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일본의 주장의 근거는 뭔가요? 독도에 관한 일본측 근거가 뭐죠?

 Category : 【 독도 】 Tag :
출처 : [화해를 위해서 (저자:박유하)] 146쪽~175쪽 中 일부발췌.
(1)근대 이전
일본은 예전부터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많은 문헌과 지도 등에 명확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1779년에 만들어진 지도에는 독도가 이미 그 위치까지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일본은 78년 동안이나 울릉도를 실제로 경영했고, 독도는 그때 울릉도를 오가며 들르던 곳이었다.

한국은 '무릉'이라는 이름의 섬이 독도라고 하지만, 한국 측이 독도를 실제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사료에 나오는 문장은 어디까지나 "일설에 이르기를......"이라는 표현이므로 확인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또 한국 측은 우산도가 독도라고 하지만,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만을 지칭하는 것이거나 울릉도 옆의 작은 섬만을 표함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산도가 언급되어 있는 (한국의)문헌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고 대나무가 많다든가 하는 기술이 나오는데, 독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1530년

[신증 동국여지승람] 우산도(于山島), 울릉도(鬱陵島)

(한국의)[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우산도의 위치가 울릉도와 거의 같은 크기고, 그것도 울릉도와 한반도의 중간에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그 위치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또한 독도와 울릉도가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하지만, 울릉도에서는 아주 높은 곳에 가지 않는 한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울릉도에서 보였다고 (한국의)자료에 나오는 섬은 어디까지나 울릉도 바로 옆의 섬인 죽서도이다(이 글에서 자주 나오는 '죽서도'란, 울릉도 바로 옆의 작은 섬이다.) 우산도나 삼봉도가 독도라는 증거는 없다.

조선이 400여 년에 걸쳐 울릉도에 대한 공도정책(400년간 조선은 울릉도에 사람을 거주시키지 않았다)을 펴는 동안, 에도시대초기(1618년)에 일본인 오타니大谷와 무라카와村川 양 집안은 에도막부로부터 도해渡海 허가를 받아 매년 교대로 울릉도에서 조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복을 막부에 헌상하기도 했는데, 독도는 이때 울릉도로 가는 기항지이자 어로지였다. 이들은 1661년에 막부로부터 독도를 정식으로 이양받았다. 에도막부가 울릉도에 가는 허가증을 발급한 것은 일반인들이 마음대로 영해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때문이었을 뿐, 한국의 주장처럼 울릉도를 조선소유=해외지역으로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박유하 세종대교수

박유하 세종대교수

조선은 1438년부터 1881년까지 400년 이상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 공도정책을 시행했는데, 울릉도를 비워둔 것은 (한국측 주장처럼)외적으로부터 조선인을 보호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세금을 피해 (울릉도로)도망친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타니가 울릉도에서 조업하게 된 1618년부터 80년동안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는 울릉도가 비어있고 조선인을 만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울릉도를 일본 영토로 생각하고 도해면허도 내주었다. 그러다가 조선인 어부들이 일본인 어부들이 사용하고 놔두었던 어구를 무단으로 사용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 어민들간에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막부는 즉각 조사에 나섰는데, 조선이 오랫동안 공도정책으로 섬을 비워두었고 일본인이 조업했다는 이유로 울릉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조선과)불화를 빚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 울릉도를 조선령으로 인정했다.

에도 막부가 일본인에 대해 울릉도 도항을 금지한 이유는 '일본령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일본인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출어를 허용했을 뿐이며, 위치도 조선 쪽에 가깝다. 따라서 울릉도는 조선 땅이다. 막부가 군사력을 쓰려면 쓸 수도 있겠지만, 대단치 않은 작은 섬 때문에 이웃나라와의 우호를 잃는 일은 어리석으니 서로 대립하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도 막부는 그렇게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지만, 독도까지 조선 영토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울릉도 주변의 조업을 둘러싼 日-朝 간의 교섭 결과 막부는 1696년 울릉도 도항을 금지하게 되었지만, 독도 도항은 금지되지 않았다.

그 무렵 안용복이 나타나, 존재하지도 않는 직책을 사칭하면서 울릉도와 우산도를 감시하러 왔다고 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그가 말한 우산도란 죽서도였을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그 이유는 아래에 있다), 그의 이 착각이 에도막부와 조선 간의 영토 인식을 혼란시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안용복이 말한 우산도란 독도가 아니고 울릉도 옆의 작은 섬이다. 에도 막부가 일본인에게 도해면허를 내준 것은 일본인들이 독도에서 이미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이 "귀국貴國(귀국-상대편을 높이어, 그의 '나라'를 이르는 말)의 죽도[다케시마], 폐경弊境의 울릉도" 라고 한 표현도 독도를 일본 땅으로 생각했다는 증거이다.

안용복은 울릉도로 갈 때 독도의 존재를 알았다고 하지만, 그러려면 독도는 울릉도의 북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독도는 남동쪽에 있다. 북동쪽에 있는 건 죽서도이니, 그가 본 것은 독도가 아니다. 당시 교섭 후 돗토리鳥取 번의 영주가 조선령으로 인정한 두 섬이란, 울릉도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와 죽서도였다.

울릉도에서 안용복은 일본 어민과 만났다고 말했지만, 그때는 이미 도항을 금지시킨 이후였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그 일본 어민이 자신들이 독도에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지만, 독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니, 안용복의 진술에는 허위가 많았다. 그는 허가를 받지 않고 외국으로 건너가 중죄에 처해진 죄인이었던만큼 그런 식으로 말해 죄를 가볍게 하려 했을 것이다. 조선 역시 안용복을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든 죄인으로서 감금했는데, 조정의 세력이 바뀜에 따라서 안용복을 신뢰하는 분위기가 생겼고 우산도가 조선령이라는 안용복의 말이 조선 내에세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조선의 당시 항해술로는 설사 독도를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직접 독도에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후에 조선이 울릉도 어민을 계획하고 이주시켰지만 조선에서 가기가 용이하지 않아 결국은 다시 복귀시킨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키섬隱岐島에서 독도까지는 쓰시마 해류가 흐르고 있는 해역이어서, 조선반도 본토에서 독도까지 가는 해역보다도 해상과 기상상태가 훨씬 안정되어 있어 항해가 용이했다. 이처럼 일본은 17세기 중반 무렵까지 실제로 독도의 영유권을 갖고 있었다.

(2)근대 초기
1876년에 조선과 일조수호조양 및 일조통상장정을 맺으면서 '일본인 어민 처우규칙'이 만들어졌다. 조선반도와의 왕래가 용이해지자 울릉도에는 일본인 상인들이 많이 건너가게 되었고, 특히 시마네 현과 돗토리 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여 상업과 어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때 시마네 현은 울릉도의 소유권에 대해 메이지 정부에 문의했고 메이지 정부튼 울릉도와 다른 한 섬이 조선령이라는 판단을 내렸는데, 이 때 언급한 다른 한 섬이란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 옆에 있는 작은 섬(죽서도)이었다.

1881년, 조선은 일본배가 많고 무단으로 벌채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파견해 일본에 항의했고, 일본은 1883년에 일본인 254명을 송환했다. 그러나 이때 이규원은 독도에는 가지 않았고, 따라서 독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이후 조선은 울릉도에 자국민을 이주시켰는데, 1894년 당시의 울릉도 주민의 생활은 농업이 중심이었고 어업은 해초를 채취하는 정도였다. 조선인들이 어업을 시작한 것은 1903년에 일본인들이 어업을 시작한 이후이다.

한국 측은 당시의 자료에 독도가 언급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거기서 말하는 섬이 실제로 어디인지는 불확실하다. 당시의 독도는 1849년의 서양인들이 명명에 따라 리양코(리앙쿠르)섬으로 불렸고, 조선에는 독도를 지칭하는 이름이 없었다. 독도에 조선측이 독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904년 이후의 일이고, 이것은 당시에는 독도가 조선령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만일 한국측이 말하는 대로 리양코 섬을 알고 있었고 조선이 편입한 '석도'가 독도라면, 왜 리양코 섬을 석도라고 표기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이다. 독도가 리양코 섬으로 불렸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석'과 '독'이 연관이 있다고 하는 주장은 견강부회일뿐이다. 한국이 말하는 석도란 죽서도일 것이다.

1899년에 나온 자료에도 동경 130도의 울릉도를 '조선 동쪽의 극한' 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독도는 동경 131도 55분이다. 그 밖의 다른 지리지도 울릉도의 속도(屬島)는 우산도, 즉 죽서도라고 표기하고 있으니, 당시 조선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르 인식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또한 한국의 독도를 편입했다는 칙령 41호가 나오기 한 달 전의 [황성신문]은 "울릉도에 부속하는 소육도 중 가장 눈에 띄는 섬은 우산도와 죽도" 라고 보도하고 있지만 리양코섬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독도(다케시마)가 독도로 불리게 된 건 이로부터 5년 후이므로, 이때의 조선의 인식은 독도의 존재를 몰랐던 이규원의 울릉도 인식과 같았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 정부가 울릉도를 조사했을 때 '울릉도 외 죽도'로 지칭된 대상은 설명된 위치, 일정, 지도로 보아 죽서도이다.

1904년. 시마네 현에 사는 한 일본인이 울릉도와 독도의 '영토편입'에 관한 청원서를 냈다. 일본은 울릉도는 조선 땅임을 알고 있었지만 독도에 대해서는 무주지로 판정했다. 이 때 시마네 현의 '송도[마쓰시마,松島]와 죽도[다케시마]'에 관한 문의에 대해 정부는 일본령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때 말한 죽도는 다케시마가 아니라 울릉도이다. 독도에 조선인이 가게 된 건 나카이中井養三浪 라는 어민이 물개조업을 할 때 다른 현의 일본인이 조선인을 고용하게 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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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내각의 결정에 따라 일본은 근대국가로서 다케시마를 영유할 뜻을 확인하고 시마네 현 고시 40호로써 다케시마를 시마네 현에 편입시켰다. 다케시마에서의 물개조업은 이때부터 허가제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1941년에 중지될 때까지 이어졌다. 독도에서 물개가 보기 어려워진 것을 두고 한국은 일본이 씨를 말렸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해방 이후에 독도가 미 공군의 폭격연습장이 되었고 한국이 경비원을 상주시킨 까닭에 물개가 접근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이 독도를 새삼스럽게 영토로 편입한 것은 일본 정부가 근대국가로서 독도를 영유할 뜻을 재확인한 것일 뿐 그 이전에 일본이 독도를 영유하지 않았다거나 다른나라가(조선이) 독도를 영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당시 신문에도 게제되었으니 비밀리에 행해진 것도 아니다. 한국은 그 경우 영토편입 조치를 외국 정부에 통고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당시 국제법상의 의무는 아니었다.

이렇듯 일본은 적법한 방식으로 다케시마를 점유했고, 이 섬을 실효적으로 지배해왔다. 따라서 독도는 1943년의 카이로선언에서 말하는 '폭력 및 탐욕에 의해 탈취' 한 곳에 해당하지 않는다.

(3) 해방 이후
1945년 일본은 패전의 결과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최고사령부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때 쓰여진 1946년 1월의 연합국최고사령관훈령 677호는 일본이 독도에 대해 정치상 혹은 행정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잠정적으로 정지했다. 그리고 1946년의 1033호, 일본 어선의 조업구역을 규정한 맥아더 관련문서에는 독도가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서류들은 모두 그 문서 안에서 일본국의 영토귀속이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기하고 있다. 즉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이 그 독립을 승인하고 모든 권리, 권언 및 청구권을 포기한 '조선'에 독도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미국기록공개문서 등에 명확히 나타나 있다. 말하자면 대일 평화조약 이전의 일련의 조치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임시조치였던 것이다.

이 때 명기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는 한국 영토의 바깥쪽을 연결한 지명이고, 독도는 이 범위 바깥에 있다. 실제로 연합군은 처음에는 오가사와라 제도나 오키나와와 함께 독도를 제외시켰지만, 이 섬들은 후에 일본의 소유로 인정받게 되었다. 따라서 독도의 경우도 최종적인 결정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독도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 전에도 일본 땅이었기 때문에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것이 아니다. 1951년에 한국대사가 미국 정부에 대해 한국에 반환될 섬에 독도를 넣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한 것도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연합국최고사령관훈령 677호를 근거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일본과 연합국 간의 조약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최종적인 조약이므로 이것이 유효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은 1952년 1월, 일방적으로 이승만라인을 선포했는데, 그것은 유진오의 [한일협정이 열리기까지]라는 글에 의하면 평화조약이 비준되기 이전에, 즉 일본이 아직 연합군 통치하에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말하자면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일본땅 독도를 불법점거한 것이다. 이승만 라인에 관해서는 미국, 영국, 중국도 그 불법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후 한국 정부는 이 라인을 넘은 일본 배들을 잇달아 나포했다. 한국이 일본 어부들에게 체형까지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한일관계가 악화되었고, 그것은 국교정상화 교섭에도 영향을 미쳤다.

1953년 1월과 2월에 있었던 제 2차 한일회담 예비교섭 직전에도 한국은 일본 배를 나포했고, 이 때 일본의 어로장이 사살되기도 했다. 일본은 예비회담에서 이 라인의 철폐를 요구했지만, 한국은 오히려 한술 더 떠 독도수비대를 파견했다.

한국 어민들은 처음에는 그냥 조업했지만 나중에는 무장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며 조어했다. 1954년 8월에는 일본 순시선이 한국 어선과 무장경찰의 퇴거를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순시선이 떠나려 하자 갑자기 수십 발의 총격을 가해왔다. 일본은 그해(1954년) 9월,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것을 건의했지만 거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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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라인에 의해 일본 배 230척이 나포되었고, 3척이 침몰했으며, 한국에서 돌려받지 못한 배가 173척에 이른다. 또한 선원이 1791명 억류되었으며, 5명이 사망했다.

한일협정이 성사되기까지 십수 년이나 시간이 걸린 것은 이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양국은 국교정상화 때 독도문제에 관해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을 주고받는데 그쳤다. 이후 한국은 일본의 독도 반환요구에 대해 대화를 거부하며 일본의 주장을 늘 자국 영토에 대한 야심으로 간주하고 침략주의/제국주의의 발로라고만 몰아붙이고 있다.

그런데 1994년에 한국과 일본이 유엔 해양법조약에 함께 가입하게 되었고, 영해를 침범한 어선을 어선이 속한 국가가 관리해 오던 방식에서 200해리 내 연안국이 관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어 1965년의 일한협정을 파기할 필요가 생겼다. 이때 한국은 그 200해리의 기점을 독도로 하자기 했다. 그런데 한국 어선들은 일본 연안에 와서 치어까지 싹쓸이하곤 하여 남획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한국 자신이 새 조약에 맞추어 조업을 하게 되면 1,253억원[정부측 발언]~5,000억원[어민측 발언]이 손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어획량이 엄청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일 간의 분기점을 정하는 문제에서 합의를 보지 못해 일본은 1998년에 어쩔 수 없이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99년 1월 신어업조약을 맺게 되었고, 이때 양국은 독도를 공동관리구역으로 하는 데 동의했다.
1997년 한국은 일본이 수차에 걸쳐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독도에 접안시설을 설치했다. 한국은 이 문제를 대화로 풀려하지 않았고 또 다시 일방적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일본은 독도문제를 평화적수단에 의해서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제의했으나 한국은 이제껏 거부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측 주장에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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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