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9]-4 인적 자본

[9] 일제가 이 땅에 남긴 유산  [9]-4 인적 자본
대한민국이 식민지기로부터 계승한 유산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아니 이 경우는 유산이라기보다 우리 민족의 높은 문화적 능력이 자기 의지로 애써 축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높은 교육 수준의 인적 자본입니다. 대중의 교육열이 폭발하는 계기는 3·1운동이었습니다. 민족의 긴 장래를 위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민족적 자각이 움튼 것이지요. 1920년대의 대중교육은 적령기 아동의 취학률을 20~30% 수준으로 끌어 올립니다. 교육열은 1920년대 후반에 주춤하였다가 1930년대가 되면 다시 폭발합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입학 지원이 정원을 초과하여 소학교에 입학하는 데도 해를 넘기면서 순서를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1930년대 말이 되면 적령기 아동의 취학률이 남자의 경우 60%를 넘어서지요. 대중의 이러한 교육열에 밀려 일제도 할 수 없이 1946년부터 의무교육제를 시행한다는 계획을 내놓을 정도였습니다.

중등 이상의 고등교육도 확대되었습니다. 총독부는 고등교육의 대중적 확대에 무척 인색하였습니다. 고급 인재를 많이 길러내서는 그들의 지배정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지요. 중학교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은 대중의 교육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일본으로의 유학 행렬이지요. 유학생의 수는 이상하게도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부터 부쩍 그 수가 증가하는데, 1942년 현재 총 2만 9,427명에 달했습니다. 그 중에 2만 2,044명, 75%가 중학생이었습니다(《일본유학 100년사》, 재일한국유학생연합회, 59쪽).

요사이 돈 있는 집안에서는 자식들을 미국이나 영어권의 초·중·고등학교에 보내고 있는데, 통계를 보니 2003년에 1만 132명, 2004년에 1만 6,446명이군요. 그런데 그에 준하는 유학생의 행렬이 이미 1940년대에 있었던 겁니다. 식민지의 가난한 민중이 무슨 돈으로 유학을 보냈을까요. 좀 더 세밀히 연구해 볼 문제입니다만, 제 가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0년대 초부터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1930년대 말이면 일본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지요. 그러자 국내에 있는 그들의 친척집 아이들이 그 위를 따르는 겁니다.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건너가서는 돈이 없으니까 신문배달, 우유배달 하면서 악착같이 공부하는 것이지요. 요사이는 거의 없어졌습니다만 제 세대까지만 해도 친숙한 고학생(苦學生)이란 말이 그렇게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총독부의 각급 관서와 학교에 관리와 교사로 취직하였습니다.《재인식》에 실린 나미키 마사히토(並木眞人) 교수의 <식민지기 조선인의 정치참여>에 의하면 1940년경 그 수가 거의 17만에 달하였습니다. 주로 하급직이었습니다만, 조선인 관리와 교사의 수는 일본인보다 많았습니다. 그렇게 1910년부터 총독부의 관리와 교사를 지낸 사람이 모두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연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수십만에 달할 것입니다. 이외에도 금융조합·수리조합 등의 조합과 은행·회사 등에 취직하여 근대적인 행정과 경제활동을 훈련받은 고급 인력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을 떠받친 세력이었습니다.

나미키 교수는 식민지기의 대일(對日) 협력을 이데올로그형과 테크노크라트형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전자는 이광수와 같이 정신마저 일본식으로 되자고 한 사람들로서 전시기의 징병·징용에 적극 협력한 사람들이 되겠습니다. 후자는 위에서 말한 하급직 관리, 조합원, 은행원, 회사원, 그 밖에 의사와 법률가 등으로 근대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과 기능을 쌓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대일 협력은 소극적인 것이었으며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해방 후 이데올로그형의 협력자는 정치적으로 소거되었습니다만, 후자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관련하여 나미키 교수는 제헌의회 의원의 약 30%가 테크노크라트형 인물이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연속적이었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귀중한 인적 자본은 점포와 공장과 회사를 경영한 상인과 기업가들이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전통사회의 보부상을 대신하여 고정적인 점포를 소유하게 된 상인의 수가 부쩍 증가하여 1939년 현재 점포의 수가 39만 6,000이나 됩니다. 1939년 현재 조선인으로 5인 이상 종업원의 공장을 경영하는 사람은 4,000명에나 달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집단을 창립한 삼성의 이병철, LG의 구인회, 현대의 정주영 회장 등이 포함되어 있지요. 이병철 회장은 정미소로 시작했는데, 자서전을 보니 정미소가 아니라 마산의 미두(米豆) 선물시장에서 큰돈을 벌었더군요. 역시 큰 상인은 큰 시장에서 놀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국제적으로 큰 시장에서 훈련받은 기업가 능력이 다소나마 축적되어 있었기에 신생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겁니다. 더구나 북한이 사회주의화하자 거기서 살 수 없게 된 수많은 사람이 남쪽으로 내려왔지요. 그 수가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100만이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는 상당수의 상인과 기업가가 있었습니다. 그 역시 대한민국으로선 값진 유산이었습니다. 예컨대 해방 후 남한에서 메리야스·양말·고무신·유리 공장을 세운 사람들은 대개 북한에서 활동하던 기업가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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