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10]-3 독립운동의 실태

[10]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10]-3 독립운동의 실태
기타 남한의 역사교과서나 많은 연구서를 보면 1920년대 이래 만주와 중국에서 ‘무장 독립전쟁’이 줄기차게 벌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독립전쟁은 드디어 1944년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국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연합군과 합동으로 국내로의 진격작전을 준비하였으나 미국이 너무 일찍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통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애석해하는 서술로 독립전쟁의 역사는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1985년 판 국정 교과서에서 관련 서술을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합군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은 그해 9월에 국내 진입을 실행하려던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과장이거나 실태와 동떨어진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주벌판에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독자의 힘으로 전투를 벌인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 한 해였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 장군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서로 합심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둡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그것이지요.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받은 독립군은 연해주 소련령인 알렉세예프스크로 퇴각합니다. 그곳에서 여러 정파 간에 독립군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큰 내분이 벌어지고 그 틈을 타서 소련 적군(赤軍)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여 수백 명이 사살되는 등, 독립운동사에서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자유시참변’이라고 하지요. 이후 독립군이 일본군과 유격전이든 진지전이든 독자의 전선을 형성한 적은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1930년대가 되면 중국공산당의 통제를 받는 항일연군과 팔로군에 속한 조선 청년들의 무장투쟁이 전개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과 중국 간 전쟁의 일환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1945년12월5일

임시정부 요인들(1945.12.5)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항일연군의 영웅적인 전사의 한 사람으로서 양정우 장군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보다 상위의 연대장급 인물이었습니다. 1990년 저는 중국 션양[審陽]의 역사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양정우의 위대한 항일투쟁이 커다랗게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더군요. 반가워서 자세히 읽어 보았더니 조선 출신이란 말이 없더군요. 민족사의 비극을 다시 한번 실감한 대목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국제적 조건과 관련하여 유의할 점은 미국, 소련, 중국 등 연합국의 어느 정부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거나 임시정부 독자의 군사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을 정도로 임시정부의 대표성은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은 이념이나 노선에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체적 조건도 부족한 가운데 임시정부를 지원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장차 일제로부터 해방될 한반도에 걸린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1941년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행동준승(準繩)’을 임시정부에 강요하여 광복군을 중국군 참모총장의 통제하에 둡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임시정부의 조소앙 외무부장이 주중 미국대사에게 중국이 일본의 패배 후에 다시 한국을 중국의 종주권 하에 두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같은 입장은 정도의 차가 있겠지만 중국의 공산당 정부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차 일제로부터 해방될 한반도에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강대국 간의 긴장관계가 벌써부터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요컨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이러한 긴장관계의 국제질서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거나 발언권을 확보한 조선인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현실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일제의 부속 영토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그 국제법적 지위는 1910년 대한제국이 패망할 당시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렇게 대한제국의 패망은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한국의 현대사에 드리웠습니다. 그 깊은 상처는 2007년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직업이 역사가라서 더욱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대한제국의 패망이란 아픈 상처를 지금도 간혹 가슴의 통증으로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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