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Ⅱ. 도덕적 세계관, 잘못된 일본관  “청년들이여, 낡은 역사관을 버려라”

1904년의 일이다. 스웨덴의 아손 크렙스트라는 신문기자가 서울을 방문하여 몇 달간 머물렀다. 어느 날 그는 조선의 형벌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여 오늘날 국세청이 자리하고 있는 종로1가의 전옥서(典獄署)를 찾아 갔다. 그를 맞은 전옥서의 책임자는 크렙스트의 몸에 뿔이 없음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장시간 신체검사를 까다롭게 진행하였다.(김상열 역, <코레아코레아>, 미완, 1986, 224-225면). 당시 전옥서의 책임자라면 오늘날 서울형무소의 소장에 해당하니 중앙부처의 국장급이다. 그런 고위 관료가 1904년 그 때까지 서양인의 몸에 뿔이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이 사례는 당시까지 조선왕조의 지성계가 세계 실정에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조선의 왕과 지배집단이 폐쇄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관으로 인해 대외관계를 그르쳤다는 비판은 실은 너무나 자주 거론되어 온 것이어서 새삼스레 꺼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 무슨 대외관계를 어떻게 그르쳤는가라고 따지면 연구자들의 의견은 크게 갈라진다. 예컨대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에 대해 주로 국사학계의 연구자들은 김옥균 등이 일본의 지원을 기대하고 정변을 일으켰다는 이유에서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에 주로 외교학계의 연구자들은 당시 조선이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김옥균 등의 거사는 거의 불가피했다고 좋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후자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1876년 이전 조선왕조는 조공과 책봉으로 상징되는 중화제국의 제후국으로서 존속하였다. 중국의 집권자들은 그러한 제후국도 넓은 의미의 중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 국제질서에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이 도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제1조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로 되어 있다. 이 조문에는 조선은 더 이상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라는 일본의 입장과 그러한 일본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수용한 조선의 입장이 모두 담겨있다. 조선이 일본의 요구에 순응한 것은 예전부터 일본과의 관계에서 자주국으로 대등한 외교를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약 이후에도 조선은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문서에서 중국을 가리킬 때 자주 상국(上國)이라 불렀다. 조선의 집권자들은 한편으로는 자주국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제후국이란 이중의 국체 의식을 별 어려움 없이 그대로 보유하였다. 그에 대해 일본은 강력히 항의하였다. 조선 내에서도 중국과의 외교를 대등한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개화파의 주장이 제기되어 무언가 바람직한 변화가 모색될 참이었다.

그렇지만 1882년에 우연히 발생한 임오군란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중국이 난당을 진압하고 국왕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다음, 임오군란으로 집권한 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해 버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과 중국의 관계가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가 국제사회에 하루아침에 폭로되고 말았다. 중국이 임오군란의 소식을 맞아 신속히 군대를 파견한 것은 실은 그 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79년 일본이 중국의 조공국인 오키나와를 병합해 버린 사건은 중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주일공사 하여장(何如璋)을 중심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할 필요성이 중국정부 내에서 거론되고 있었는데, 마침 임오군란이 그 좋은 명분을 제공한 셈이었다.

중국이 3천의 군대를 서울에 파견할 때 사전에 주권자 고종의 동의를 구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후 고종은 중국과의 사대관계에 충실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이 중국의 번방(藩邦)임을 명시한 중국 측이 제시한 조약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후 중국에서 파견되어 온 멜렌도르프가 외교권을 장악하고 일본과의 조약개정과 미국·영국과의 조약체결을 주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과의 조약체결에서 중국은 조선이 중국의 번방임을 조약 서문에 명기하고자 하였지만 미국이 거절하였다. 이에 중국은 고종으로 하여금 미국 대통령에게 동일 내용의 외교 조회를 보내게 하였지만 미국은 그 문서를 묵살하였다. 미국이 그렇게 한 것은 중국의 번방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는 자국의 체면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이 자주국임을 주장하는 일본의 입장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악성의 불평등조약은 국내에서 외국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한 영국과의 조약에서 맺어졌다. 그렇게 될 일도 아니었는데, 멜렌도르프라는 외교권을 장악한 중국의 대리인이 그렇게 처리하고 만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나는 당시 열국쟁패의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왕조를 반식민지적 종속상태로 내 몬 주범은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중국 군대가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불리한 여건에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은 중국으로부터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충정에서였다고 평가한다. 김옥균이 실패하자 일본은 중국과의 한판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군비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이후 1945년까지 이어진 동아시아의 비극은 원래 그 진원이 서울에 있었다.

이후 1892년 중국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하기까지 근 10년간 고종과 집권세력이 중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자주 외교와 국방을 추구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조선정부는 중국의 후견과 보호에 기대어 일본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는 외교 전략을 택하였다. 그러한 전략이 합리적이었다고 평가되기 위해선 중국의 후견이 최후의 순간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판단과 일본은 도저히 중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양국의 군사력에 대한 판단이 모두 옳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틀렸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양국의 군사력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판명되었다. 중국의 후견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는 뒤늦게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서 밝혀진다. 당시 2천 년의 왕정을 폐지한 중국의 혁명군은 주변의 여러 복속 왕조를 폐하고 그 지역을 중국의 판도에 편입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이 탄생한 것이다.

고종과 집권세력의 두 가지 잘못된 전략적 판단은 그 배경을 이룬 세계관이랄까 국제사회에 대한 질서감각의 문제까지 파고들어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고종과 집권세력이 보유했던 전통적 세계관에서 세계의 중심은 중화제국이고 조선은 그 도통을 이어받고 있는 소중화(小中華)였다. 이 도덕주의적 세계관에서 일본은 바다 가운데 조그만 섬의 오랑캐였다. 나는 청일전쟁의 결과가 판명될 때까지 고종은 일본이 자신의 왕조보다 연간 국민소득이 10배나 많고 중앙재정은 무려 20배나 큰 나라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짐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바다 가운데 오랑캐가 무례하게 천황을 칭하면서 나타나니 고종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였겠는가? 1894년 이후 고종에게는 13년간의 시간이 더 있었다. 그 기간 그가 어떻게 최악의 선택을 거듭해 왔는지에 대해선 너무 장황하기 때문에 쓰지 않겠다.

만약 고종이 중국과의 관계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고 일본과 적절한 신뢰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한반도를 통한 중국과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물론이요, 동아시아의 20세기 역사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조선의 식민지화는 고종의 맹목적인 반일 외교 전략이 초래한 최악의 결과였다. 나는 무어라 해도 고종을 이해하거나 좋게 평가할 생각이 없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식민지화라는 엄청난 재난을 초래한 자초지종을 두고 역사의 신 클리오가 주재하는 청문회가 열렸다 치자. 제일 먼저 소환당할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시의 집권자 고종이다. 그런데도 최근 일부 역사가들이 고종을 계명군주로까지 칭송하고 있으니 참으로 엉뚱한 일도 다 있다는 느낌이다.
출처 :<시대정신>2005가을,겨울 통권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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