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Ⅳ. 일본군위안부의 강제동원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Ⅳ 일본군위안부의 강제동원  (시대정신 2005봄 통권 28호)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전시기의 일제가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순결한 처녀들을 강제동원하여 일본군위안부(이하 위안부로 약칭)로 삼은 천인공노할 반인륜 범죄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 그 분노는 오늘날의 일본정부가 위안부 생존자에 대한 공적 배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국인들의 공통된 시각과 일본정부에 대한 요구는 매우 강고하며 전혀 흔들림이 없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이해와 해결방식이 국내에서 공개적인 논쟁을 벌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언제부터 한국인들은 정신대 또는 위안부에 관해 그 같이 확고한 인식과 입장을 취해 왔던가. 역사가는 그의 직업윤리 상 자칫 몰매를 맞을지도 모를 이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국사 교과서에서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오는 것은 1952년 신석호가 쓴 교과서에서이다(申奭鎬 1952: 213).

노소·남녀를 물론하고 혹은 징용, 혹은 징병, 혹은 학병, 혹은 보국대, 혹은 정신대(挺身隊) 등으로 붙들어 가서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며, 최후에는 소위 국민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 민족을 전쟁에 몰살시키려 하였으며…….

정신대에 관한 신석호의 이 같은 서술은 1962년 발행의 그의 교과서에서까지 한 자귀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후 1973년에 그가 쓴 교과서에서는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언제부터 정신대에 관한 기술이 생략되기 시작했는지 추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무척 흥미로운 점은 위의 기술에서 정신대가 위안부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징용, 징병, 학병, 보국대 등과 함께 열거된 다음, ‘과중한 노동’에 사역된 존재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가 병사를 접대한 행위를 ‘과도한 노동’이라고 표현했다고 읽기는 한국인들의 일반적 언어감각에서 무리이다. 말하자면 신석호의 교과서에서 정신대는 공장 등에 동원된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정신대가 원래 그러한 것이었음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소련의 연합국이 여성 노동을 군수공장에 동원하였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일제도 그에 자극을 받아 전장으로 끌려간 남자의 빈 자리를 여자로 채우고자 했는데 바로 그것이 정신대이다. 정신대라는 말이 최초로 나온 것은 1943년 9월 일본정부의 차관회의에서이며, 1944년 3월에는 내각에서 「여자정신대강화방책요강(女子挺身隊强化方策要綱)」이 결의되었다(井上節子 1998: 7-14). 그에 의하면 14세 이상의 미혼여성을 자발적으로 학교·지역·직장을 단위로 정신대로 조직하여 군수공장에서 노동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때까지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한 것이어서 볼 만한 실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일제는 1944년 8월에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을 발동하여 12-40세 미혼여성을 산업현장으로 강제동원한다. 그렇지만 이 법령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였지 식민지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발동되지는 않았다. 식민지에서 정신대가 조직된 최초의 사례는 1943년 11월 서울 시내의 접객업소에 종사한 남녀 가운데 3,349명(내 조선인 2,454명)의 여자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 1944년 3월에는 여자정신대 제1대가 평양의 공장에, 4월에는 고녀생 제1회 정신대가 인천의 조병창(造兵廠)에 투입되었다. 뒤이어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군수공장에 투입된 정신대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 정확한 총수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전시기의 동원체제를 신석호는 나이 40에 목도하였다. 그러했던 그가 1952년에 그의 교과서에서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 그 뜻이 애매할 수는 없었다. 앞서 해설한대로 그것은 군수공장 등에서 ‘과중한 노동’에 시달린 연약한 여성들을 가리켰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대 신화가 생겨난 과정과 관련하여 한 가지 중대한 전제를 발견한다. 말하자면 신석호가 국사 교과서에서 정신대라는 용어를 구사한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일시하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러한 집단기억이 강하게 성립해 있었다면, 신석호의 정신대 기술이 원래 위와 같은 형태일 수도 없거니와 그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항의가 그 같은 정신대 기술을 10년 이상 교과서에서 건재하도록 방치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1960년대 이후부터 생겨난 것임에 틀림없다.

잠시 위안부의 역사를 소개한다. 최초의 위안소는 1932년 상하이의 일본 해군기지의 주변에서 생겨났다. 현지 부대장의 재량으로 병사들의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기지 주변의 유흥업자들에게 일본군 전용의 위안소를 설치하고 경영을 위탁한 것이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수뇌는 중국 및 동남아 전역의 일본군 주둔지에서 대체로 병사 100명 당 1명의 위안부를 충원하는 위안소를 설치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그 중 최전선에 속하는 일부를 제외한 대개의 위안소가 민간업자들에게 위탁 경영되었다. 위안부는 주로 일본·중국·한국 세 민족으로 구성되었는데, 말기가 될수록 한국 여자의 비중이 커졌다. 그 정확한 숫자에 대해선 구구한 추측이 있다. 위안소 경영주 가운데는 한국인도 있었다. 한국 여자가 많은 위안소는 대개 한국인에 의해 경영되었다. 위안부의 모집은 위안소 경영주나 그들의 대리인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일본군과 총독부는 알선이나 도항증(渡航證)의 발급으로 그에 적극 협조하였다. 모집책에 의한 위안부의 모집에는 광범한 인신약취와 취업사기가 동반되었다. 생존 위안부 175명의 증언에 의하면, 62명이 협박 및 폭력에 의해, 82명이 취업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다(정진성 2004: 66). 위안부들은 위안소를 함부로 이탈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사실상의 구금상태에서 병사들의 위안을 강요받았다. 그들은 당시 국제법이 금하고 있는 성노예(性奴隸)였으며, 일제는 노예제를 조직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위안부들은 병사들을 접대한 대가로 군표(軍票) 형태로 소정의 보수를 받고 위안소 주인과 분배하였다. 그렇지만 축적에 성공한 위안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위안부는 주인으로부터 받은 선대금(先貸金) 등을 이유로 빚에 시달렸으며, 전쟁 말기에는 금융망이 마비되어 군표를 현금화할 수 없었던 불쌍한 경우도 많았다.1)

이상과 같이 정신대와 위안부는 그 역사적 경로에서 확연히 다른 두 존재였다. 그리고 전술한 대로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양자를 동일시하는 대중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이 두 가지를 전혀 구분하고 있지 않을까? 지난 40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나. 그 원인을 완벽하게 다 밝힐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몇 가지만큼은 쉽게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 실제 1943∼1945년간 정신대가 비록 자발적인 참여라고 하나 사실상 강제동원되다시피 할 때 민간에서는 큰 혼란이 있었다. 예컨대 학교에 다니는 딸을 중퇴시킨 다음 결혼시키는 소동이 적지 않았다. 필자의 집안에도 가까운 친척 여자의 결혼이 그러하였다. 저항이 불가능한 강력한 외래 권력이 일찍이 없었던 여성노동을 동원한다고 했을 때 식민지 민중의 정신적 공황이 얼마나 심각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위안소에 여자들을 데려가기 위한 모집책들의 사기와 약취가 극성에 달해 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신대에 가면 위안부가 된다는 소문이,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악성의 유언비어가, 떠돌아다님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 강조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신대로 공장에 간 여자들 가운데는 대오를 이탈하거나 공장이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되는 통에 위안부로 떨어진 여자들이 있었다. 생존 위안부 175명 가운데 8명이 그러했다는 증언이 채취되어 있다(정진성 2004: 66).

그러나 나는 이러한 산발적이거나 비체계적인 기억만으로는 대중의 집단기억이 형성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계기와 작용이 있어서 이들 산발적이고 비체계적인 재료들을 잘 다듬어진 민족설화로 가공해 낸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국사 교과서의 관련 서술을 유심히 추적해 보자. 신석호의 교과서 이외에서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1968년의 교과서에서이다(문교부, 1968: 173).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폭발된 후로 징용령을 실시하여 막대한 노동력을 공장, 광산, 군사 기지로 끌어갔으며 심지어 연약한 여성들까지도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이리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비명에 죽고, 고초를 당한 우리 동포는 수백만이나 되었다.
여기서의 ‘여자정신대’는 그들이 강제동원되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 없어 그 실체가 매우 애매하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끌려간 곳 가운데 ‘군사 기지’가 있어 그녀들의 성(性)이 일본군에 의해 착취되었음이 강하게 시사되고 있다. 간호부도 아닐진대 정신대란 이름의 여성이 ‘군사 기지’에서 달리 무슨 일을 하였겠는가? 나는 이 1968년의 언저리에서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민족설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망치질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2) 공교롭게도 전술한 대로 일제가 토지의 40%를 수탈했다는 신화도 바로 이 언저리에서 생겨났다. 신화의 속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위의 글을 썼으며, 그의 정신세계에서 어떠한 개인적 체험이나 정보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부지불식간에 양자를 오버랩시키게 했는지까지 파헤칠 필요가 있으나 추후의 연구과제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1968년 교과서의 정신대 서술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으며, 이후 1978년까지 교과서에서 정신대나 위안부에 관한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다시 나타난 것은 1979년의 국정 교과서에서이며 이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중등 교과서를 중심으로 서술이 변해온 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79∼1982년: (일제는)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리 학생과 청년들을 전선으로 끌어갔으며 심지어는 젊은 여자들까지도 산업 시설과 전선으로 강제로 끌어갔다.

1983∼1996년: (일제는) 우리 청장년을 강제로 징용하여 공장에서 노동을 시켰고 마침내는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리 청년 학생들을 전선으로 끌어갔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


1997∼2001년: 일제는 <중략> 강제 징병제와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많은 한국의 청장년들이 각지의 전선에서 희생되었다, 이 때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2002년∼ : 일제는 여성들도 근로 보국대, 여자 근로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끌고 가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더욱이 많은 수의 여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아시아 각 지역으로 보내 군대 위안부로 만들어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게 하였다.

1979∼1982년간은 젊은 여자가 끌려 간 곳 가운데 ‘산업 시설’이 있어 원래의 정신대를 가리키는 취지가 엿보이나 동시에 ‘전선’에도 끌려갔다고 하여 곧 위안부로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83-1996년의 14년간에는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여자가 희생되었다고 할 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연상하지 못할 중학생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오랜 기간의 망치질을 통해 드디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1997년이다. 이후 2001년까지 중등 국사 교과서는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기에 이르러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이 국사의 이름으로 훌륭히 공식화되었다.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집단기억의 성립에는 국사 교과서만이 유일한 공로자가 아니었다. 특히 언론의 부주의하고 심지어 선정적이기까지 한 보도자세가 한 몫을 하였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인의 국민적 관심사로 떠 오른 것은 1992년이다. 그 해에 김학순(金學順)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경력을 고백함으로써 성노예제를 조직한 구 일본군의 범죄행위를 국제사회에 고발하였다. 당시 도하 신문과 방송에서 위안부에 관한 공식 호칭은 거의 정신대 일색이었다. 역사가라고도 할 수 없는 어느 교수는 1944년 8월의 「여자정신근로령」을 낡은 법전에서 찾아 낸 다음, 일제가 순결한 여학생들을 위안부로 대량 동원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왔다고 소란을 떨었다. 그러자 가장 유력한 일간지의 하나가 그의 주장을 그대로 1면의 톱기사로 보도하였다.

1997년도 교과서의 극단적인 오류는 2002년에 이르러 수정되었다. 앞서 인용, 소개한 대로 2002년도 교과서는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여 전자가 노동력의 착취임을, 후자가 성의 착취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같은 수정은 역사를 사실에 근거하여 써야만 하는 역사가의 직업윤리에서 볼 때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저간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내의 높아진 연구수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거기서는 아직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여 위안부를 일제가 동원한 정신대의 부분집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한번 만들어진 민족설화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좀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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