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8]-7 그날의 토론회

[8]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8]-7 그날의 토론회
2004년 9월 2일 저는 MBC방송의 토론회에 나갔습니다. 현 정부가 추진 중인 과거사청산이 토론의 주제였습니다. 그해 3월 2월에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친일파를 조사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그들을 단죄한 기록을 역사에 남겨야 한다는 취지의 법률이지요. 그 법이 국회를 통과한 날부터 저는 죽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집안에 이름 있는 친일파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시골 출신으로 원래 그럴 정도의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그 법이 많은 점에서 잘못된 사실 인식에 기초해 있을 뿐 아니라 역사학이 추구할 올바른 방식의 과거사청산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사실 인식을 법으로 공식화한다는 점에서는 비판과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는 반헌법적 요소까지 안고 있는 악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그해 봄부터 저는 무언가 사회를 향해 발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한두 차례 TV토론회의 초청이 있었습니다만, 연구실에만 있던 사람에게 익숙한 일이 아니어서 사양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날의 토론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만큼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60년도 더 된 심지어 100년도 더 된 과거사를 법률로 정치적으로 청산한다는 것의 부당함을 계속 주장하였지요. 과거에 벌어진 어떤 범죄적 사건과 관련하여 겉으로 드러난 소수의 몇 사람을, 이미 죽어서 자신을 변호할 능력이 없는 그들을, 그 사건과 관련된 동시대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하여, 일종의 편 가르기 방식으로, 그들에게 사건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정당한 방식의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는 것이 제 주장의 요지였습니다. 그러면서 위 법률이 친일행위로 나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인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부녀자를 제공한 행위”(제2조 12항)을 예로 들었습니다. 부녀자, 곧 배우자가 있는 여자가 위안부로 끌려간 적이 있나요. 법을 만든 사람들의 식견이 대단하군요. 그 점은 접어두더라도 이 법에 걸려 이름이 공포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문맥상 일본군은 아니지요. 또한 일본군으로 나가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있는 수만 명의 조선인 병사도 아니지요. 이 법에 걸릴 사람들은 후지나가 교수의 논문에 이름이 소개된 위안소 업주 정도이지요. 모집책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지요. 어린 딸을 죽도록 두들겨 팬 아버지도 포함되어야 하지요. 일본군과 협의하여 여행증명서의 발급을 지시한 총독부의 조선인 관리도 찾아내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 모두를 어떻게 찾아내고 또 찾아낸들 어떻게 구체적으로 확인합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보나마나 위안소 업주 몇 사람의 이름만 친일파 명단에 포함될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업주라고 모두 친일파였을까요. 후지나가 교수의 논문을 보면 그들은 나쁜 짓만 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끝나자 1,400여 명의 위안부를 상하이와 한커우에서 무사 귀국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쓴 인간적인 업주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청산은 아직도 생존해 있는 관련 당사자들의 진솔한 고백을 토대로 하여, 또한 한국전쟁 당시의 한국군과 미국군의 위안부 문제까지도 시야에 넣으면서, 오늘날 한국의 여성 문제와 성도덕을 고양시키는 방향의 국민교육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제 말을 듣고 있던 반대편의 어느 국회의원이 “일본군 위안부를 미국군의 위안부와 등치시키는 것은 일본의 우익이 위안부를 가리켜 총독부가 강제 동원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 벌러 간 공창이라고 하는 주장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취지로 저를 몰아세웠습니다. 이후 저와 그 국회의원 사이에 어지러운 논쟁이 오고갔습니다만, 그에 대해서까지 소개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 다음날 그 논쟁을 지켜본 오마이뉴스라는 웹 신문의 어느 경박한 기자는 제가 위안부를 공창이라고 했다고, 실제로는 하지도 않은 발언을, 대문짝만 하게 보도를 하였습니다. 그 뒤에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는 새삼스레 기억도 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라는 단체는 저의 발언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제가 위안부를 공창이라 했다고 규탄한 다음, 제가 국립대학 교수직에서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요. 뒤이어 여성 국회의원 다섯 사람도 경박하게 같은 성명을 내었지요. 항의 전화가 빗발치고 욕설을 담은 이메일이 수도 없이 밀어닥쳤습니다. 저 멀리 미국 볼티모어의 어느 사람까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가득 채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제 연구실 문에다 계란을 던지고 후다닥 도망친 학생도 있었지요. 경상도 거창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은 제가 이완용의 손자라는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어 왔습니다. 서울 강동구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와의 언쟁도 기억납니다. “교수님 때문에 학생들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으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라는 겁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정대협이 출간한 위안부들의 증언 기록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것을 읽고 그대로 가르치면 되지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합니까.” 그랬더니 그 교사는 “그런 것을 왜 자기가 읽어야 합니까”라고 반박하더군요. 읽을 필요가 없다고요. 진정 그러합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를 매도한 수많은 분들에게《재인식》에 실린 위안부 관련의 두 논문과 지금의 저의 글을 저의 답변으로 드립니다. 《재인식》을 편집할 때의 일입니다. 위안부에 관해 좋은 논문이 한두 편 더 있어 초청하였더니 사양하더군요. 제가 보기에 한국에서 위안부 연구와 시민활동은 조선의 순결한 처녀의 성을 일제가 마음껏 유린했다는 식의 대중적 인식을 토대로 하여 이미 한 개인으로서는 거스를 용기를 내기 힘든 권위와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거절을 당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으로 짐작되는데, 그건 확실히 또 하나의 슬픈 현실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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