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3] 반일의 광기 p52

[ 1. 센세, 와타시와 도요타데수 ]
대한민국은 1993년 2월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30년 간에 걸친 오랜 군사독재를 마감하고 서구식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각각 5년 간의 임기를 가지고 대한민국을 통치한 김영삼과 김대중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을 위해 노력한 정치인들이지만, 또한 일제시대에 성장해 교육을 받고 사업을 영위했던 세대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자 각각 일본을 방문해 과거 일제시대에 자신을 가르친 스승을 찾아 인사를 하고 그 은혜를 되새기는 기회를 가졌는데,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인사하고 싶은 스승이 있다는 것은 한국의 전후세대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직 채 40이 되지 않은 필자의 경우만 해도 초등학교와 중고교의 교사들 가운데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는데, 이는 한국의 교사들 가운데 존경할만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학생들은 교사를 “꼰대”라고 부르면서 멸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우수한 교사들은 학교를 떠나 사설학원에서 유명 강사로 성공해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즉 교사는 있지만 스승은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 학교의 실정이라고 하겠다.

필자도 어린 시절 노 교사들로부터 일제시대 자신이 존경하던 일본인 스승들의 가르침에 대해 자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는 과거 일본통치 기간 중 조선에 파견되었던 일본교사들이 대단히 높은 자질과 교양을 지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대통령들의 이같은 자발적인 보은에 대해서마저 이를 트집잡아 일본에 가서 옛 스승에게 인사를 한 것은 친일행위라고 비난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야당은 지난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옛 은사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선생님 저 도요타(豊田)입니다”라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한 사실을 들어 아직까지도 정치공세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반일감정이 존재하는 유일한 지역이다. 과거 일본과 전쟁을 통해 피해를 입은 일도 없고 오히려 세계의 한국학계에서는 일본통치로 인해 한국이 대단한 은혜를 입은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인 점을 볼 때 한국에 반일감정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통치를 경험한 대만에 오히려 친일감정이 많은 것과 비교하면 일본통치로 인해 대만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입은 한국의 강한 반일감정은 더더욱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나의 경우만 해도 지난 1995년도 일본에 고베 지진이 발생했을 당시 쓴 글들을 보면, 일본에 그러한 재앙이 닥친 것을 기뻐하면서 이는 우리나라에 하늘이 내려준 기회이니 이를 발판으로 삼아 일본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당시 나는 한 일본인이 “고베에 사는 나의 친척들이 많이 죽어 우리 가족은 슬픔에 빠져 있는데 이를 기뻐하는 한국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항의하는 글에 대해 “예전에 너희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악행에 대해 아무런 반성과 사죄가 없으니 우리는 일본에 재앙이 닥친 일을 기뻐하는 것이다” 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근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강한 반일감정이 존재했다. 나는 일본이 싫어서 일본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고, 간혹 일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쾌한 기분에 가까이하려 하지도 않았다. 또한 ‘괜히 기분 나쁘니까‘ 일본을 한번도 여행하지 않았으며 간혹 일본을 자주 왕복하면서 일본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경멸하는 감정이 생겨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 시기의 나는 실로 “반일감정의 화신”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오늘날에 와서는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일본을 옹호하는 글을 쓰게 되었는가. 그동안 일본인과 결혼한 것도 아니고 친한 일본인이 생겼던 것도 아닌데 나의 생각은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이는 아마도 독서와 사색을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보다 성숙해지고 외국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에 대해 보다 국제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 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한국에서 반일감정은 하나의 열렬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존재하고 있다. 2002년 3.1절을 맞이하여 한국의 국회의원 100여명은 700명에 이르는 친일파 명단을 새로이 발표하고 이들에 대한 처단을 요구한 바 있는데, 여기에는 일제시대의 모든 조선귀족과 일본귀족, 중추원 의원, 작가와 예술가, 학자, 주요 사업가, 여성운동가, 검사와 판사, 형사, 조선총독부 공무원의 명단이 망라되어 있다. 즉 일제시대 조선사회의 모든 주류계층을 친일파로 분류하면서 단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국회의원은 사실상 그 시대에 조선인이 한반도에서 생존한 것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국의 반일감정은 지난해 교과서 문제를 둘러싸고 불거진 파동과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계기로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연일 반일 시위가 잇따랐고, 종전기념일인 8월15일에는 일단의 깡패들이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를 항의하며 집단으로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이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이들은 31운동의 발상지인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모여 비가 내리는 도중 작은 작두를 죽 늘어놓은 뒤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그런 뒤 손을 붕대로 감고 잘린 손가락들을 모아 태극기로 묶어 다른 곳의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떠났다. 이는 과거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행동을 따라 한 것이다. 한국에는 아직도 자동차의 뒤편 유리에 안중근의 손바닥 모양과 “대한국인”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다니는 차들이 많다. 이 손바닥에는 물론 새끼손가락이 없으며 대한국인은 안중근의 친필이다.

지난해 교과서 파동 당시 한국의 분위기는 어린 학생들이 등산로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욕을 하면서 돌을 던질 정도였다고 하니,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의 단체관광객은 한국 여행을 모두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의 TV에는 충청도의 한 도시에 사는 일본인 아내들이 모두 나와 일본의 잘못을 사죄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절을 하는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는데,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분위기라면 당시 주한 일본인들이 얼마나 큰 신변의 위험을 느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업고 문화계에서는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명성황후 신드롬인데, 명성황후란 조선말 개혁에 극단적으로 저항하다가 조선-일본의 혁명세력에게 살해당한 민비를 요즘들어 새로이 부르는 이름이다. 민비에 대해서는 지난 100년 간 조선인들이 여자를 비난할 때 “민비 같은 년”이라고 하면 가장 치욕스런 말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조선을 망친 왕비로서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런 인물이 왜 오늘날 남한에서 갑자기 애국과 충절의 상징처럼 추모되고 있는가.

민비를 구국의 순교자로 미화하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간헐적으로 존재해 왔다. 일찍이 극우 성향의 한국 작가 이문열은 <여우사냥>이라는 연극 대본을 쓰고 이를 한국의 극단이 <명성황후 The Last Emperess>라는 이름의 뮤지컬로 만들어 브로드웨이에 소개하여 서구 언론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이 최근 들어 교과서 분쟁으로 빚어진 반일감정에 편승하여, TV의 사극, 연극공연, 소설, 음반, 영화와 뮤직비디오 등으로 확대되면서 반일감정의 상업화 현상이 나타난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를 "명성황후 신드롬"이라 부르고 있다.

이 신드롬은 1년이 넘게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계속되고 있는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 이어 지난해 말부터는 성악가 조수미가 참여한 명성황후 OST와 뮤직비디오가 발매되면서 그야말로 한국사회에 국수주의의 광풍을 몰고 오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 뮤직비디오에서는 악독한 일본공사(미우라 고로)가 일본의 무사들을 사주하여 조선의 궁궐에 침입, 구국의 희망인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한다는 스토리가 잘 절제된 화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뮤직비디오와 OST 음반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출시되기도 전 이미 30만개가 예약 판매되었으며, 출시 이후 단 3개월만에 수백만장이 판매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의 발달된 인터넷망을 통해 이 뮤직비디오가 거의 모든 웹사이트에 보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말부터 한국인이라면 접속하는 사이트마다 올라와 있는 이 뮤직비디오를 싫더라도 수십번씩 보고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X-Japan이 등장한 이래 한국의 신인류들에게는 일본 음악과 하루키의 소설, 재패니메이션을 알지 못하면 그 집단의 정서를 공유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일본문화의 신드롬이 불어닥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전후 신세대들에게는 반일감정은커녕 오히려 친일감정이 더 보편적이라 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호의와 동경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는데, 명성황후 OST는 모든 인터넷 사회의 주류이자 감각세대인 이들을 친일에서 반일로 획기적인 전환을 경험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번 한국의 명성황후 신드롬은 문화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되고 있으나 그 실제 효과는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그릇된 반일감정을 조장하고 젊은이들에게 더욱 고립된 국수주의인 시각을 갖게 하는 악영향을 불러오고 있으며, 이같은 풍조는 명성황후 신드롬의 상업적인 성공에 힘입어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5월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월드컵 행사는 당초 이를 통해 한일관계가 극적으로 개선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되었으나, 한국 내 반일감정의 상업적 성공과 이로 인한 국수주의의 광풍이 날로 확대되는 한 월드컵 행사를 통한 한일 우호의 새시대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반일감정을 치유하는 정공법으로서는 역시 일본 정부와 학계, 그리고 한국 내 양심세력의 연대를 통해 역사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하나하나 개선해가는 근본적인 치유법만이 최선의 방법이라 하겠다. 서로 오해와 앙심을 품은 두 사람이 제 아무리 어깨동무를 하고 손을 잡고 돌아다닌다 한들 진정한 우정이 생겨날 수가 있겠는가. 이같은 근본적인 개선이 선행되지 않는 한, 한국 사회에서 왜곡된 역사 해석에 편승하여 반일책동을 상업적인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며 그러한 시도가 성공하는 한 한일관계의 오해와 앙금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한국 사회의 반일감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 사회가 하루빨리 미국과 주변국들에 의해 강요된 자학사관과 식민사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지나간 역사에 대한 반성은 어느 국가에서나 필요한 것이겠으나 일본의 경우는 전쟁에 패한 이후 전범국이라는 낙인이 찍혀서인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자기멸시가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일본에서는 과거사에 대한 정당성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보다 강화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주체성 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같은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이를 기반으로 한국과 중국 정부의 역사왜곡과 무리한 주장들에 대해 당당하게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의 태도는 정부각료나 국회에서 간헐적으로 일본인의 주체적인 역사인식을 표명하는 발언이 나왔을 때, 이를 한국 정부에서 항의하면 신속하게 각료가 사죄하고 공직에서 물러나는 등의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해왔다. 일본 정부 자체가 주변국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니 무슨 계기가 있을 때마다 한국과 중국 정부의 반일책동은 날로 심해지고 이를 정치적,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활개를 치는 것이다.

연초 한국의 동아일보와 일본의 아사히신문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지난해에 비해 급격히 악화된 반면 일본인의 반한감정은 개선되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일본인 가운데에는 한국이 싫다는 응답을 한 사람보다 한국이 좋다는 응답을 한 사람이 더 많았으나, 한국인의 경우 일본이 좋다는 사람보다 싫다는 사람의 비율이 3배나 더 높게 나타난 것이다. 숫자로 보면 한국인 가운데 일본이 싫다는 비율은 과반수가 넘어 무려 56%에 달했으니 이는 결코 가벼이 넘길 문제가 아니다.

일본인은 오래 전부터 세계화가 진행된 덕분에 한국이라는 이웃나라 자체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고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대단히 중요한 국가이므로 일본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국은 예전부터 중국과 일본이라는 양대 문화권의 사이에서 지리적으로나 정치외교적으로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즉 조선이 일본 블록에 속하게 되면 중국은 해양세력에 포위되는 배치가 형성되고, 조선이 중국 블록에 속하게 되는 경우 일본은 대륙세력에 의해 고립되는 양상이 되는 것이니 이러한 면에서 일본에게 한국을 포함한 조선반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지역이다.

만일 한국의 반일감정과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가 해소되어 훗날 일본과 한국이 재통일을 이룩하거나 한국-대만-일본을 잇는 정치-경제-군사 블록이 성립할 수 있다면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떨어버리고 그 국력에 맞는 강대국의 지위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은 한국의 역사왜곡과 그에 기인한 반일감정을 해소하는 문제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 2. 한국의 반일 교육 ]
일전에 나는 타쿠쇼쿠 대학의 아라키 교수를 서울에서 만나 반일감정의 원인을 질문한 적이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그는 한국에 반일감정이 강한 이유는 과거 일본과 동화의 정도가 깊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것은 처음 들어보는 해석으로서, 나로서는 이 같은 답변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한국의 역사학자 신복룡 교수 등도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국가의 소멸과 이민족의 통치과정에서 조선민족처럼 저항이 적었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한국사 새로 보기, 풀빛) 동화의 정도가 깊었기 때문에 독립한 뒤 반일감정이 강하다는 것은 기묘한 논리인데, 아마도 이는 조선 특유의 소중화 의식에서 비롯된 자존심의 상처, 정절의 논리 등과 연관시켜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닐 것이다.

이같은 심리학적인 분석은 논외로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강한 반일감정의 이유를 피상적으로 살펴보면 일단 낮은 수준의 국민의식,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반일 교육, 과거사에 대한 왜곡과 몰이해, 조선왕조에 대한 향수, 독립 이데올로기 등등 여러 가지를 언급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정부에 의한 지속적인 반일 교육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된다.

대한민국의 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고교과정 “국사”(한국사) 교과서를 살펴보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 1945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라는 나라를 세상에 다시없는 악마이자 평화롭게 살아가던 조선을 침략해 정복하고 괴롭힌 못된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조선 말기 국가의 재정이 파탄 상태로 내몰리고 군인은 물론 공무원의 월급조차 지불하지 못하게 된 것은 국고를 물쓰듯이 탕진한 민비의 사치와 정권을 쥐고 있던 민씨 척족들의 탐욕과 부패때문인데도 ‘국사’는 이같은 조선말기 지배계층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은 채 망국의 책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전가하고 있다.

또한 조선말기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시행된 조선사회의 근대화개혁에 대해서도 이것은 시종일관 서울에 진주한 일본군의 쿠데타와 그에 따른 강제에 힘입어 가능했던 혁명적인 사회변화로서 개항기 일본이 조선에 끼친 중요한 공헌이라 할 수 있는데, ‘국사’는 일본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은 채 마치 이것이 조선정부의 자발적인 조치였던 것처럼 묘사하면서,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한 민비살해 사건에 대해서만 부당하게 일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로 조선 사회의 발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합병 이후 일본의 통치에 대해서도 척박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개척자들의 노력과 희생, 그리고 조선에 대한 그들의 애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마치 일본이 36년간 조선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고 착취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 많은 조작된 통계수치가 동원되고 있다.

모든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정규 국정교과서가 이처럼 역사에 대한 왜곡과 조작에 근거해 근현대사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이 싹트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 대해 “과거 조선왕조의 학정과 청나라,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었고 많은 희생과 투자를 통해 우리 민족을 문명개화로 이끌어준 부모와 같은 나라”의 이미지 대신 “우리 민족을 괴롭히고 착취한 원수의 나라”로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과거사에 대해 이 같은 천편일률적인 반일사상 이외에 다른 해석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차단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고의적인 세뇌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주요 사례에 대해 한국의 학생들이 한일관계의 과거사에 대해 어떻게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 2-1. 갑오개혁과 민비 시해 사건 ]
개항이후 쌓여온 여러 가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이 높아진 가운데, 농민들의 개혁요구가 거세어지자 정부에서는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 때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통해 경제적 이권을 탈취하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선의 내정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였으며...... 이때 실시된 개혁을 갑오개혁이라 한다. (국사, p336)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 정부는 청국과 조선정부에 시정개혁과 조선의 독립을 함께 추진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청국과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따라 부득이 일본군은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무력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시정개혁 조치를 강행한 것인데, 이 갑오개혁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조선에 이식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근대정신을 전파하는 혁명의 기지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례가 된다.

물론 당시 일본에게는 청나라를 축출하고 조선반도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나 조선의 자주독립과 시정개혁은 당시 조선 사회에도 꼭 필요한 조치였으므로 갑오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건을 ‘국사’에서는 마치 조선정부가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는데도 일본이 “경제적 이권을 탈취하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가 농민군과 협상을 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조치를 약속했지만 휴전 이후 전혀 실천하지 않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침략 공세를 펴던 일제는 갑오개혁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명성황후는 일제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제를 배후로 한 개혁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으로 대륙을 침략하려던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정책의 장애물인 명성황후와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 낭인들을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한 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체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국사, p337)

“국사”의 기술에서 일본이 등장하는 문장에는 이처럼 항상 침략, 야심, 야욕, 만행 등의 용어가 따라붙고 있다. 실제의 민비는 단지 정권을 유지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야욕이외에는 다른 동기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기적이고 극악한 인물이었으나 “국사”에서는 “일제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다 살해당한 자주적이고 애국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사실 당시 민비를 제거하고자 했던 세력은 조선의 혁명세력과 대원군, 일본 등이 있었지만, 당시 조선에게는 민비와 친러 수구파를 제거하지 않고는 모든 개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므로 민비시해는 어느모로보나 잘된 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의 역할은 조선의 혁명가들과 대원군이 미리 짜놓은 각본에 약간의 무력을 동원해준 데 불과했으므로 그 책임이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것인데도 마치 민비살해가 미우라 공사와 일본 정부의 소행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부분이다.

한말의 대학자 黃炫은 <梅泉野錄>에서 이 사건이 발생하기 몇 달 전, 조선 정계의 실권자인 박영효가 민비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유길준이 그 사실을 고종에게 밀고함으로써 거사가 탄로나고 이후 일본에 망명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朴泳孝의 음모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개화 이후, 고종은 밖으로 일본의 경제를 받고 안으로는 우리 정부가 독주하여 무슨 일을 처리하려 할 때 한 건도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궁(민비를 말함)은 이를 매우 분통히 여기고 점차 고종의 복권을 꾀하여 러시아와 내통하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중궁의 행위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었으나 그는 중국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중궁을 살해하지 않으면 그 화근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날짜를 정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일본으로 병력을 요청했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한 사이여서 자기의 뜻을 내통하였으나 유길준은 그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박영효는 자기의 음모가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변장한 후 일병에게 호위를 요청하여 용산으로 가서 기선을 타고 도주하였다. 그의 일당 申應熙, 李圭完 등도 그와 함께 도주하였다.(매천야록 고종 32년 을미년 5월의 기록)

이때 일본으로 도주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박영효는 이후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까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것은 갑신정변에 이어 그의 두 번째 망명생활이다. 이처럼 민비 암살은 일본의 개입 없이도 조선의 뜻 있는 개혁세력 자체에서 오랫동안 준비되고 계획되었던 과업이다. 이 해 5월 박영효의 민비살해 기도가 실패한 이후, 민비는 8월 20일에 이르러 대원군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등이 주도한 거사에 의해 처단되었다. 또한 황현은 민비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어찌된 것인지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이같은 역사를 외면한 채 민비를 일본의 침략에 맞서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애국자로 묘사하고 있다. 황현은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로서 한일합병으로 조선왕조가 멸망하자 자신의 불충을 탓하며 그 해 자결했을 정도로 조선왕조에 충성을 바쳤던 인물이니 그 기술의 객관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청일전쟁의 결과 한반도에서 청 세력을 몰아낸 일본이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민족적 저항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났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저항이 의병투쟁이었다. 최초의 항일의병인 을미의병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 을미의병은 유생들이 주도하였고, 농민들과 동학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국사, p337-337)

이 부분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된 기술이다. 첫째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일본의 조선진출과 그 영향력이 여러 면에서 향상된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은 이후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들어 세계에 선포하도록 하는 한편 군국기무처를 통해 강력한 근대화 개혁을 시행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조선의 여론은 대단히 호의적이었으며 일본을 칭송하고 따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다시 황현 선생의 글을 인용하자면,

..... 만일 러시아의 협조를 얻어 정국을 뒤바꾸어 놓으면 우리나라 관료와 백성들은 일본을 섬기듯 러시아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자, 러시아 공사는 매우 기뻐하여 그의 청을 수락하고 병력을 파견하여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진주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아관파천 이전 조야를 막론하고 조선 사람들이 일본을 “섬겼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여론이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청일 전쟁 이후 일본에 반대하는 저항이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얼마나 역사를 조작 왜곡하여 학생들에게 반일감정을 세뇌하는 데 진력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두 번째 왜곡은 을미의병이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한 부분이다. 을미의병은 민비 시해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단발령에 저항해 일어난 폭동으로 보아야 한다. 민비가 죽은 뒤 고종은 신속하게 민비를 폐서인하였으며, 1895년 8월 22일 조서를 통해 민비로 인해 그동안 자신을 비롯한 왕실과 정부가 얼마나 두려워하며 큰 고통을 당했는가를 대내외에 밝혔다.

“짐이 임어한지 32년이 지나도록 치화가 미흡한 것은 왕후 민씨가 친척을 끌어들여 그들을 좌우에 두어 짐의 이목을 옹폐하고 인명을 박해하였으며, 정령을 탁란케 하고 관직을 매매하였기 때문이다. 민비의 학대는 하늘까지 치솟아 사방에서 도둑이 일어나고 종사는 위태롭게 기울어 조석을 보존할 수 없었다. 짐이 민비의 극악무도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벌을 내리지 못한 것은 짐이 불명한 데도 이유가 있지만 그의 일당이 두려워 그렇게 하였다..... 민비의 죄악은 실로 천지에 가득하여 다시는 종묘를 계승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왕가의 고사에 의하여 그를 서인으로 폐하는 바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황현은 “이 조서가 비록 고종의 의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때 사람들은 실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다. 즉 비록 고종의 이 폐서인 조서가 고종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내용은 진실을 말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이 인정했다는 뜻이다. 이는 민비 살해에 대해 모든 조선인들이 기뻐하는 분위기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을미의병”이라고 불리는 1895년의 잦은 반란들은 일본이나 민비살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단지 당시 김홍집 정부에 의해 강제로 실시되었던 단발령에 항거하기 위한 무장봉기였을 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한국정부는 마치 을미의병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고 민비시해에 항의하기 위해 조선의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반일항거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민비와 친러파를 제거한 조선의 혁명세력은 좌절되었던 개혁조치를 다시 진행하는데 이를 을미개혁이라 한다. 그 과정에서 김홍집 정부는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강제로 추진하였다.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머리를 자르는 것을 금기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머리를 잘리고 자결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큰 저항이 있었다. 그 가르침이란 소학 효행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손 효지시야 (몸의 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이 단발령 소동에서 유생들은 나의 목은 자를 수 있어도 상투를 자를 수는 없다고 저항하다가 강제로 상투를 잘린 뒤에는 목놓아 통곡을 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게 사죄하며 자결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때 단발령에 저항하며 시작된 폭동을 국사에서는 을미의병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들을 반동 폭도라고 칭할 수는 있어도 의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호칭으로 생각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민비와 민씨들을 증오하고 있었으므로 민비 살해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는데, 단발령에 저항하는 폭동을 두고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발생한 “항일의병”으로 추켜세우고 있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 2-2. 31운동과 유관순 ]
31 만세운동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중남미 지역이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고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발생한 사건이다. 이 운동은 최초의 조선독립운동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긴 하지만, 당시 합병이후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투자와 근대화의 시혜를 입으면서 굉장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조선 사회에는 독립이란 백해무익한 일이었으며 시기상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국제정세와 민족의 이해관계를 무시한 채 몇몇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인을 선동하여 시작된 것이 이 만세운동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해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만세 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 군인까지 긴급 출동시켜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들을 교회에 집합시킨 뒤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또 시위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무수한 사람들이 투옥당하였고, 일본 경찰에게 비인도적인 악형을 당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0여만명이며, 일본 군경에게 피살당한 사람은 7,500여 명, 부상자는 1만 6,000여명, 체포된 사람은 4만7,000명이었고 헐리고 불탄 민가가 720여호, 교회가 50여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 (국사, p344)

200만 명이라면 당시 인구 1700만 가운데 12%가 넘는 숫자이니 이 글을 보면 마치 대부분의 조선인이 시위에 참가했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일본 경찰과 군인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사살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교과서에서 이 같은 글을 학습한 학생들은 1919년에 일어났던 일을 머리에 그려보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통치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독립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를 했고, 악독한 일본 군경은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찔러 죽였으며, 사람들이 숨어있는 건물에 대고 기관총과 대포를 쏘아 학살하는 장면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1919년 3월의 한반도는 말 그대로 생지옥을 방불케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나, 이같은 묘사는 엄청난 사실의 왜곡이다. 숫자도 마음대로 갖다 붙인 듯한 정황이 보인다.

죽음은커녕 체형을 받을 정도도 아니었던 3.1운동의 비폭력 항쟁에서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은 전체 인구 중 2.7%인 46만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申福龍, 한국사 새로 보기, 2001)

권위 있는 역사학자가 시위에 참가한 인원을 46만명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국정교과서는 이를 200만명으로 부풀리고 있으니 다른 숫자나 문장들이 얼마나 과장되었을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모든 조선인은 합병조약에 의해 자동으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인에게도 일본의 모든 법체계와 재판제도가 적용되고 있었다. 이 당시 일본은 군사독재체제도 아니었으며 시위나 언론 출판 등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였다. 따라서 단지 시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경찰이 조선인들을 잡아 가두지는 않았을 것이며, 심한 경우 체포되어도 주동자나 폭동을 일으킨 경우가 아니면 훈방으로 풀려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경찰이 한국의 교과서에 묘사된 것처럼 잔혹하게 진압했다면 만세운동이 3개월 동안이나 지속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3개월이 지나도 소요가 가라앉지 않자 본토에서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려 했으나 이렇게 되면 큰 인명피해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판단한 이완용 자작은 신문을 통해 3차례에 걸쳐 조선 민중을 간곡하게 설득했고 그로 인해 31운동은 평화스럽게 막을 내렸던 것이다.

시위대를 교회에 가둬놓고 일제사격을 가해 학살했다는 제암리 사건이나 3.1운동의 과정에서 일본군경에게 7,500명이 학살당했다는 주장도 왜곡되거나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인의 평균수명은 30년 정도로서 1700만 인구 가운데 해마다 60만 명 정도가 사망했을 것이고, 3.1운동의 지속된 3개월 동안에만도 15만 명이 사망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근거로 7,500명이 일본군경에게 피살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건물이 불탄 것이나 소요 중 사람이 죽은 일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일본 군경이 아니라 무정부상태를 틈타 활약한 폭도들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로 31운동 기간동안에는 독립운동과 관련 없는 조선인에 의한 약탈과 방화, 파괴 행위들이 전국에서 발생해 많은 재산과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도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전국적인 소란 상태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를 모두 일본경찰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니 이는 부당한 일이다.

한국의 어린 학생들은 3.1절이 되면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를 배워 부른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이처럼 유관순은 각급 학교에서 31운동의 상징처럼 교육되고 신격화되는 인물이다. 유관순은 1904년 생으로서 3.1운동 당시 15세에 불과했다. 이화학당의 학생으로 있던 중 31운동이 발발해 학교가 휴업하자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가 아오내 장터에서 벌어진 시위를 주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백과사전에서 유관순에 관한 항목을 찾아보면 이때 체포되는 과정에서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 경찰에게 피살되었고 집마저도 불탔다고 되어 있는데, 이 또한 믿기 힘든 얘기다. 사형도 아니고 겨우 3년형에 해당하는 어린 여자아이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왜 아무 이유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다는 것인지.

이후 유관순은 폭력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항소심 재판 도중 검사에게 의자를 집어 던지는 등 소란을 피워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도합 7년형을 선고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법정에서도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난동을 부린 것을 보면 유관순은 상당히 폭력적인 여학생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가 주도한 시위라는 것도 결코 평화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관순이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한 경과는 이렇게 평범한 폭력시위 주동자에 대한 정상적인 법집행이었을 뿐인데, 한국의 교사들은 마치 그가 어린 나이에 일제통치에 끝까지 항거하다가 옥중에서 고문을 당해 살해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위의 노래에서처럼 감옥에 갇혀서도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의 고문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는 것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재판 받고 복역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망한 여자 깡패를 한국에서는 구국운동의 순교자, 조선의 쟌다르크로 묘사해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굉장히’ 어린 소녀가 유관순에 대해서 쓴 글이다.

유관순을 읽고 (1999.8)
유관순 할머니, 안녕하세요? 엄마나 아빠는 어릴 때 할머니를 유관순 언니나 누나라고 불렀다지요. 그러나 저는 할머니의 일생이 적힌 책을 읽고 할머니가 1904년에 태어나셨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올해 95세이죠. 그래서 저는 할머니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옛날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저지른 온갖 만행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나 책, 기사 등을 통해서 많이 알고 있어요. 1919년, 할머니가 고향에 내려가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던 때, 할머니의 나이가 16살이었다니 저는 무척 놀라웠어요. 저는 16살이 되었을 때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아요.

다른 평범한 소녀들처럼 예쁜 옷을 입고 재미난 책도 읽으며 공부가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일본군에게 붙잡혀 온갖 고문을 받으며 돌아가셨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제 스스로 몸이 떨릴 지경이예요.

지금 독립 기념관에 가면 일본 군인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고문하던 광경을 인형으로 재현시켜놓은 장면이 있다고 해요. 그 장면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라고 해요. 그런 고통 속에서도 무엇이 할머니로 하여금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꿋꿋이 지키게 했을까 생각했어요.

할머니, 사실 저는 조금 부끄러워요. 할머니나 다른 분들의 값진 희생으로 제가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거든요. 저는 지금 그때와는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인가 생각해 보아요.

공부 열심히 하는 거요? 부모님 말씀 잘 듣는 거요? 거리에 떨어진 휴지 줍는 거요? 질서를 잘 지키는 거요?...... 왠지 시시하게 생각되네요. 그러나 부모님께서 말씀하셨어요. 하찮게 보이지만 이런 것들이 모여서 이다음에 어른이 되었을 때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요. 그렇다면 열심히 노력해 볼게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쳐주신 할머니, 고맙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저는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 야무지게 해 내는 멋진 아이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안녕히 계세요.
송 하림 드림

이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은 해마다 3.1절이 돌아오면 교사들로부터 악독한 일본 헌병들(경찰을 한국의 학교에서는 굳이 헌병이라고 묘사한다)이 유관순을 어떻게 괴롭혔으며 그가 일본 경찰의 잔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자세히 듣게 된다. 체포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오빠도 체포되었으며, 집도 불타 없어졌다고 배운다. 그런 뒤에 유관순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쓰기를 하고, 유관순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교사가 제대로 가르쳤다면, 대개 아이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울먹이게 될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해마다 유관순의 노래를 부르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은 예전에 한국에서 공산당을 짐승으로 묘사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학생들에게 세뇌했을 때, 학생들은 그림을 그릴 때마다 공산당을 얼굴은 늑대로, 피부는 빨간색으로 그렸던 것과 비슷한 일이다. 그때 공산당의 자리를 오늘날에는 일본이 채우고 있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이나 유관순 기념관, 혹은 3.1운동의 발상지인 파고다 공원 등에 있는 조각이나 그림에는 예외없이 일본군이 만세를 부르는 조선인을 칼로 찔러죽이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 이런 유적지뿐 아니라 일반 교과서나 신문 등에서도 그와 같은 사진을 통해 과거사를 가르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혹은 TV와 책을 통해 일본을 비하하는 세뇌교육을 받고 자라나는 것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이들이 자라서 일본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된다.


[ 2-3. 헤이그 밀사 사건 ]
유관순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 1907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되었던 이준 일행에 관한 ‘신화’가 있다. 나는 어린 시절 교사로부터 이준 열사가 제2차 만국평화회담이 열리고 있는 헤이그까지 가서 회의장 입장을 거절당하자 뿌리치고 들어가 회의장 안에서 칼로 자신의 배를 갈라 내장을 뿌리고 죽었다고 배웠다. 학생들 얘기를 들어보면 요즘에도 교사들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준을 열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준 일행은 고종으로부터 15만원이라는 막대한 돈과 신임장을 가지고 러시아를 통해 유럽까지 갔지만 회의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회의 참석을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어를 잘하는 일행 한 사람이 현지에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자신들의 신분과 파견 목적 등을 알림으로써 이 사건은 세계에 알려졌고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는 계기가 되긴 했으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이준은 자결한 것이 아니라 병을 얻어 죽었다는 것이고 일행 가운데 헐버트와 이상설, 이위종 등은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미국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들은 고종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돈으로 신세계를 유람하면서 행복하게 살다 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객관적인 사실이 명확한 사건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와 교사들이 왜곡 과장해서 가르치는 이유는, 그런 식으로 가르쳐야만 학생들이 일본을 더욱 증오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이들은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갖도록 학생들을 세뇌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며 애국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 3. 반일교육에 대한 일본의 대처 ]
지면의 한계 때문에 몇 가지 사례만을 선정해 고찰해보았지만, 일본과 관련해 한국에서 사실과 다르게 교육되고 있는 사례는 수백 가지를 쉽게 열거할 수 있을 정도로 많다. 거의 전부가 왜곡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기술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 더 힘들 정도이다.

한국의 반일 교육은 과거사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 교과서의 지나치게 감정적인 문장, 그리고 의도적인 수치와 자료의 조작 등에 근거해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국사”에서 임의로 고른 한 페이지만을 살펴보아도 “일제는...한일 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국권마저 강탈하였다.... 강탈한 일제는... 자유를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말살하려 하였다... 관리는 거의 일본인이 차지하였고.. 회유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였다.. 무단 식민통치를 자행.. 독립운동가를 색출하여 처단....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기 위한 간악하고 교활한 통치방식.... 일제가 축출될 때까지.. 민족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강화.. 완전히 말살하려는.. 자원의 수탈에 광분하였다..”(국사, p342) 불과 한 페이지만을 보아도 이처럼 일본에 대해 감정에 격앙된 거의 욕설 수준의 표현들이 가득 차 있다. 이것이 과연 역사책인지 아니면 화장실 낙서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남한의 반일 교육은 종전 이후 60년 가까이 계속되어 오면서 다양한 신화와 왜곡, 잘못된 해석, 오해와 거짓말 등이 추가되어 오늘날에는 매우 정교한 체계를 지닌 세뇌 시스템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같은 남한 내부의 반일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두고 한일관계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집안에 썩은 웅덩이를 그대로 둔 채 시간이 흐르면 모기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와 학계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대응 방법은 지나치게 수동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한국에서 공세적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일본이 그와 같은 자세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이해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

한국 역사교과서의 왜곡과 수치조작은 일본의 교과서에 비해 매우 심각하므로 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차치하고 명백한 것들부터라도 일본정부에서 조사해 하나하나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사실 한국인들은 이같은 잘못된 세뇌교육이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아왔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이렇게 생각하며 항의한다”는 정도만 한국 사회에 알려져도 반일감정의 해소에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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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