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4]-3 박흥식의 재판기록

[14] 반민특위를 되돌아 봄  [14]-3 박흥식의 재판기록
반민특위의 활동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재판을 받은 38명의 재판기록을 찾았습니다. 모두 다 읽을 수는 없고, 제 전공인 경제사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박흥식을 선택했습니다. 화신백화점을 경영한 당대 최고의 조선인 사업가였지요. 반민특위가 제일 먼저 체포한 사람도 그였으며, 제일 먼저 재판을 시작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그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친일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박흥식이 체포된 죄목은 반민법 4조 7항에 “비행기, 병기 또는 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였습니다. 그는 1944년 10월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해방될 때까지 비행기 제작에 종사하였는데, 그 죄목으로 체포된 것입니다.

재판의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재판관이 우익이어서 그랬을까요. 취조기록과 재판기록을 직접 읽은 저로서도 판단이 쉽지 않군요. 국민 대중의 정서를 고려하고 또 비행기 공장을 경영한 것은 사실이니까 법에 따라 얼마간 징역형을 살게 하는 것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그의 죄상이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하여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판기록을 읽은 저로서는 그 점만큼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박흥식의 종로 화신백화점

박흥식의 종로 화신백화점.

비행기 공장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과 참모장의 수차에 걸친 강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점은 전쟁이 끝나자 일본군 참모장이 박흥식에게 비행기회사의 자본금 2,500만 원을 전액 변제한 데서 확인됩니다. 박흥식은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했지, 원래부터 사업가가 제 정신으로 할 사업은 아니라고 진술했습니다. 만들 비행기도 일종의 글라이더로서 목제 비행기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얼토당토 않은 일에 그는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것 같습니다. 우선 1천여 명의 공원들을 모집해서 일본 나고야와 만주 션양에 있는 비행기공장에 연수를 보내고, 상하이에서 비행기 부품을 깎을 선반 수백 대를 구입하여 창고에 보관해두고, 공장의 터를 닦고 인부들의 숙소를 짓다가 부품 못 하나 만들지 못하고 해방을 맞은 것이지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일본군이기에 전쟁이 끝나자 박흥식에게 일본으로 망명할 것을 권유합니다. 박흥식이 거절하면서 변상을 요구하니까 위와 같이 준 것이지요.

박흥식을 취조한 특별검찰은 노일환이란 국회의원이었는데, 나중에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된 좌익의 인물이었습니다. 취조기록에 나타난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두 사람의 논쟁 아닌 논쟁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간단하지 않군요. 이 책의 4장과 5장에서 소개한 식민지 수탈론과 근대화론의 대립이 벌써 그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노일환은 “당신이 성공한 것은 일제의 부당한 비호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궁합니다만, 박흥식은 그에 대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노력으로 일본인들의 신용을 얻었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박흥식은 처음 인쇄업과 종이 무역을 해서 돈을 법니다. 그러다가 은행에 보증을 선 친구가 파산한 일이 생겼습니다. 박흥식은 순순히 그 친구를 대신해 적지 않은 부채를 은행에 상환합니다. 그러자 일본인 은행장이 장래가 촉망되는 조선의 젊은이라고 극구 칭찬하면서 박흥식의 뒤를 적극 밀기 시작합니다. 박흥식은 자신의 이러한 행적을 소개하면서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용과 노력으로 사업을 일구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노일환은 “당신이 민족 수탈의 상징인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의 감사로 취임하였는데, 그것은 반민족행위가 아니냐”고 추궁하였습니다. 박흥식이 조선 총독의 권유로 동척의 감사로 들어가는 것은 1941년경이었습니다. 박흥식은 “당시 동척은 민족의 수탈과 무관한 금융기관이었다”고 반박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납득이 쉽지 않을 강변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경제사 전문가로서 저는 박흥식의 주장에 공감합니다. 동척은 1908년 일본 농민을 조선에 이주시킬 목적으로 세워진 국책회사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주 실적은 고작 4천 호를 넘지 못했습니다. 일본자본주의가 워낙 급성장을 하는 통에 일본에서조차 노동력이 부족해진 까닭이었죠. 그러자 동척은 농지를 구입하여 농장경영을 행합니다. 1925년 당시 전국 80여 곳에 농장을 설치하였는데, 경지면적은 도합 7만여 정보였습니다. 이후 점차 농장경영을 축소하면서 주로 토지담보의 금융업으로 활동의 중심을 바꿉니다. 거래 상대의 7~8할은 일본인들이었습니다. 결국 박흥식은 농장경영과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금융업이 왜 민족경제의 수탈이냐고 반박한 셈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나치스에 협력한 자를 즉결처형하는 장면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나치스에
협력한 자를 즉결처형하는 장면.

노일환이 다시 박흥식을 추궁하기 위해서는 동척이 농지를 구입할 때 값을 치르지 않고 마구잡이로 빼앗았다든가, 다른 지주보다 소작농의 대우에서 악독하였다든가, 조선에서 금융업을 한 것 자체가 수탈이라든가 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그런 증명은 불가능한 성질입니다.

제4장에서 식민지수탈론을 비판하면서 한 이야기입니다만, 일제는 토지를 마구잡이로 빼앗는 야만적인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차 강조합니다만, 식민지 지배의 일환으로 대량의 자본이 건너와 손에 물을 묻히고 좁쌀을 줍듯이 저가의 토지를 대량 매수한 것 자체가 이미 식민지적 수탈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두고 법정에서 불법이니 수탈이니 이름을 붙여 처벌하기는 곤란한 법이지요.

요컨대 박흥식을 법정에서 처벌할 실정법상의 근거는 취약하였습니다. 그의 주요 죄목인 비행기회사는 그의 의지가 아니었고 강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피고의 해명과 변호인의 주장은 그러하였습니다. 그것을 뒤집을 증거는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한편의 희극과도 같은 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정치적으로 또 군사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지요. 인류의 역사는 그러한 초법적인 상황을 몇가지 실례로 전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연합군이 프랑스를 회복하자 뒤를 따른 드골의 군대와 레지스탕스들이 나치스 협력자 수만 명을 인민재판에 붙여 처형한 것이 그 좋은 예로 자주 거론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광복군이 연합군의 뒤를 따라 들어와 권력을 장악하였다면 그러한 초법적 상황이 벌어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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