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4]-2 분열의 근원으로서 친일파 문제

[14] 반민특위를 되돌아 봄  [14]-2 분열의 근원으로서 친일파 문제
오늘날 역사가의 눈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에 관한 여러 자료를 읽어 본 소감은 한마디로 역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과 수사요원은 고작 수십 명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수만 명의 경찰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반민특위가 경찰을 이기기 위해서는 경찰의 지도부가 친일 경력과 무관한 깨끗한 사람들로서 반민특위의 활동에 도덕적으로 승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니면 경찰을 감독 지휘하는 대통령을 위시한 집권세력이 친일파 청산에 강한 정치적 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조건들은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경찰의 대다수는 정도의 차는 있지만 친일 경력의 소지자였으며, 그들이 보기에 동료가 체포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보기에 반민특위의 사람들조차 친일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재판한단 말이야.” 그들의 불평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반민특위의 활동은 소수의 좌익들이 우익 진영에 압박을 가하는 정치공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친일파 청산은 해방 직후부터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한 문제의 하나였습니다.

예컨대 1945년 10월 미국에서 막 돌아온 이승만과 조선공산당의 영수 박헌영이 장장 네 시간에 걸쳐 정치회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두 사람은 친일파 문제에서 입장의 큰 차이를 보입니다. 박헌영은 친일파를 근절한 다음 순전한 애국자로서 진보적 민주주의의 요소들만으로 이루어지는 ‘조건부 통합’을 주장하는 반면, 이승만은 “성스러운 건국 사업에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지 않느냐”고 ‘무조건 통합’을 역설합니다.

제11장에서 소개한 1945년 9월의 스탈린 비밀지령에서도 명백히 나와 있습니다만, 당시 좌익세력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는 데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는 전략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와도 같은 정치적 자산이었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일본에 협력하면서 근대를 학습하고 실천해 온 우익세력의 대다수에게 친일파 문제는 처음부터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약점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친일파 청산은 그 순수한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좌우익 간의 첨예한 대립각을 이룰 수밖에 없는 문제였습니다.

좌우익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우익끼리도 이 문제는 분열의 소지였습니다. 1945년 12월, 귀국한 임시정부의 요인을 환영하는 자리가 한민당의 간부에 의해 마련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임시정부의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장덕수가 “그럼 난 어김없는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받아쳤습니다. 이에 신익희가 “어디 설산(雪山, 장덕수의 호)뿐인가”라고 맞받았지요. 이를 보고 있던 송진우는 “여보 해공(海公, 신익희의 호), 표현이 좀 안됐는지 모르지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시정부를 누가 오라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라고 말하면서 “중국에서 궁할 때 뭣을 해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어”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어느 책에서 이 해프닝을 접하고 저는 마음이 심히 언짢았습니다. 그렇게들 모두가 분열돼 있었던 겁니다. 제11장에서 지적한 그대로입니다만, 해방공간에서 사람들은 민족이니 계급이니 하는 외래 담론으로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몰면서 대립하였습니다. 사람들을 선진적인 정치적 통합으로 이끌 자율적 질서의 공동체는 그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초대 정부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이후 1960년대에 경제기획원 차관까지 지낸 어느 분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정부의 관료들은 친미파, 친중파, 친일파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친미파는 미국에서 돌아온 소수의 고위직이었고, 친중파는 중국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로서 정치적 명분이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실무 능력이 거의 결여된 사람들이었으며, 수적으로 가장 많은 친일파는 일본에 유학했거나 국내 대학의 출신자들인데 정치적으로 취약한 입장이나 실무 능력은 가장 우수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갈등 구조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은 낮과 밤으로 교묘하게 달라졌습니다.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는 남로당이 일으킨 반란이 전개 중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반민특위의 활동은 정부의 실무 관료들을 동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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