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8]-6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라는 수준

[8]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8]-6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라는 수준


조선시대의 기생들. 기생으로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조선시대의 기생들. 기생으로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위안부 사건의 저변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패망 이전의 천황제 일본은 여성을 민법이 규정하는 인격권이나 재산권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가부장제 문화였지요. 그 민법이 조선으로 건너온 것에 대해서는 이전에 지적한 바 있습니다만, 조선 나름의 유사한 전통도 있고 해서 식민지기 여성의 사회적 처지는 실로 비참하였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어린 딸을 늙은 부호의 첩으로 들이거나, 부호가 죽고 나서는 색주가로 팔려 나가는 여인의 기구한 인생살이에 관해서는 19세기의 구소설에서부터 20세기의 신소설에 이르기까지 실로 허다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문화로 인해 이미 전통사회에서 상당한 정도로 매춘업이 발전해 있었습니다. 혹자는 일제가 공창제를 조선에 도입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요. 전통을 지나치게 미화해서는 곤란합니다.

다 아시는 대로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공식 운영한 기생이란 성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는 지방에서 단신으로 올라 온 관료들을 위한 첩 시장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첩의 월급은 시세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일본처럼 영업허가를 받은 공창은 없었습니다만, 그 대신 어느 여자가 양(良)이고 어느 여자가 창(娼)인지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민간에 매춘업이 혼재했음이 전통 조선사회였지요. 그래서 18세기의 어느 선비는 당시의 문란한 성도덕을 두고 “음풍(淫風)이 크게 떨쳐 집마다 마을마다 음부(淫婦)가 아닌 여자가 드물다”고 할 지경이었습니다(한국고문서학회,《조선시대생활사》2, 역사비평사, 113쪽).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임시정부에 의해 ‘대한민국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 공포됩니다. 전문 10조의 아주 단출한 헌법입니다. 제9조를 보면 “생명형 신체형 급(及) 공창제를 폐지함”으로 되어있습니다. 헌법에다 공창제의 폐지를 언급함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개화기에 나온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나라가 망하게 된 한편의 원인으로 문란한 성도덕을 지적하고 있는 글이 꽤나 많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헌법은 그에 대한 민족적 반성을 담았던 것이죠.

여자들을 일본군의 위안부로 내몬 데는 이 같은 전통적 성도덕이나 가부장제 문화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재인식》에 실린 소정희 교수의 논문, <교육받고 자립된 자아실현을 열망했건만>이 바로 그러한 여성사적 시각에서 쓰인 것입니다. 그 제목에다 소 교수는 “개인 중심의 비판인류학적 고찰”이라고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역사의 중심에 국가도 민족도 아닌 개별 인간을 놓아야 한다는 저의 주장과 통하는 시각이군요. 소 교수는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증언을 사료로 하여 그녀들을 위안부로 내몬 것이 가부장의 폭력이었음을 폭로합니다. 문필기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하여 훌륭한 신여성으로서 살기를 꿈꾸었던 소녀이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가시나가 공부하면 여우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학교에 보내주질 않았습니다. 너무나 학교에 가고 싶었던 문필기는 아버지 몰래 학교에 갑니다. 그것을 안 아버지가 문필기를 교실에서 끌어내 죽어라고 두들겨 팼지요. 가슴에 멍이 든 문필기는 몇 년 뒤에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게 해 준다”는 어느 ‘일본인 앞잡이’의 말을 듣고 가출을 감행합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본군 위안소였습니다. 요컨대 무지막지한 가부장의 폭력이 “교육받은 근대적 자아의 실현”을 꿈꾼 한 소녀를 위안부로 내몬 궁극의 원인이었던 겁니다.

저는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시각에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건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요인은 상호 인과적이지요. 일본군과 총독부의 책임이 엄중합니다만, 업자와 모집책, 그리고 자식을 내몬 부모들의 책임도 큽니다. 조선 내에도 일본군의 위안부가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한국군의 위안부가 있었으며, 훨씬 문명화된 형태입니다만 최근까지도 미국군의 위안부가 대량으로 있었지요. 이 모두는 역사적으로 한 계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건을 과거사로만 보지 않고 오늘날 우리 주변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는 현실로 감각합니다. 역사가는 그러한 역사의 복합성과 동시대성을 관찰합니다. 대중은 그러한 역사가의 관찰을 통해 역사를 성찰합니다. 그것이 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역사청산의 방식입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성찰의 역사학은 어느 한 사람이나 집단에 역사의 책임을 미루거나 추궁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역사의 진실은 영원히 미궁이지요. 그런 인간 지성의 한계에 대한 자성이야말로 근대 역사학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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