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4]-4 역사의 아픔을 정신혁명으로

[14] 반민특위를 되돌아 봄  [14]-4 역사의 아픔을 정신혁명으로
다시 이태준의 《해방전후》란 소설입니다. 일제의 압박을 피해 시골로 피신한 주인공은 그곳의 김직원이란 유생과 일제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국경 바깥에서 삼십 만 대군의 독립군이 일본에 선전포고까지 하였다지요. 해방될 조국의 국호는 고려민국이라고 합니다. 김직원은 감격에 가슴 벅찬 듯 후 한숨을 쉬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렸습니다. “삼십 만! 제법 대군이구려! 옛날엔 십 만이라두 대병인데! 거 인제 독립이 돼 가지구 우리 정부가 환국할 땐 참 장관이겠소! 오래 산 보람 있으려나보!”

그렇지요. 그런 식의 민족의 영웅 서사가 실현됐다면 친일파 청산이 왜 어려웠겠습니까. 친일파들은 혼비백산하여 일본으로 도망쳤을 겁니다. 망명을 권유받은 박흥식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개인자격으로 환국한 광복군의 수는 고작 기백 명을 넘지 못했고, 제가 만날 수 있었던 그 중의 몇 사람은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후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친일파의 숙청에 거부감을 표하면서 선거에 의한 대의정부가 들어서기 전에는 할 일이 아니라는 미국다운 입장을 취합니다. 그 사이 경찰과 군대는 친일 경력의 인물로 채워졌습니다. 그런 마당에 반민특위로 모인 소수의 급진적 민족주의자와 좌익세력이 이미 손에 총을 쥐고 있는 경찰과 군대의 친일인사를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처벌할 수 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의 그랬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만, 그러한 역사적 당위는 역사적 현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마치 《해방전후》의 삼십 만 대군이라는 영웅 서사가 역사적 현실이 아니었듯이 친일파 청산이라는 대의명분은 자력으로 해방을 맞지 못했다는 엄연한 역사적 제약 앞에서 실현될 수 없는 꿈에 불과하였습니다.

이제 반민특위의 좌절에 정치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 대통령이 누구보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음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미국에 40년 가까이나 살면서 끝내 미국의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에 절망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를 친미 사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부당한 비난입니다. 그는 사사건건 미국과 대립하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1958~1959년도 국무회의 회의록을 보면 그의 반미 감정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입니다. 또한, 그는 지독히도 반일주의였습니다. 집권 내내 그는 일본이 미국의 양해를 얻어, 두고 간 재산을 찾으려 다시 쳐들어온다고 믿었습니다. 그에 대비하여 그는 돈이 없어 해군을 만들 수 없는 처지에 민간 상선이라도 많이 만들어 두어야 한다고 각료들을 채근했습니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국내에 잔류한 친일파의 상징적 인물들을 극형으로 처리하는 편이 정치적으로 득책이라는 판단도 들었을 법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친일파의 청산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는 해방 직후부터 민족의 ‘무조건 대통합’을 주장했습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정치적 우군이 일제와 협력한 근대화세력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조건 대통합’은 그렇게 계산된 정치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뿐이었을까요.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자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신중하고 가볍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주권을 회복하였다면 이완용·송병준 등 반역 원괴(怨魁)를 다 처벌하고 공분(公憤)을 씻어 민심을 안정케 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관계로 또 국제 정세로 인하여 지금까지 실시를 연기하여 왔으나(하략).”

그렇게 그는 우리 힘으로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역사의 아픔을 이야기했습니다. 《해방전후》의 김직원처럼 그 역시 전통 유생 출신이지만 삼십 만 대군의 영웅 서사를 꿈꿀 정도로 낭만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민족의 거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부질없는 분열과 혼란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역사적 아픔을 냉정한 현실주의적 판단과 정치기술로 승화시켰던 것입니다.

그가 구성한 초대 내각에 두세 명의 친일파가 포함되었다는 여론이 일자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악질적인 독립운동 방해자 이외에 친일파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악질적인 친일파가 정부에 중용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 점에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제9장에서 썼습니다만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의 친일이라 해봐야 테크노크라트형에 불과한 차원이었습니다. 자꾸 반복되고 있습니다만, 그들은 개항기 이래 문명개화파의 후예들로서 외래의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해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은 문명사의 대전환이란 관점에서 정당하였고 또 필연이었습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친일파 문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합니다. 왜정 때에 아무리 고등관을 지낸 사람이라도 건국 사업에 참여하여 큰 공적을 세우면 그 사람은 이미 친일파가 아니요, 두드러진 친일 사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일본말을 자주 입에 올리면서 일본음식을 좋아하고 일본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속으로 일본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청산될 친일파라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건국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정신혁명으로서 친일 청산이지요.
제가 찾은 정답은 바로 그것입니다. 정신혁명으로서의 친일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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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