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1]-4 분단의 선구는 어느 쪽에서?

[11] 분단의 원인과 책임  [11]-4 분단의 선구는 어느 쪽에서?
이상과 같이 분단을 초래한 일차적인 조건은 사회 자체가 분열되어 있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만 이야기를 끝내서는 곤란합니다. 해방정국을 규정한 외적인 국제조건도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의지 밖이었기 때문에 보다 결정적인 제약조건이었습니다.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이 협력할 여지는 처음부터 적었습니다. 처음 1년간은 그런대로 두 강대국 사이에 타협의 여지가 있어 보였습니다만, 동서냉전이 서서히 달구어지면서 협력의 가능성은 점차 봉쇄되어 갔습니다. 그 두 강대국을 제어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분단은 당시 한반도의 주민집단에게는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남한과 북한에서는 점령군에 의해 선택되고 지원되는 정치세력이 있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일제하에서 근대 문명을 학습한 하급 관료와 테크노크라트형 지식인, 중소 상공업자들이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한 지식인들이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어쨌든 지배적 정치세력이 점령군에 의해 선택되고 지원되었다는 점에서 남한과 북한 간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었습니다.

흔히들 분단의 책임을 1946년 6월 3일, 후일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전북 정읍에서 한 발언에 있다고 합니다만, 이것만큼 심한 중상모략도 없는 것 같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난 뒤 비밀이 해제된 모스크바의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벌써 1945년 9월 20일에 북한의 소련군정에, 소련의 이해관계에 적합한 독자의 정부를 북한에 세우도록 비밀지령을 내렸습니다. 동 문서는 일본의 마이니찌[每日]신문의 기자가 발견하여 1993년 3월 26일자로 공개하였습니다. 스탈린의 비밀지령은 7개 항인데, 제2항이 해당 부분입니다. 그대로 인용하면 “북한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조직의 광범위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 할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다만,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 혁명을 단번에 실행하기는 힘드니까 공산당의 주도로 제1단계의 민주주의혁명을 추진하라는 뜻입니다. 그에 대해선 이미 제1장에서 설명한 바가 있으니 참조해 주십시오. 이렇게 스탈린의 북한정책은 처음부터 확고하였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제국에서는 누구도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황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황제의 지엄한 명령으로 한반도 북쪽의 정치적 운명은 1945년 9월 그때부터 이미 결판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앞세운 채 행진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앞세운 채 행진하고 있다.

이 모스크바 문서를 토대로 한반도의 분단과정을 세밀히 고찰한 논문이 《재인식》에 실린 이정식 교수의 <냉전의 전개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입니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1945년 9월 초까지도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유동적이었으며, 미국과 소련은 서로 타협할 여지가 있었다. 둘째, 타협의 가능성은 9월 12일부터 10월 2일 사이 런던에서 열렸던 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의 전승국 외상회담에서 미국·영국과 소련이 노골적으로 충돌하면서 소멸하고 말았다. 셋째, 연후에 스탈린은 위와 같은 비밀지령을 북한의 소련 군정에 내려 북한에 독자 정부를 수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넷째, 이후 스탈린의 한반도 정책은 일본과 중국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데, 그가 한국전쟁을 도발하게 된 데는 중국의 공산화가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부터 소련군과 그의 협력자들이 북한을 완벽하게 장악한 위에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등, 사실상 정부에 준하는 통치행위를 전개하였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남한의 미군정은 그의 협력자를 선택하는 데 무척이나 주저하였습니다. 미군정에 참여한 국무성의 진보주의자들은 낭만적이게도 좌파와의 협력 가능성에 매우 진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실속이 없는 좌우합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노동운동과 관련해서도 비슷하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박지향 교수의 논문, <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이 그에 관한 것입니다. 이 논문에 의하면 미군정의 진보주의자들은 중도 좌파는 물론, 합법적인 노조운동을 전개하는 한 공산당 계열의 전평[全評, 전국노동자평의회]조차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흔히들 미군정이 노동운동을 무조건 탄압하였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노동운동으로부터 정치세력을 분리하여 노동조합을 노동자의 진정한 대표기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군정의 그러한 시도는 전평이 극좌노선의 불법적인 투쟁을 감행함에 따라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윽고 1947년 3월 미국에서 동서냉전의 개시를 공식화한 트루만 독트린이 발표됩니다. 공산세력의 위협에 처해 있는 터키와 그리스에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선언한 것이지요. 이를 계기로 미군정의 진보주의자들이 추구한 모든 낭만적인 시도는 중단됩니다. 미국은 좌우합작을 처음부터 비판해 온 미운 오리와 같은 이승만을 협력자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은 이리 저리 모색하면서 끝까지 주저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시간을 들여 합의해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자유민주주의의 속성상 그 점은 당연하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처음부터 단호하게 김일성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지명하였던 소련의 스탈린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이쯤이면 분단의 국제정치적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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