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Ⅴ. 맺음말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Ⅴ 맺음말  (시대정신 2005봄 통권 28호)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지난 20세기 전반의 식민지기와 관련하여 그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들, 예컨대 일제가 대규모 토지를 수탈하였다거나 대량의 쌀을 약탈하여 실어 날랐다든가 전시기에 여자정신대를 동원하여 일본군위안부로 삼았다든가 하는 대중적 이해는 역사가의 시각에서 지적하자면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오해가 국민의 집단기억으로 성립한 것은 이 글에서 추적한 대로 한국의 국사 교과서가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친 효과가 장기간 누적됨에 의해서이다. 해방 후부터 국사 교과서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실관계의 왜곡은 없었던 편이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조짐은 1960년대부터 조금씩 관찰되며, 1974년 이후 교과서 편찬제도가 국정으로 바뀌면서 전면화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의 40%가 수탈되었다는 이야기가, 식량의 절반이 수탈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교과서에서 정설로 자리 잡는 것은 1974년부터이다. 1932년부터 존재한 위안부를 1943∼1945년간의 정신대와 혼동하는 교과서의 서술은 1979년부터 1997년까지의 18년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되었다.

국민국가가 그의 국민을 고급스런 문명인으로 교육하고자 하는 그 교과서에서 사실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신화가 근 30년간이나 전파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나 배경은 무엇일까? 이 글은 거기까지 충분히 추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장래의 연구과제이다. 한 가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과서 집필자들의 질적 수준이다. 특히 국정(國定)제도로 바뀐 이후 그 문제가 심각하였다. 예컨대 토지의 40% 수탈설의 경우 그 40%라는 수치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를 근 3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따진 적이 없음은 솔직히 말해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3) 그것도 처음에는 ‘전국의 토지’라 했는데 언제부턴가 ‘전국의 농토’로 표현이 바뀌고 있다. 심지어 같은 해의 중등 교과서와 고등 교과서의 표현이 ‘토지’와 ‘농토’로 서로 다르다. 그 둘의 뜻이 같지 않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교과서 집필자들은 그에 대해 무신경하였다. 대개 그들은 전임자가 쓴 것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기본 줄기는 그냥 답습하고 나머지 가지 부분은 마치 수필을 쓰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이러 저리 표현을 고쳤던 것이다. 정신대와 위안부에 관한 각 연도의 기술도 집필자들이 정성을 다해 정확히 쓴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교과서를 적절히 윤색하다가 우연히 양자를 등치시키는 그 곳에까지 다다랐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교과서의 집필자들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정치적으로 동원함에 신화를 필요로 하였던 정치인들, 신화를 기꺼이 수용하였던 국민 대중, 나아가 이들 모두를 포섭한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의 문명, 그 비교사적 수준과 구조적 특질, 이 모두가 신화 만들기의 주역과 조연으로서 앞으로 우리가 추적해야 할 대상들이다.

나는 이 글을 20세기 전반 한·일 양국의 불행한 역사를 초래함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식민지 지배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주기 위해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말해 그 점에 대해 우려가 없지 않지만, 그 점을 회피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에서라면 기존의 통념을 뛰어넘는 어떠한 글도 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개의치 않는다. 나는 역사가로서 역사의 신이 주관하는 법정에 선 증인과 같은 심정으로, 오직 진실만을 말하리라는 선서에 기초하여,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글에 대해 한국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개의함이 있다면, 이 글이 한국인들이 그들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로부터 주체적인 책임의식과 통합적인 성찰을 얻음에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책임의식과 성찰이 배제된 역사의식은, 다시 말해 다른 민족과 다른 인간에 대한 비난과 분노만의 역사의식은, 국가 간에 또 사회구성원 간에 갈등과 대립만을 야기할 뿐이다. 거기서는 배려와 협동의 미덕을 상실한 인간들이 거칠게 충돌할 뿐이다. 나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각 층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갈등과 대립의 현장을 목도하면서 우리 한국인들이 이미 그러한 충돌의 소용돌이에 깊숙이 빠진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소용돌이의 원천에는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정의한 신화의 마성이 작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점을 다시 한번 경계해 둔다.


* 2004년 11월 <한일연대 21>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이상과 같은 위안부의 역사와 관련하여 주로 참고한 전문 연구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7), 요시미(1999), 秦郁彦(1999), 尹明淑(2003), 정진성(2004) 등이다. 개략적인 서술이기 때문에 예민한 논점과 관련하여 일일이 주기를 달지 않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2) 이 글의 초고를 읽은 朴枝香 교수는 이 대목에서 필자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고 충고하였다. 박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 부분을 수정할 의향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원래대로 그냥 두었다. 내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기보다 읽는 사람마다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교과서 서술의 애매함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3)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2002년 이후 국사 교육의 현장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도 함께 집필진에 참가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라는 교과서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숫자가 함부로 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김한종 외 5인은 위안부로 동원된 수를 ‘수십만’ 명으로, 한철호 외 5인은 위안부로 된 여자를 포함한 정신대의 수를 ‘수십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수십만’이란 숫자의 근거도 이해할 수 없지만, 설령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서로 달리 인용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김광남 외 4인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의 총수가 ‘650만’이라고 쓰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 교과서에 이렇게 소설 쓰듯이 근거 없는 수치를 함부로 열거해도 되는지 필자는 참으로 회의적이다.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