방식은 일제가 조선 인민의 무지를 악용해 토지를 강탈하기 위한 계책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이에 대해 조선인민들은 자발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국정교과서가 기술하고 있는 바, “토지조사사업에서는 우리 농민이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택한 것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일제는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기관에 속해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탈취한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 회사나 개인에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라는 기술이 역사에 대한 악의적인 조작 왜곡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그 자체로 총독부의 통치를 모독하고 국민에게 반일감정을 조장하기 위한 ‘흉기’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토지신고 과정에서는 불법적인 소유권 이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의 교과서와 일부 역사서에서 주장하는 바 50%가 넘는 식민지 국가의 광대한 국유지가 창출되었다는 주장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당시 조선을 영구 병합한 일본은 한국에서 한 탕의 토지사기극을 연출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동일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조선에 이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하여 종래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전근대적 수취관계가 사라지고 대신하여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새로운 수취관계가 발생했으며, 이는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됨으로 인해 비로소 조선의 자본주의 발전이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김홍식, 같은 책)

우선 국정교과서에 의하면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결과 “조선총독부는 조선 땅의 40%를 차지한 최대 지주가 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40%라는 정체불명의 수치가 나타난 배경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업결과 창출된 국유지는 전체 대상면적 490만여 정보의 2.6%에 불과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왜곡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왜곡된 사실을 떠나서, 왜 이 사업이 한국근대화와 연관되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첫째, 토지소유와 관련된 신분적 제약은 없었지만, 국가의 수조권적 토지지배는 잔존하고 있었다. 둘째, 또한 토지로부터의 수익이 소유자에게 전유되기 위해서는 토지생산성이 안정화된다는 조건 하에서 토지의 수익에 대한 여러 형태의 자의적인 수탈이 철폐되어야 한다. 조선후기 생산력의 발전은 집약적 소농경영의 자립화를 향한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국가의 수취체제는 자의적 운영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후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근대적 토지소유는 성립될 수 있다. 국가적 규정의 철폐는 결국 국-민유의 구분을 포함한 소유권 사정과 소유권 공시제도의 완비에 의해서, 토지에 대한 자의적 수취는 수익지가에 근거한 비례세제의 도입으로 해소될 수 있다. 필자가 ‘사업’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사업’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는 것은 이제 ‘사업’을 계기로 자본관계가 농촌에 본격적으로 침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래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전근대적인 수취관계를 대신하여 자본주의의 논리가 새로운 수취관계로 나타났다. 이는 ‘사업’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뜻하는데, 그것은 수취관계의 변화를 의미할 뿐 일부 독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미화론’과는 전혀 무관하다. (같은 책)

이처럼 토지조사사업은 1894년 경복궁 쿠데타 이후 일본의 주도 아래 일관되게 추진되어 온 조선 維新사업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사업이 마무리됨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근대화를 위한 법적 제도적인 정비가 완료되어 순조롭게 자본주의 경제로 이전하게 된다. 1910년대 일본의 조선 통치는 주로 농업 생산성의 향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며, 이 기간동안 방대한 토지조사사업과 농업시설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짐으로서 1920년대의 산미증식 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고 조선의 농업생산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 2. 조사사업으로 인해 농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이가 되었는가 ]
일제시대 초기에 이루어진 토지조사사업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이전 조선시대의 토지제도가 어떻게 정립되고 운용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세조 시절 정립된 과전법을 기초로 운영되었다. 토지는 기본적으로 국가 소유였으며 민간인의 토지 소유는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동안에는 민간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나라는 곧 땅과 백성이며 이는 모두 왕의 소유로 여겨졌다. 토지의 소유권과 매매에 대한 개념과 관행이 정착된 것은 조선 말기였다.

조선 사회에서 왕의 대리인인 관료와 지방수령들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생산된 모든 토지수확물에 대해 일정한 세금을 거둬 중앙으로 보냈다. 이 가운데 科田에 대해서만은 개인의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과전의 소유자는 자신의 토지에서 발생하는 생산물에 대해 농민에게 일정량의 조세를 거둘 수 있었고, 또한 소유권을 매매할 수도 있었다. 과전은 관료에게 지급되는 땅이며, 급료로서의 성격을 가진 토지를 말한다. 이처럼 과전으로 인해 소유권이 민간에게 이양되어 국가의 租(토지에 붙는 세금)를 면제받은 토지를 私田이라 하였다. 즉 과전 체제란 국가가 관료에게 급여 대신 토지의 수조권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전은 세습이 금지되었고 경기 지방에 한정되었는데, 이는 과전(사전)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국가의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 토지제도가 바로 조선사회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근간을 이루었다. 조선이 서유럽이나 일본과 같은 봉건사회였다면 경기 지방은 왕이 직접 세금을 거둬들이는 영토였을 것이고,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신하들은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등에 일정한 봉토를 부여받아 군주로서 독자적인 통치권과 조세징수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중세 조선이나 중국 같은 절대왕조 사회가 봉건사회에 비해 경제발전에서 뒤쳐진 것은 지나친 중앙집권이 관료들의 부패를 가져오고 그 결과 토지의 생산성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농민은 경작권을 가지고 있었다. 경작권이란 조를 납부하고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국가는 모든 토지에 대해 收租權(세금을 받는 권리)을 보유하고 있었고, 농민은 경작권만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은 조를 제외한 생산물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었고, 경작권을 다른 사람에게 매매할 수도 있었다. 즉 조선시대에 토지의 매매란 경작권을 매매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토지를 매수한 경우에도 매수자가 토지를 직접 경작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노비를 통해 경작하거나 농민에게 소작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 소작농은 생산물의 절반 정도를 지주에게 납부하였다. 즉 조선시대의 농민은 자신이 경작권을 가진 땅에 대해서는 국가에 조를 납부하였으며, 타인의 땅을 소작하는 경우에는 소작농이 지주에게 세를 납부하고 지주는 여기에서 국가에 조를 납부한 뒤 나머지를 자신의 소유로 하였다.

조선의 토지 정책에 있어서 가장 큰 우선순위는 안정적인 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조는 왕실 재정과 국가를 유지하는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과전이 늘어나 조가 줄어들자 이를 폐지하고 국가가 관리들에게 직접 녹봉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는 조세의 납부자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 때 토지를 측량하고 조사하는 작업을 양전이라 하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문서를 양안이라 불렀다.

양안에는 토지의 등급, 지형, 위치, 결수, 수조권자와 소유자(경작권자)를 표시하였다. 전국 규모의 양전 사업은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를 통틀어 단 4회만 이루어졌으며, 그나마도 이 가운데 3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란으로 인해 많은 문서와 토지대장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이 이처럼 힘들었기 때문에 대개는 일정 지역에 한해 간헐적인 양전 사업이 진행되었다. 어쨌거나 그 규모를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양전은 힘든 사업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토지의 소유권(경작권) 변동을 막기 위해 농민의 토지 매매를 금지하였고, 과전의 소유자가 죽거나 토지가 황폐화되어 수확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이를 국가 소유로 회수하였다. 그러나 토지의 경작권에 대해서는 농민들이 농사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강력히 보호해줬기 때문에 누구도 농민의 경작지를 마음대로 빼앗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토지 매매는 이루어졌으며, 경작권을 소유한 개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토지를 매매하였다. 그러나 수백 년에 한번씩 이루어지는 양전 사업으로는 이같은 소유권의 변동을 확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보완책을 마련하여 비교적 토지매매가 자유롭게 되었고,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기만 하면 누구나 토지에 대한 소유권(경작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 왕조는 다양한 방법으로 조의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교통수단과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조선의 토지 생산성은 크게 증가할 수 없었다. 즉 토지의 생산성이 증가하기 위해서는 미곡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짐으로서 농산물이 상품으로서의 매력을 지닐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지만, 조선 사회에서는 이같은 전제가 충족되지 못한 탓에 토지는 재산으로서 그리 큰 매력을 가지지 못했다.

특히 18세기부터는 권력보다는 경제력(토지매매를 통한)에 의한 토지소유가 진행되어 갔다. 조선의 토지사유권은 적어도 15세기부터는 확립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 말기에는 토지의 사적 매매가 자유롭게 성행하고 있었다.

한편, 토지소유권의 증명과 매매, 상속 등의 관계에 있어서는 文記가 사용되어 왔다. 문기는 관민이 함께 그 효력을 인정하였으며, 분실시에는 군수에게 가서 입지(立旨) 또는 완문(完文)이라는 증명을 받아서 토지소유권을 입증하였다. 특히 개인간의 토지 거래는 국가에 등록되어 공증 받는 제도가 없어 땅문서(文記)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에 문서를 강탈당하면 땅도 강탈당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로 인하여 토지의 매매는 위축되어 지역 시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지역 관료와 양반들에 의한 토지 강탈과 생산물에 대한 수탈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져 농민의 생활이 피폐해졌다. 이처럼 조선 사회의 원시적인 토지소유 구조는 대규모 기업농의 출현과 농업의 기계화를 저해함으로 인해 자본주의적 경제질서가 태동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일합병 이후 역사적인 토지조사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조선에는 일본의 현대적인 등기제도가 그대로 도입되어 모든 토지에 대해 등급, 종류, 지형, 위치, 크기, 소유자 등이 공공성을 가지고 확정될 수 있었으며, 토지에 대한 자유로운 매매가 시작되고 그 결과 생산성이 크게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에서는 토지의 소유규모가 점차 확대되어 소작농의 비율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점차 땅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소작농이 되거나 도시로 나가 임금노동자가 되고 상업에 종사하는 등 자유로이 직업을 선택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봉건사회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는 크게 세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독립자영농민이 점차 땅의 소유규모를 키워 지주로 성장해야 하고 수공업자나 기술자들은 점차 사업의 규모를 키워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로 성장해야 한다. 또한 유통과 시장이 발달해 사람들은 소비를 위한 생산에서 점차 시장을 겨냥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경제주체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봉건사회였던 서유럽과 일본에서는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이 세가지 변화가 모두 나타났다.

하지만 아무런 봉건사회의 경험을 갖지 못했던 조선에서 이같은 변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백년하청과 같은 일이었으므로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은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일본식 관료제도와 인력이 투입되어 강력하고도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이것이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한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이같은 기반 조성이 마무리된 뒤 조선은 순조롭게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했는데, 농업부문에서 전통적인 자영소농 위주의 생산체제가 지주와 소작농 체제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매우 바람직하고도 자연스런 변화이며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발전된 지주-소작농 체제에 대해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우리 농민은 많은 토지를 빼앗기고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에는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으며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소작권은 인정되지 않고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되어 지주제가 강화되었다. 따라서 소작농은 50%-7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國史, p360) 그리고 이 교과서에는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은 표가 제시되어 있다.

농가 호수 구성비
연도 지주 自作 自小作 小作
1916 2.5 20.1 40.6 36.8
1920 3.3 19.5 37.4 39.8
1932 3.5 16.3 25.4 52.7
출처: 조선총독부 <조선소작연보> 1집

이같은 기술은 역사적인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해석한 모략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한국 정부는 학생들에게 이런 거짓말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지, 모든 문장이 모략과 조작이어서 어디서부터 비판해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표를 보면 지주와 자작농을 제외하고 자소작농과 소작농을 합치면 교과서 문장에 나타난 77%라는 숫자가 된다. 이 77%가 조선시대에 비해 증가한 것인지는 줄어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같은 통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통계 숫자가 드러날 수 있었던 것도 조사사업이 완결되고 총독부에서 해마다 통계숫자를 발표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소작농이 77%라는 것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제쳐두고라도 혹시 바람직하지 않은 변화라 할지라도 조선시대에 비해 악화되었는지 약화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라고 말하여 마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농민 대다수가 소작농으로 ‘전락’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대단히 유치한 중상모략이 아닐 수 없다.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으며” 라는 부분도 마치 3%의 지주가 경작지의 절반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그렇다면 모든 농민이 땅을 골고루 나눠 가지거나 혹은 모두 국가의 소유로 만들고 농민은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사회주의식’ 방식이 옳다는 것인가. 어쨌거나 이같은 문장에서 나는 이 교과서를 집필한 고교 교사들의 무지와 독선, 그리고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만을 찾을 수 있을 뿐 역사를 기술하는 자세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정도 수준의 저급한 교사들에게 단 하나뿐인 국정교과서의 집필을 맡기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준이라는 말인가.

소작료에 대해서도 50% 내지 70%를 지주에게 제공하는 것이 착취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역시 이 소작료라는 것도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게 되면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50%가 높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조선시대에는 아마 소작농이나 자영농이 양반들에게 빼앗기는 비율이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앞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는 대규모 기업농의 출현과 수공업자의 자본가로의 변화, 그리고 시장경제체제의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영농이 대규모화되고 기계화되면 자연히 농민들은 농업에서 이탈하여 도시로 몰려들고 이같은 잉여 인력으로 인해 공장이 돌아가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다. 이것이 소위 ‘자본주의식 수탈’의 구조인데 자본주의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는 접어두더라도 자본주의 체제가 적어도 조선 노예사회나 일본의 봉건사회에 비해서는 한층 발전된 체제라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자본주의 이행기에 접어든 조선의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새로운 직업을 찾거나 혹은 만주나 연해주를 개척하기 위해 이주하는 변화는 당연한 것이며 이같은 변화와 갈등을 겪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바람직하고도 당연한 사회변동을 두고 마치 일제가 우리 민족에 앙심을 품고 괴롭혔다는 증거로 언급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구시대적 농업시스템의 해체’는 조선총독부의 업적이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총독부의 통치를 비판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지금까지 토지조사사업을 둘러싸고 한국정부가 교과서를 통해 주장하는 두 가지 거짓말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총독부는 조사사업을 통해 전 국토의 절반을 강탈한 일도 없고, 조사사업으로 인해 농촌이 해체된 것도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변화일 뿐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정부가 역사를 완전히 거꾸로 가르치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학계에서 어떠한 비판의 목소리도 없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한국인을 제외한 독자들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이 글에서 비판한 두 가지 거짓말도 겨우 국정교과서에서는 한 페이지도 못되는 분량이다. ‘국사’에서 1876년부터 1945년까지를 다룬 분량은 약 50페이지에 달하는데 그 대부분이 이런 식의 거짓말로 채워져 있다. 그나마 2002년판이라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 이 정도인데, 교과서 이외에 각종 참고서와 교재, 고시서적, 공무원 수험서 등의 기술은 교과서보다 훨씬 더 황당하고 어이없는 거짓말들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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