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7]-6 줄어드는 미국원조...국제환경은 변하는데

[17] 개발의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17]-6 줄어드는 미국원조...국제환경은 변하는데
그렇지만, 1958년부터 모든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제가 매우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원조가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1957년에 3.8억 달러이던 원조가 1960년까지 2.4억 달러로까지 점점 줄었습니다. 재정자금과 투자자금의 대부분을 원조에 기대는 나라의 경제가 원조가 줄어드니 나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원조가 줄어든 것은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조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여러 나라는 미국이 원조의 형태로 세계에 뿌린 달러에 기대어 전후 부흥을 추구하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이면 미국은 국제수지가 악화하여 더는 달러를 뿌릴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그 대신 195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서유럽과 일본 등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자력으로 국제수지를 방위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미국으로서는 세계 자유무역을 위한 IMF-GATT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할 여건이 갖추어진 셈이지요. 그와 더불어 군사적 논리에 따른 원조가 후진국의 경제발전에 본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후진국은 원조보다 차관을 도입하여 자기 책임으로 장기적인 개발개획을 세워 경제발전을 추구할 일이라는 겁니다. 대외정책의 기조가 이렇게 바뀌면서 미국은 한국정부에 원조의 감축을 통보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 정부는 그 같은 미국의 변화와 요구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미국과의 마찰과 긴장을 증폭시켜 가지요. 그러한 50년대 후반의 위기 상황을 세밀히 추적하고 있는 것이 《재인식》에 실린 이철순 교수의 논문, <1950년대 후반 미국의 대한정책>입니다.

여기서 이철순은 미국의 대한정책이 1957년을 경계로 군사적 안보정책에서 대내적 안보정책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이 보기에 북한이 군사적으로 다시 공격해 올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남한의 내부가 문제였습니다. 일정한 경제적 성과에도 한국은 여전히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습니다.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제어할 국내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보기에 한국은 국민의 환멸과 저항으로 표류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한 나라가 내부에서 무너져 내린다면 반미국적인 정권이 들어설 위험성이 크지요.

미국이 그렇게 걱정하게 된 것은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가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부통령에 야당의 장면이 당선되고, 진보당의 조봉암이 대통령 선거에서 30%라는 큰 지지율을 획득했습니다. 그러자 이미 나이 80을 넘긴 대통령의 후계자가 불투명해지면서 정국이 큰 혼란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혼란을 수습하고 반미국적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으려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경제적으로 성장을 촉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그러한 대한정책을 이철순은 대내적 안보정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그리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부흥부를 중심으로 경제개발계획이 만들어집니다만, 집권자와 정부의 총력 의지를 담지는 못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야당에 대한 불신이 지나쳐 강경일변도로 야당과 언론을 탄압했습니다. 1959년 미국의 강력한 저지에도 끝내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지요.

이 무렵 미국은 이승만 정부를 포기합니다. 그리고선 때를 기다립니다. 곧이어 1960년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으로 4·19의거가 일어나자 미국은 신속히 개입합니다. 이승만을 하야시켜 4·19의 성과를 선점한 것이지요. 이상이 이철순 교수의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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