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Ⅲ. 궁핍한 도덕경제  “청년들이여, 낡은 역사관을 버려라”

조선왕조가 망하게 된 수많은 이유 가운데 위의 것 이외에 한 가지만 더 추가하라면, 필자의 전공과 관련된 것이긴 하지만, 19세기에 걸친 조선 경제의 침체를 들고 싶다. 결국 나라가 너무 가난해져 외적이 침입해 왔지만 신식 병기로 잘 무장된 군대를 조직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구한말 당시 대한제국의 군대는 서울 주변에 배치된 약 2천 명의 소총 부대가 전부였다. 쓸 만한 대포나 군함은 없었다. 그러니 일본군과 중국군이 서울 드나들기를 제집 마당처럼 하였다. 그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그렇게 형편없이 가난해지고 말았던가?

지난 몇 년간 이에 관한 연구성과가 이전에 비해 제법 많이 쌓였다. 주로 남부지방에서 수집된 다수의 사례에 의하면, 일정 면적의 논에서 나온 소작료가 19세기 내내 조금씩 감소하여 1880년대가 되면 19세기 초에 비해 거의 1/3 수준으로 낮아졌다. 논농사의 생산성이 점점 낮아졌기 때문이다. 밭농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 결과 쌀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지방의 물가기록에서 다른 곡물가격에 대비된 쌀의 상대가격이 상승하는 추세였음을 통해 잘 증명되고 있다.

시장도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우선 대외무역이 그러하였다. 1810년대 이후가 되면 일본과의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두절되고 그에 따라 동래의 왜관(倭館)에서 벌어진 양국 상인들의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서해와 남해를 오가던 상선의 수도 확실히 줄기 시작하였다. 장시와 장시를 오고가던 행상들의 발걸음도 뜸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각 장시의 물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 전까지 그런대로 잘 통합되었던 농촌시장이 서로 갈라져 단위 시장의 규모가 작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시장이 축소되자 생산에 대한 자극도 둔해져 결국 총생산이 정체하거나 감소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재정수입도 감소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적자재정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에 따라 농민에 대한 조세 수탈이 강화되고, 그에 맞서 농민들의 난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민란(民亂)을 맞아 조선왕조의 정치적 통합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무엇 때문에 이 같은 문명사의 비극이 초래되었던가? 왜 비극은 그 조짐의 단계에서 봉쇄되지 못했던가? 가장 중요했던 이유로써 필자는 삼림의 황폐를 들고 싶다. 한반도에서 삼림이 황폐해지는 것은 18세기 중엽부터이다. 이후 1911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산지 가운데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한 32%만이 임야를 이루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산지는 문자 그대로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이거나(26%) 나무가 좀 있다고 하나 1헥타르의 나무를 다 잘라 쌓아도 10㎥ 이하에 불과한 거의 헐벗은 상태였다(42%). 그렇게 산에 나무가 없으니 조금만 비가 와도 토사가 흘러 내려 수로를 막고 논밭을 뒤덮어 농사를 망쳤다. 마치 오늘날의 북한 농업과 똑같은 상황이 19세기 조선의 농업이었다.

삼림이 그토록 황폐해진 것은 인구증가로 인해 식량과 연료의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1917년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끝냈을 때 한반도의 논밭 경지면적은 487만 헥타르였다. 그런데 1870년대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의 경지면적이 484만 헥타르였다.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의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두 배 가량이다. 그런데도 19세기의 경지면적은 조선과 일본이 같았다. 이 사실은 19세기의 조선이 얼마나 산지를 활발히 개간하였는가를 생생히 이야기하고 있다. 산지를 논밭으로 일구면 개간자는 개인적으로 득을 볼지 모르지만 기존의 농지에 피해를 주기 마련이다. 따라서 일본은 이미 18세기부터 산지의 개간을 엄금하고 그 대신 기존 농지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식량의 증산을 추구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조선은 산지를 개간하는 방식으로 식량 수요에 대처하였다.

이에 따라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지를 조선왕조의 집권세력이 몰랐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후반 조정은 산지의 개간을 금지하는 명령을 자주 발동하였다. 그렇지만 하등의 실효가 없었다. 명령만 내려갔지 실제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챙기지 않았다. 19세기가 되면 그런 명령조차 내려가질 않았다. 가난한 농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인데 어찌 그것을 몰인정하게 막을 수 있겠는가라는 도덕적 명분론에서였다.

조선의 국가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서는 백성이 골고루 잘 사는 균(均)의 상태를 이상으로 하였다. 공자가 <논어>에서 이야기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 한다”(有國有家者 不患貧而患不均)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것, 그러한 집단적 생존윤리에 충실한 경제를 가리켜 인류학자들은 도덕경제(moral economy)라고 부른다. 세계의 모든 전근대 사회가 그러한 도덕경제에 속하였다. 반면에 근대의 시장경제(market economy)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도덕경제를 대신하여 개인의 영리추구를 정당화하고 생산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제윤리가 성립할 필요가 있다. 서유럽에서는 영국이 제일 먼저 그러하였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18세기경 그러한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조선에서는 그러한 근대의 경제윤리가 발달하지 못했다. 도덕경제의 집단적 생존윤리가 여전히 강고한 가운데 인구증가와 환경파괴라는 미증유의 도전을 맞아 조선왕조는 합리적인 대응에 실패하고 말았다.
출처 :<시대정신>2005가을,겨울 통권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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