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5]-1 전쟁의 상처

[15] 한국전쟁과 스탈린 X파일  [15]-1 전쟁의 상처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의 건국사에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남북한을 합하여 엄청난 인명의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한국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국군만으로 사망, 부상, 행방불명자는 99만이며 북한군까지 합하면 191만이나 됩니다.

여기에다 미군의 피해 15만과 중공군의 피해 90만을 합하면 군인으로 사망, 부상, 행방불명자는 300만에 달합니다. 이외에 민간인의 피해자가 있습니다. 그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남북한을 합하여 적어도 200만은 되었을 겁니다. 이만한 사상자 수는 일제가 15년전쟁을 치르면서 감당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3년간의 한국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이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은 산업시설을 파괴하였습니다. 남한에서만 공장건물의 44%, 기계시설의 42%, 발전설비의 80%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쟁은 분단으로 인해 이미 농업과 경공업 중심으로 불구가 된 남한 경제에 소생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대한 타격을 가했습니다.

전쟁 당시 남북한의 인구는 총 2,500만 정도로서 대략 500만가호였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남북한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자를 대략 400만 명이라고 잡으면 전체 가호의 8할에서 1명의 피해자가 났던 셈입니다.

제 주변을 소개하면 사촌 형님 한 분과 외삼촌 한 분이 군인으로 나가 전사했습니다. 한 분은 평남 덕천 청천강 전투에서, 다른 한 분은 경북 안강 전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대략 120만 명의 북한 주민이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외에 피난길에서 이리저리 흩어진 이른바 이산가족에 속하는 인구와 관련해서는 흔히들 1000만 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 남편을 잃은 과부들, 손발이 잘라진 상이군인들이 넘쳐났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상이군인은 1950년대 슬픈 한국의 상징이었습니다.


남으로 남으로 길게 이어진 피난민 행렬

남으로 남으로 길게 이어진 피난민 행렬.

전쟁은 이제 막 출범한 대한민국의 도덕적 정통성에 큰 흠집을 남겼습니다. 북한군의 갑작스런 침공으로 경상도 남부로까지 쫓겨 간 정부는 마구잡이로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전황이 워낙 급했던 탓이긴 합니다만, 권력의 정당성을 담보할 공적 도덕과 명분에서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한 채 젊은이들을 징발하였습니다. 피난행렬을 세워 놓고 젊은이들을 색출하여 끌고 갔습니다. 제 사촌 형님이 그러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무작정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학교 정문에 트럭을 세워놓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차곡차곡 싣고 간 경우도 있습니다. 밤중에 마을을 포위하고 가택 수색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당시 경상도 사람들은 ‘훌치기’라 했습니다.

그것도 공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집안의 자제나 대학생은 강제징발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은 대개 없는 집안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리고선 부질없이 치열하기만 했던 전장에서 의미 없는 죽음으로 소모되었지요.

동원의 실상이 그러했기에 보통 사람들의 기억에서 국가는 저 멀리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을 끌고 가는 폭력체에 불과했습니다. 사회의 정치적 통합체로서 국가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의식에서 질서나 가치로서 내면화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우리의 건국사에 안긴 그러한 부담은 지금까지도 여러 방면에서 쉽게 관찰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잘못 세워진 나라라는 《인식》이나 역사교과서의 언설을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요.


인민군에 의한 집단학살 현장

인민군에 의한 집단학살 현장.

전쟁의 와중에서 민간 사회는 사회대로 적지 않은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지역적 범위와 피해의 정도에 대해서는 짐작할 길이 없습니다만, 수많은 마을에서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학살이 전개된 양상은 대개 패턴화되어 있습니다. 인민군에 밀려 급하게 퇴각하는 군경이 보도연맹에 속한 전향 좌익들을 학살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혹자에 의하면 그 수가 전국적으로 근 20만에 달했다는군요. 피해를 입은 집안에서는 인민군이 들어오자 마을의 우익 인사를 보복 살해합니다. 대개 여기서 그칩니다만 심한 경우 한 단계 더 나갑니다. 국군이 들어오자 우익이 다시 좌익을 보복 학살했습니다. 주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여러 마을에서 그러한 양변(兩邊) 학살이 많았습니다.

그런 마을에서는 1980년대까지 일 년에 두어 차례 여러 집안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만 되면 마을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 버렸습니다. 제가 다녀 본 여러 마을 가운데 충남 논산군 성동면의 어느 마을이 그 한 예입니다. 18세기 이래 조씨 양반 가문이 지배하던 마을이었습니다. 1983년 조씨 가문의 종손은 양변 학살이 있었던 마을의 슬픈 역사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나간 일로 마을이 계속 불화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 슬픈 역사를 절대 어린아이들에겐 전하지 말기로 하자. 이렇게 서로 다짐하였답니다. 그래서 가끔 원수의 집 아이들끼리 사이좋게 손을 잡고 학교를 다니는 것을 보지만, 그래도 제삿날만 되면 마을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는다는군요.

메인 콘텐츠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